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칼럼(aw) 2005-02-02   569

<안국동窓> 새출발의 조건

언뜻 보기에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다. 새해에는 큰 갈등이나 싸움이 없을 것이라는 대통령의 선언이 실현될 조짐일까. 때 아닌 밀월 분위기가 여야와 언론 사이에 감돌고 있다. 승자와 패자 구분 없이 서로 상처만 잔뜩 안는 소모적 싸움을 중단하고 경제부터 해결하자는 새 출발의 호소가 제대로 먹혀 든 결과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지금의 평화가 새해 덕담 수준의 휴전이 아닐까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빛나는 목표와 한두 개의 수사적 구호로 사회가 통합되고 모두가 새 출발의 기분을 낼 수 있다면 그 효용은 크다. 그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지난해 마지막 며칠 동안 여의도의 지진해일과 같은 소용돌이를 빠져나왔다 해도, 그리하여 정치인과 언론이 아침 안개 같은 새 출발의 기호를 살포해도, 정당들이 제각각 임시국회와 전당대회를 앞두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전열을 가다듬어도, 그것만으로는 어림없을 것 같다. 싸움은 종료 선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적당한 타협 곤란

새 출발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지만, 그 방식이 어떠하냐가 핵심이다. 본질과 원칙을 비켜 가는 타협은 불씨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외면하는 꼴이므로 새 출발을 약속하지 못한다. 국가보안법 폐지안이 아주 적절한 예가 되겠다. 우선 새해를 맞아 새 출발을 하고 보자는 유력한 주장은 정치 싸움의 종결을 전제한다. 그때 싸움이 끝났다는 말은 실제로 싸움의 원인이 제거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싸우지 말자는 제지에 불과하다. 그래서 부질없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며 여의도에서 단식을 벌이던 국민연대나 서초동을 행진하던 민변 변호사들만 자제하면,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싸움은 우선 없을 것이란 판단이다. 하지만 정치는 싸움을 억지로 말리려는 사람들이 상수겠지만, 적어도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굶고 행진하며 시위한 사람들이 더 전문가다.

충정으로 국민 통합을 독려하는 호소에는 경제 문제 해결이란 필수 당의정이 들어 있다. ‘먹는 것’의 충족은 최우선일지는 의문이나 최우선급 과제임엔 분명하다. 그런데 그 고통스러운 현실의 숙제가 국가보안법과 어떤 관계에 있단 말인가. 국가보안법 폐지가 경제 회생이나 정당한 기업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설득력 있는 논리적 근거가 제시된 적은 없다. 냉정히 따지면 국가보안법 폐지는, 남북문제를 포함한 대내 관계에서나 시장 개방을 앞둔 국제 관계로 보나, 건국 이래 최초의 호의적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폐지에 대한 결사적 반대로 빚어진 혼란이 경제를 소홀히 하는 데 영향을 끼친 바가 없는지 솔직히 반성해야 한다. 정부 수립 직후 발효된 국가보안법은 지금까지 한시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 그 존재의 폐해는 크지만 폐지에 따른 부작용은 극히 작다. 거의 모든 형사법 학자들이 그렇게 말해도 신중히 귀 기울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 문제만 들먹이면 미신까지 믿으려 하고, 국가보안법에 대해선 이성을 외면하는 가벼움은 어디서 비롯했을까. 그것이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새 출발의 장애물이다.

2월 국회서 마음열고 논의를

어제까지의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 개혁 주도 세력에만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선거의 패배를 물리적 힘과 감정으로 밀어붙인 야당의 규칙 준수 정도도 엄격히 평가돼야 한다. 이념 대립과 명분 투쟁이 경제를 포함한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면 당장 중단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념 대립과 명분 다툼은 누가 부추겼는가. 엄연히 우리 헌법에도 스며 있는 사회주의 원리를 조금이라도 비중 있게 다루려면 색깔론이나 내세우고, 백주에 국회에서 간첩 소동을 일으키는 행위부터 사라져야 일의 순서가 잡히지 않겠는가.

2월에 시작하는 국회에 바란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조건을 소심하게 따질 일이 아니다. 국가보안법의 폐지 자체가 새 화합을 위한 조건의 하나란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으로 함께 새로이 출발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 이 칼럼은 <동아일보>에 실렸던 글 입니다.

차병직 (변호사,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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