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3-03-15   2205

[분쟁지역현황] 멕시코 사빠띠스따의 봉기 – 빈곤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선 인디오 원주민의 처절한 저항

다음 글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최상구씨가 정리한 글을 기초로 해서 재작성한 것이다.

빈곤과 소외의 한

우리가 동요로 불렀던 멕시코 번안곡 ‘라쿠카라차’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경쾌한 리듬의 흥겨운 노래지요. 그런데 라쿠카라차의 뜻은? ‘바퀴벌레’입니다. 바퀴벌레는 멕시코 원주민들을 일컫는데, 비참한 처지에 있는 멕시코 원주민들이 스스로를 ‘바퀴벌레’에 비유한 슬픈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그룹 쿠스코(CUSCO)가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했던 마야문명과 아즈텍문명을 지녔던 인디오 원주민들의 행복은 스페인의 선교단과 총칼 앞에 빼앗기고 짓밟혔습니다.

이미 BC 2000년경 옥수수 농사를 기반으로 한 촌락이 각지에 발달하였으며 아즈텍제국이 1325∼1521년까지 번영을 누렸는데, 스페인에게 1521년 8월 정복된 후 300년 동안 식민지 시대가 전개되었습니다. 식민지 역사를 통해 형성된 혼혈인 메스티소(mestiso)가 전체 인구의 60퍼센트를 차지하며, 원주민이 30퍼센트, 백인 9퍼센트, 기타 소수민족들이 나머지 1퍼센트를 구성하는데, 중남미의 대부분 국가들이 그러하듯 지도층을 이루는 이들은 대부분 백인들입니다.

스페인은 식민정책을 통해 은을 포함한 천연자원을 수탈하였으며 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만들었습니다. 스페인의 가혹한 노동착취와 질병 등으로 18세기에 이르러 천2백만의 원주민인구는 거의 백만으로 줄었습니다. 1810년 9월 16일 미구엘 이달고(Miguel Hidalgo)가 토지분배와 스페인지배의 종막을 요구하는 ‘돌로레스의 부르짖음(Grito de Dolores)’을 계기로 멕시코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1821년 빈센트 게레로(Vicente Guerrero)가 이끄는 독립투쟁으로 코르도바 협정을 통해 의회가 구성되었고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1845년에는 미국과의 전쟁으로 유타, 텍사스, 네바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와 콜로라도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고, 1858년에는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간의 내전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1876년 정권을 장악한 포리피리오 디아스(Porfio Diaz)는 30년간 독재정치를 강화하면서 대토지 소유제를 강화시키고, 외국자본의 이익을 대변하자 1910년 11월 20일 멕시코는 혁명에 휩싸이게 됩니다. 멕시코는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각지에서 농민반란, 노동자의 파업, 급진파 지식인의 무장투쟁이 계속되었는데, 자유주의자 F.I.마데로가 농민 출신의 F.빌랴와 E.사파타의 협력을 얻어 1911년 5월 독재자 디아스의 추방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토지 소유자이며 민족자본가인 마데로는 민중이 요구하는 사회경제적 개혁, 특히 토지개혁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사파타는 토지 재분배를 요구하는 아얄라플랜을 발표하고 토지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후 반혁명쿠데타가 발생하였고, 혁명파는 지주·민족자본가·중간층 등을 대표한 카란사-오브레곤파와 빈농을 대표한 빌랴-사파타파로 분열되어 혼란을 거듭하다가 카란사-오브레곤파가 1916년 말에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A.오브레곤은 1917년에 제정된 신헌법을 통하여 ‘물, 토지, 지하자원은 본래 국가에 소속한다’는 것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사적 소유권은 제한될 수 있다’는 것 등을 규정하여 농토뿐만 아니라 외국자본이 소유하는 광산, 석유, 철도 등의 국유화의 길을 열었지만, 미국의 압력 등으로 1917년의 헌법규정은 1930년대까지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토지개혁과 국유화는 식민지 시대와 디아스정권시대에 확립된 대토지소유와 농업의 플랜테이션화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사탕수수 농업은 멕시코에서 대농장의 확대와 원주민 토착사회의 붕괴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사탕수수에서 설탕이 나오려면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대량의 땔감은 필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대농장은 이를 위한 광대한 임야를 필요로 하였고, 사탕수수와 설탕의 운반을 위한 목축업도 필요하였으며, 이전의 관개수로를 대농장에 맞게 건설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토지가 필요하였습니다. 1800년대에는 말 떼께스끼뗑고 마을은 비스따에르모사 대농장이 수로를 변경하여 교회 첨탑만이 보이는 저수지로 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대농장 주변으로 쫓겨나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원주민 공동체는 토지에 이어 산과 물마저도 대농장에 빼앗기고 부를 약탈당하고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일생 동안 살아왔던 터전에서 쫓겨나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특히 멕시코 동남부에 위치한 치아파스(Chiapas)주는 석유, 목재, 커피 등 자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피약탈 1순위인 지역이자 이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전체인구 350만명 중 원주민이 약26%를 차지하고 있는데, 절대 빈곤층이 대다수로 전체인구의 절반정도는 수돗물을 공급받지 못하고 2/3는 상하수도 시설이 없는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지역 초등학교의 절반은 평균 교사수 한 명으로 취학 대상아동의 72%가 초등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노동 및 가사에 동원되고 있으며, 의료시설도 매우 부족하여 인구 1,000명당 0.2개의 의료시설, 0.5명의 의사 및 0.4명의 간호사가 있고, 수술실은 인구 10만명당 하나가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치아파스지역 거주인의 54%는 영양결핍에 시달리고 있고, 산악고지지역 거주민의 경우 약 80%가 영양결핍을 겪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외세의 수탈과 빈곤, 소외는 원주민들로 하여금 총을 들게 만든 것입니다. 1980년대부터 소규모 마르크스주의 그룹으로 형성되었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Zapatista Army of National Liberation: EZLN) 주도로 무장봉기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난 5백년간의 산물이다!(We are a product of 500 years of struggle)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이 발효되는 해인 1994년 1월 1일, 멕시코 남부의 치아파스지방에서는 정의, 자유, 민주주의를 외치며 인디오 원주민들이 그들의 빈곤과 소외를 온몸으로 거부하면서 사파티스타가 발표한 전쟁선언문의 첫 문장입니다. 1876년 포르피리오 디아스 독재 정권이 지배할 때, 그에 맞서 싸운 혁명군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철저한 토지 재분배와 공동체의 토지 소유 허용 등을 요구하며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원주민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고자 이름을 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봉기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멕시코 정부가 벌금부과와 징역형을 동반한 강력한 벌목제한 조치와 강제이주정책을 실시하여 대다수 원주민의 생계수단이 제한되었기 때문입니다.

