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칼럼(aw) 2006-03-27   706

<안국동窓> 좌파적 신자유주의, 우파적 신자유주의

지난 3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은 또 한번 국민들과 직접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에는 다소 특이하게도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라는 이름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인터넷을 좋아하기는 좋아하는 모양이다. 외국에 가서도 인터넷에 계속 글을 올려서 자기 생각을 국민들에게 전하더니 이제는 국민과의 대화를 아예 ‘인터넷 대화’로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데 이제 노무현 대통령이 인터넷의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여러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이 인터넷은 ‘지구적 열린 정보통신망’으로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는 반면에 여러 반민주주의의 문제를 낳고 있기도 하다. 이 문제는 ‘개똥녀 사건’과 같이 불특정 개인을 불특정 다수가 비난할 때보다도 특정인을 열렬히 지지하는 다수의 대중이 존재하는 경우에 특히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 경우에는 인터넷의 가장 중요한 작동방식인 합리적 토론과 민주적 결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민주적 매체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장점과 한계를 가장 잘 보여준다.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는 이제 임기의 3/5을 지나고 종착점을 향해 나아가는 참여정부의 정책방향을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자리였다. 그런 만큼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내용상으로 보자면, 이미 여러 차례 발표된 정책방향을 다시 한번 밝히는 자리였을 뿐이다. 그것은 사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정책의지’를 공개적으로 다지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지만, 나는 그 중에서 부동산 대책만은 꼭 제시한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 부동산 투기는 실로 이 나라의 목에 걸려 있는 맷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양극화의 핵심이요, 부패의 원천이며, 토건국가의 초석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의 척결은 사람답게 사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크게 닦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오간 이야기들 중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크게 끌게 된 것은 정책에 관한 설명보다는 ‘좌파적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인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정부의 성격을 ‘좌파적 신자유주의’라고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해 논란이 일자 청와대는 실용주의를 강조하기 위한 ‘반어법적 농담’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농담으로 여기기에는 ‘좌파적’이라는 형용어나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나 한국 사회에서는 모두 너무나 무거운 말이다. 한국의 우파에게는 ‘좌파’는 물론이거니와 ‘좌파적’인 사람도 거의 처단 대상이다. 반면에 한국의 좌파에게 ‘신자유주의’는 만악의 근원으로서 좌파와는 결코 어울릴 수 없다. 명백히 형용모순의 개념을 제시했으니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사실 ‘초시장주의’ 내지 ‘초기업주의’를 가리킨다. 국가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다시피하는 하이예크를 그 이론적 비조로 섬기는 신자유주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자유거래’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지구적 차원에서 경쟁을 격화하고 이 세상을 갈수록 ‘승자독식’의 세상으로 만들어간다. 여기서 신자유주의라는 명칭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소수의 승자에게는 유례없이 거대한 자유를 부여하는 반면에 다수의 패자에게는 어떤 자유도 누리기 어려운 노예의 삶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체제가 자유주의라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 아니겠는가? 마치 한국의 반민주세력이 자신들을 ‘자유주의자’라고 선전하는 것처럼.

‘좌파적 신자유주의’에서 몸통은 역시 신자유주의이다. 이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일단 솔직했다. 참여정부는 개혁에 대한 여러 기대를 저버리고 실로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좌파적’이라는 형용어에 초점을 맞춰서 이념공세를 퍼붓는 한국의 우파는 문제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결코 좌파적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좌파적 신자유주의’는 언뜻 기발해 보이기는 해도 사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경제노선으로서 신자유주의는 오직 ‘극우파적’이거나 ‘우파적’일 수밖에 없다. 참여정부는 좋게 보아야 ‘우파적 신자유주의’이다. 물론 극우파에게는 이마저도 ‘좌파적’으로 보일 것이다. 특히 부동산투기로 치부하고 세력을 불린 얼치기 반민주 극우파에게는.

‘극우파적 신자유주의’는 경제적으로 모든 것을 거래의 대상으로 만들고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자유를 내걸고는 자유를 억압하는 노골적 반민주노선을 가리킨다. 이런 ‘극우파적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는 ‘우파적 신자유주의’도 나름대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결국 신자유주의일 뿐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회의 양극화와 자연의 파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 개혁이다. 삼성공화국으로 나타나는 재벌 중심의 성장주의, 한미FTA의 조속한 타결을 통한 급속한 미국화 등은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부동산 투기를 막는 ‘우파적 신자유주의’라도 제대로 하기를 바랄 뿐이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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