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칼럼(aw) 2008-07-07   1357

<통인동窓> ‘순수’와 ‘정치적인 것’의 사이

 “순수하게 국민건강을 걱정하는 시민들에 의해 시작됐지만 이제 반미 정치투쟁으로 변질됐다”(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 6/27), “선량한 의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좌파들이 내세우는 정치적인 구호에 선동되어…”(한나라당 주성영 의원, 6/16), “쇠고기 문제만을 외치던 순수 촛불 집회가 아닌 ‘정권퇴진’ ‘5대 의제 확대’ 등 정치집회로 변질”(이문열, 6/17)…

최근 집권당과 정부가 촛불시위에 강경대처 방침을 밝히면서 내세운 키워드는 ‘폭력’과 ‘정치적’이라는 2가지다. 그리고 ‘정치적’이라는 평가에는 ‘순수’라는 대비 이미지가 동반된다. 우리는 ‘순수한’ 동기에 의한 시장, ‘순수한’ 주주총회, ‘순수한’ 경제정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특정 경제제도와 행위는 이해관계자에 따라 편향된 이익과 불이익을 낳지만, 경제자체에 대해 도덕적 잣대를 대지는 않는다. 또한 ‘선량한’ 의도를 가진 소비자와 그렇지 못한 소비자를 구분하지도 않는다. 각 경제행위자들은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다양한 전략적 선택을 하지만, 이를 동기의 ‘순수성’라는 잣대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특정 정치행위는 파당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만, 정치는 다양한 입장들이 공존하고 경쟁하는 공적 영역이다. 그런데 ‘정치적’ 혹은 ‘정치적인 것’은 왜 항상 ‘순수하지 못’하고 ‘선량하지 못’한 것의 이미지로 매도되는 것일까? 다양한 정치행위자들(거리에 선 일반시민들을 포함하여) 역시 이해득실, 이념-정책적 찬반에 따라 다양한 선택을 하지만, 왜 그 결정들은 경제행위자들의 선택과는 달리 항상 ‘동기’와 ‘의도’에서부터 ‘순수’해야 하는 것일까?

어떤 행위, 감정에 대해 순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감정이다.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나 명분을 들어 특정 개인이 가진 사적 감정 상태의 타당성을 평가할 수는 없다. 반면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며 어떤 것이 정치가 다루어야 할 의제인가에 대한 판단은, 명백한 근거와 기준에 입각해서 그 사회가 합의를 해야 할 문제다. 사적인 감정판단이 순수하든 그렇지 않든, 이와는 무관한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적 감정 상태를 ‘정치적인 것’을 판가름 하는 잣대로 삼을 경우, 정치의 언어에 논리를 거세하고 사회적 합의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순수하거나 혹은 순수하지 못하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또한 이런 감정표현의 언어들은 대조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좋다 싫다, 순수하다 불순하다… 양분 경계가 분명한 이런 언어들이 정치언어로 들어오게 되면, 정치적인 것과 아닌 것에 곧바로 경계의 이미지를 덧씌우게 된다. 쇠고기문제만 다루면 ‘순수’한 것이고 정권퇴진을 말하면 ‘정치적’이라 하지만, 전자의 표현으로부터, 쇠고기문제를 벗어난 모든 이슈를 다루거나 ‘정치적’이라 칭해지는 것은 모두 ‘불순하고 선하지 못한 어떤 것’이 되어버리고 곧이어 정치의제 밖으로 밀려나야 하는 것들이 된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 공동체 안에 속한 구성원들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논해야 한다면 논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 안에서 찬반을, 서로 다른 대안을 말할 수는 있으나, 누구에게도 의제 자체를 제한할 권한을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기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권리인 이유다. 감성의 언어로 정치의제를 제한하는 이미지 조작은 그 사회의 민주주의를 협소하게 만들고 불구가 되게 한다. 왜, 어떤 근거로 정치의제가 되어야 하는지 혹은 아닌지에 대해 설득하지 않은 채 이미지 조작으로 일관하는 정치적으로 게으른 사회에서, 합의된 기준이 마련되고 협상된 해결의 대안이 만들어지기는 힘들다.    

의도와 동기를 재단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치의 언어가 아니다. 어떤 의도와 동기를 가졌건 행위의 선택이 있고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분명하고 합의된 기준에 따라 적용되어야 한다.
27일 경찰은 ‘촛불집회에서 청와대 진출과 정권퇴진 운동 등을 선동’했다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을 들어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연합뉴스, 6/27일자). 집시법 제5조에 따르면 금지된 시위 혹은 선동은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해산된 정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거나 ‘집단적인 폭행, 협박, 손괴, 방화 등으로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끼칠 것이 명백한’ 것이어야 한다. 경찰의 말을 그대로 믿더라도 시위대에게 청와대 방향으로 가자고 한 것과 정권퇴진 슬로건을 외쳤다는 것이,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 위협을 끼칠 것이 ‘명백’한 행위라는 것을 경찰과 검찰은 어떻게 증명하고 시민들을 설득해낼까?

민주주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부와 정당, 정치인이 사용하는 언어가 정치(精緻)해야 하며 찬성을 하는 입장이던 반대를 하는 입장이던 납득이 가능한 논리와 명분을 갖추어야 한다. 상징조작으로 정치의제를 제한하고 그 사회의 정치언어를 합의가 불가능한 사적 감성의 언어로 채우는 것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다.  

서복경(정치학박사,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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