1994년 1월 1일 무장봉기 이후 정부군과의 교전은 계속되었고, 평화협상은 난항을 거듭하다 1996년 1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무력불사용을 선언하고 같은 해 2월 멕시코 정부와 최초로 “원주민 권리와 문화”에 대한 협정(San Andres)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는 멕시코에서 심각한 문제인 원주민들의 권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기득권층을 대변한 보수우익 정치인들의 반발로 대폭 수정되어 의결되어 원주민 자치권은 보장되었으나 원주민 권익 신장의 핵심인 토지 소유권과 자원 이용권은 제외되었습니다.

오히려 정부측은 1997년부터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대량의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2000년 71년간 집권한 여당 후보를 누르고 국가행동당(National Action Party: PAN)의 비센테 폭스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그는 선거과정에서 치아파스 지역에 파견된 정부군 병력의 철수와 평화협상을 공약하였습니다. 당선이후 치아파스지역에 임시로 주둔하고 있던 정부군 기지를 폐쇄하고 반군을 석방하는 등 일련의 화해조치를 취하였는데, 그 결과로 2001년 3월 사파티스타 지도자인 마르코스가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치아파스에서 멕시코 시티까지 도보로 행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마르코스는 폭스대통령의 회동제의를 치아파스지역내 정부군의 완전 철수를 요구하면서 거절하여 평화협상은 재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Ya Basta!(이제 그만)

사파티스타운동은 기존의 분쟁들과는 달리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식민통치에서 비롯된 원주민들의 소외와 빈곤이 독립이후에도 지속된 점에서 인도네시아 아체지역의 분리독립운동과 맥을 같이 하지만, 이들은 독립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들은 소말리아의 경우처럼 군벌들간의 정치투쟁이 아닙니다. 다만 수백년 동안 보호받지 못했던 원주민들의 권리를 인정해달라는 것입니다. 원주민 고유의 생활방식, 언어, 자치권 등의 인정은 멕시코 전역에 퍼져 있는 모든 원주민 공동체들의 보편적인 요구사항이기도 합니다.

멕시코에서 통합을 통해 하나됨을 강조하는 `메스티소 민족주의`는 인디오 원주민이 그 뿌리이면서도 막상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1천만 인디오들을 사실상 시민에서 배제시켜버립니다. 따라서 사파티스타들은 허구적인 통합이 가져온 사실상의 배제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차이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고 자신들의 문명을 존엄성을 지닌 것으로 인정해 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들의 운동을 주목하게 하는 점은 바로 이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반대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Ya Basta!(이제 그만)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마치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제3세계국가들에 대한 만행에 대하여 50년이면 충분하다고(50 Years Is Enough!)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외침은 중남미 지역에서 미국의 주도하에 끊임없이 자행된 수탈의 중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봉기 시점이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된 1994년 1월 1일이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납니다.

실제로 멕시코는 북미자유무역협정이후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미국 농산물이 낮은 관세로 대량 유입되면서 멕시코의 주된 생산물인 옥수수는 생산기반이 붕괴되었고, 1995년에 이르러서는 농민의 절반이 굶주림의 고통에 빠졌습니다. 또한 농촌의 붕괴로 실업률은 1997년에 65%로 치솟았고, 미국으로의 불법 이주로 많은 인권문제를 초래했습니다. 또한 외채를 해결하기 위해 차관을 계속 도입해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이 강제한 구조조정과 자유무역 협정을 통한 수출 중심의 개발 모델로의 전환은 생태계와 함께 호흡해온 전통 농업을 뿌리뽑았고, 초국적 기업들은 주변 생태계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농산물을 대량 재배하여 생태계 파괴를 더욱 가속화시켰으며, 울창한 숲은 외화벌이를 위해 벌목되었습니다.

사파티스타운동은 바로 이러한 ‘파괴의 연속’은 ‘이제 그만’하자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인터넷을 통해 알려냄으로써 세계화의 기반이었던 정보통신의 발전을 이용, ‘반세계화의 세계화’를 형성하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파티스타운동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온 지구를 뒤덮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종교도, 종족간의 배타적 증오도, 정치권력도 아닌 전지구적 문제에 대하여 지역적인 행동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발칸반도의 문제나 아프리카의 분쟁들처럼 과거 식민지 역사나 냉전체제의 붕괴에 따라 발생되는 문제가 아닌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오늘의 현실로 인하여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향후 21세기가 결코 평화롭지만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9.11테러 이후 군사적 일방주의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으로 아랍문명은 과거의 ‘십자군 전쟁’을 더 이상 과거가 아닌 오늘의 문제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새천년의 설레임은 다시 한번 전쟁과 광기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다시금 희망의 설레임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나서야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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