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칼럼(aw) 2003-10-22   795

<안국동 窓> 재신임정국이 정치지형 변동을 가져올까

태풍 매미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우리 국민들은 지난 10여 일 동안 그보다 더 어지러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지간한 일에는 익숙해진 국민들도 취임한 지 8개월도 안된 대통령이 재신임 투표를 선언하고 이에 대해 정치세력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까지 극한적으로 분열하는 양상을 지켜보면서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에 국민적 합의가 과연 존재하였는지, 그리고 지난 10여 년의 민주주의 실험이 무엇을 성취해냈는지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멸의 파국으로 치닫던 정치는 야당세력이 재신임 국민투표의 실시를 주저하고 이에 대통령이 한 걸음 물러서서 수습의 자리를 마련하는 양상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우리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모색하는 정치적 대타협이라기보다는 일시적인 정략적 흥정이라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정치적 불안정을 우려한 국민들이 현 체제의 유지를 더 선호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없었다면,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에 야당이 발목 잡히지 않았다면, 대선 패배로 분열된 야당이 대안부재 상태에 있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예측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 민주주의를 점검하고 나아가 보다 심화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들이 유실될 위기에 처해 있다. 송두율 교수에 대해서는 검찰에 의해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되었고, 인권과 평화라는 인류보편적 가치의 시금석이 될 이라크 파병 문제는 국민적 토론과 합의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여기에 재신임 투표마저 유야무야 되면서 다시금 구태의연한 정치가 반복된다면 우리는 정치권의 유희에 엄청난 소모전을 치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국면을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한 자기성찰의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재신임 정국 초기에 우리 사회의 성원들이 그 시기와 방법 등과 같은 지엽적인 문제에 몰두하였던 것처럼 또다시 정치적 흥정과 근시안적인 전술 마련에 급급해 한다면 이처럼 진정성을 상실한 이벤트정치는 지속될 것이다. 그 경우에 이 정권이나 우리 사회의 앞날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우리 사회의 원로들이 대통령에게 초심으로 돌아갈 것을 조언했던 배경에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대통령선거 이전으로 돌아가 개혁으로 심기일전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노무현 정권이 재신임 투표를 내걸 정도로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현상적으로 개혁적이든 아니든 나름의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던 정치적 교착상태에 있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집권세력은 그 원인을 지지세력의 과도한 분배 요구와 야당세력이나 보수언론의 비협조와 저항으로 돌리고 있지만, 그보다는 이미 예견된 사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그들의 역량부족과 정책실패의 탓이 더 크다고 본다. 민주적 심화를 위해 사회적 재분배구조를 변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이익이 박탈될 위기에 처해 있는 보수세력의 저항은 비단 이 정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현재보다는 그 강도나 조직력이 약했지만 지난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심화된 보수세력의 불만은 지난 대선 이후 폭발한 좌절감으로 인해 더 격렬해지면서 그 타협점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되었다.

이미 경험하였고 충분히 예견되었던 상황에 대처할 준비가 결여되어 있었고 이를 풀어나갈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현 집권세력은 현재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왜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였을까? 무엇보다도 현 정권이 역동적이었던 대선의 과정과 결과에 현혹되어 자신들의 승리가 얼마나 취약한 지반 위에 서있는가에 대해 냉철하게 인식하지 못한 데 있었다. 인터넷과 세대에 근거한 정치적 지지기반은 기본적으로 까다로운 유권자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지지이동이 정책에 따라 매우 탄력적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또한 실제의 지지도에 비추어 조직화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선거 이후 체제유지에 필요한 정치적 동원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 취약한 지지를 최대한 동원하였으면서도 그 결과는 박빙의 우위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지형은 민주화 이행 이후의 불안정성과 유사하기 때문에 집권 이후에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장하지 않는 한 역전가능성을 항시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불안정한 균형을 안정화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지속적으로 동원하면서 중도세력을 포섭하고 나아가 보수세력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정치적 세력관계에 기초하여 협상가능한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나가는 데에 신중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집권세력은 개혁을 지연시킴으로써 정치적 지지세력을 이반하게 만들었다. 이념적으로 상충하더라도 -코드가 맞지 않더라도- 정치적 스펙트럼 상에서 중도에 위치한 세력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당파적 전술에 몰두함으로써 반대세력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그 결과 열렬한 지지세력을 제외한 중도세력은 현 정권에 저항하지도 지지하지도 않는 정치적 부동집단으로 변모하였다. 이들은 재신임 투표와 같은 막다른 길목에서는 현 정권을 지지하지만 평상 정치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양상을 띠게 된다. 오직 비판능력을 상실한 지지세력만이 정권 주변에 남아있는 형국이다.

현 집권세력의 치명적 결함은 스스로의 도덕성과 개혁성에 대하여 과도한 확신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구래의 금권정치와 지역주의로부터 자유롭다는 그들의 믿음이 왜곡된 상징조작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는 국민들은 의외로 많다. 구정치의 태반인 선거제도를 개혁하지 않고 치러낸 대선에서 깨끗한 손과 개혁적 정책만으로 승리했으리라 믿을 정도로 국민들은 우둔하지 않다. 국민들은 현 대통령이 변형된 지역주의를 바탕으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선거에서 승리하였다는 사실을 항상 상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망각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 정권의 정당성은 선거의 승리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정치적, 정책적 수행능력에서 더 추구되어야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집권세력이 그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파국의 벼랑에 서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개혁의 헤게모니는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되었고 쉽게 역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수구보수세력의 조직된 동원이 아무리 강화되더라도 개혁세력을 압도할 수 없는 불안정한 평형상태는 상당 기간 지속되리라 판단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국민 일반의 민주주의와 개혁에 대한 높은 기대수준이 모든 정치세력에 대해 엄청난 압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 집권세력의 선택지는 비교적 단순하다. 민주적 심화를 위한 지속적 개혁 안에서 스스로의 정치적 기반을 확립하거나 아니면 급진적 개혁세력과 거리를 두면서 보수세력과 타협하는 양단간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노정권이 처한 위기는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고 어정쩡한 노선에 서 있었던 데에 기인한다. 대통령은 모든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적 상징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신의 지지세력의 편에 확고히 서서 반대세력과 갈등하고 타협하면서 일관된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민주화이행이 친민주주의 세력의 주도하에 진행되는 다양한 집단들의 다층 체스게임이듯이 개혁정치 역시 개혁세력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복잡한 경기이다. 개혁정치가 선별된 개혁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선민의식은 여우의 간교가 없이 사자의 맹위만을 앞세우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다.

현실로 돌아와 보면, 노정권이 아무리 허약하다 하더라도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인적 대안이 없는 수구보수세력에 의해 압도되지는 않는다. 불가피한 정치현실에서 초래된 노정권의 비도덕성과 부패가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수구보수 세력에 견주거나 ‘오십보백보’로 보기도 어렵다. 도덕성과 개혁적 비전과 현실정치적 권력 사이에서 불편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지형에서 노정권의 선택은 전자를 무기로 후자의 균열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제 노정권은 정략적 분열의 정치에서 벗어나 개혁적 통합의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민주주의와 개혁을 향한 국민의 높은 기대수준을 신뢰하면서, 지지세력의 개혁적 요구를 사회진보의 에너지로 이끌어 올리면서, 중도세력에게는 편가르기보다는 ‘덧셈의 정치’를 구사하면서, 궁지에 몰린 반대세력에게는 민주적 경기규칙의 수용을 담보로 개혁의 대열에 통합해내는 신념과 용기, 그리고 관용과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윤상철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참여연대 협동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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