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칼럼(aw) 2004-03-24   745

[기고] 한 헌법기관의 유례없는 공식문서

노대통령이 2월 24일 방송기자클럽에서 열린우리당을 지지한 발언에 대해, 선관위가 대통령에게 보낸 공문에서는 선거법 위반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민주당에 보낸 공문에서는 선거법 위반이라고 회신하였다. 한 기관, 그것도 헌법기관에서 보낸 공식문서가 서로 다른, 아니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선관위 관계자는 기자회견을 통해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을 이미 밝혔고, 공문은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고 변명하였다.(인터넷한겨레 3월 15일) 갑자기 선관위원을 임명할 때 국어시험부터 보자고 하고 싶다.

근대 관료제는 문서로 움직인다. 그래서 공무는 문서로 시작하여 문서로 끝난다는 말이 생겼다. 문서는 행정 행위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법적 증거 능력을 갖는 것은 기자회견이 아니라 바로 두 상반된 내용의 공문인 것이다. 마치 판사가 피고에게 ‘죄가 있지만 또 죄가 없다’고 평결한 것과 같다.

적어도 역사학과 기록학이라는 내 전문분야와 관련하여 이런 이중 공문서를 어떻게 처리해야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벌어진 적은 없다. 하긴 어느 누가 같은 기관에서 같은 시기에 정반대의 내용이 담긴 공문서를 보낼 수 있으리라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첩보전도 아니고 말이다.

둘 다 선관위의 공식문서이니 원본의 효력이 있다. 그렇다면 내용의 신뢰성은? 둘 중 하나는 없다. 아니 둘 다 없을지 모른다. 그럼 뭐라는 거냐? 문서(사료)를 확정해야 사실을 이해하고 역사를 이해할 것 아닌가? 아마 내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연구논문이 나올 듯하다. 선관위가 사료비판론의 발달에 기여했다고 해야 하나? 내 고민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당장 학생들과 대통령에게 보낸 선관위 공문을 자료로 사료비판 연습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관위라는 헌법기관의 우두머리인 유지담 위원장은 이 사안에 대해 아직까지 아무런 사과나 수습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선관위가 한국 정부조직과 사회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데 있다고 본다. 대통령에 대한 예우 운운 하는 것도 그렇다. 선관위가 말하는 예우가 결국 기만이었다는 것은 차치하고, 나는 그 예우에서 눈치를 읽는다. 노대통령의 국정운영원칙은 권한을 가진 조직이 그에 합당한 책임과 자율성을 가지고 맡은 일을 해나가는 것이라고 들었다. 이는 노대통령의 국정방향 이전에 한국사회가 그런 발전과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이자 한 시민으로써 생각하기에 선관위가 지금 할 일은 이렇다. 우선, 대통령과 민주당에 공문을 다시 보내라. 같은 내용으로. ‘세계적으로 드문 독립 위원회 헌법기관’인 선관위가 ‘세계적으로 드문 이중 공문서’를 후대에 남겨서야 되겠는가? 그러면 나도 강의하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앞의 두 공문은 실수라고 하면 되니까. 둘째, 감사원 감사든 자체 감사를 통해 경위를 밝히고 유지담 선관위원장을 비롯한 선관위원들은 사과하고 잘못을 빌어라. 대가는 적법한 절차를 따라 치르면 된다. 마지막으로, 선관위원들에게 건의하고 싶다. 21세기 한국 민주주의와 선관위의 역할 등을 주제로, 좋은 책도 읽고 세미나나 심포지엄도 하라. 그러면서 사회의 변화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바란다. 헌법기관은 기강이 있어야 한다. 그런 노력이 있을 때, 국민들은 헌법기관에 합당한 위엄을 부여할 것이다.

오항녕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기록연구원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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