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칼럼(aw) 2003-10-06   1074

<안수찬의 여의도 파일> 어느 기자의 고해성사

오랜만입니다. 사이버 참여연대를 통해 다시 인사드리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여의도 정가의 속살을 많이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정치판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오늘은 `맛뵈기’로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주절거리게 됐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할머니는 눈초리부터 치켜올렸다.“글쎄 싫다니까.” “잠깐만 보여주세요.”

벌써 20분째 이 사람, 저 사람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서류봉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안에 뭐가 들었냐고? 바야흐로 그것이 문제였다. 5년전 겨울 어느날, 나는 그걸 알아내야만 했다……

갓 신문사에 입사한 97년 겨울, 나는 사회부 기동취재팀에서 이른바 수습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군대 신병훈련과 비슷하다. 그만큼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채, 영영 떨쳐낼 수 없을 것 같은 시간. 만지면 아픈데 자꾸만 만져지게 되는 생채기 같은 거다.

두렵지 않으니 덤벼봐.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줘봐. 어느 광고카피처럼 굳게 결심했던 초년 기자는 그러나 쉽게 움츠러 들었다. 춥고 배고프고 서럽고 무서웠다. 하루 두세 시간의 새우잠, 추상벽력같은 선배들의 호통, 담배 피울 짬도 없이 몰아치는 일정.

그러나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건 초라함이었다. 세상은 예상보다 거대했고, 나는 기대보다 나약했다. 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내가 가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수습생활이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싸움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날, 뭔가를 보여줄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 후보가 시내 호텔의 노인모임에 참석해 불법사전선거운동을 펼친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수습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게 이 바닥의 불문율이었으므로, 그 현장을 확인하는 건 `사람구실'하는 선배기자의 몫이었다.

선배는 모처럼 넥타이에 정장까지 했다. 녹음기를 안주머니에 넣고 마이크 선을 뽑아 와이셔츠 소매 밖으로 슬며시 뽑아냈다.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카메라는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내 일은 그저 `완전무장한' 선배의 손과 발이 되는 것이었지만, 지레 오금부터 저렸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배의 녹음기가 돌아갔다. 당원모임이 아니었으므로 선거관련 발언을 한다면 바로 기사를 쓸 것이다. 그러나 노회한 정치인은 그 경계를 지켰다. 그의 격려사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식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선배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예상했던 대어를 건지지 못한 거다.

이럴 때를 조심해야 한다. 불똥은 제 구실 못하는 수습에게 튀기 마련이다. “야, 저게 뭐지? 저거 받아와 봐.” 선배의 손 끝에 한 줄로 늘어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있었다. 어깨넓고 목짧은 사람들이 노인들에게 뭔가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 때였다. 그들의 손에 매달린 노란 서류봉투가 대문짝만한 크기로 두 눈에 왈칵 쏟아진 것은.

우선 돈이 들어 있을 것이다. 참석자가 500명쯤 되고, 노인들이 대부분이니까 밥값이나 하라고 한 만원씩 넣었겠지. 그래도 500만원이나 되잖아. 그런데 왜 편지봉투가 아니고 서류봉투지? 혹시 당보? 선거홍보물? 선관위 허락없이 저렇게 나눠주는 것도 불법이지.

저 동네깡패들이 여기서 뭘 하고 있겠어. 앞에선 점잔빼고 뒤에선 선거홍보물에 돈까지 뿌리는 대통령 후보. 이거 바로 기사된다. 수습 한 달만에 드디어 한 건 하는구나. 다시 오금이 찌릿찌릿하게 울렸다. 내가 기자로서 그리 무능하지 않음을 증명할 절호의 기회였다.

“당신 뭐야?”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어깨'는 서류봉투 대신 반말부터 건넸다. “예?” “당신 뭐냐고.” 줄지어 기다리는 건 온통 할아버지, 할머니들뿐이었다. 당연히 젊은 나는 그 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할아버지 대신 왔어요. 몸이 아프셔서. 오늘 꼭 가야 된다고, 저라도 가라고 그러셨어요. 이거 그냥 나눠주는 거 아닌가요?” 어깨의 시선이 내 위아래를 훑었다. “이건 회원들만 받아가는 겁니다. 나중에 직접 와서 받아가라고 하세요.”

`어깨’의 말투는 바뀌었지만 대화는 끝나 버렸다. 나는 이미 줄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한번 더 부딪혀볼까 생각하다 그만뒀다. 괜히 소란피울 필요가 없었다.

대신 호텔을 빠져나가는 노인들을 하나씩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낯선 청년에게 그걸 선뜻 건네줄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매달린 건 마음씨 좋아 보이는 어느 할머니였다. 다 털어놓았다. “사실은 저 기자인데요, 그거 좀 보여주시면 안될까요. 여기서 보고 바로 돌려 드릴께요.”

할머니는 황당하다는 표정만 지었다. 돌아서는 걸음이 호텔 앞 지하철역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저 할머니마저 계단을 내려서면 서류봉투를 구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너 이 자식, 무슨 변명이 필요해. 바쁘다고 마감 못 지키고 능력 없어서 취재 못하면, 그게 기자야? 그럴려고 여기 들어왔어?” 선배의 호통이 귀에 쟁쟁 울렸다.

그게 내 의지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차라리 생존본능에 가까웠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이 순간에 주어진 일을 끝내야 했다.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걸렸다. 할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도둑이야, 아니면 저 사람잡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돌아서는 순간, 내 앞에는 도심의 거대한 인파가 넘실대고 있었다. 뛰었다. 누군가가 소매라도 나꿔채면 끝장이었다. 새카맣게 몰려다니는 그 사람들 속을 무사히 헤쳐나갈 성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가 홍해를 갈라놓듯, 사람들은 길가로 쫙 물러섰다. 시민정신의 실종이 그토록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아무도 나를 어찌해 볼 생각을 못했다. 그 와중에도 머리를 쓴답시고 호텔 안으로 뛰어들었다. 화장실을 찾아 문을 걸어 잠그고 앉았다. 할머니의 가방에서 뽑아낸 서류봉투 위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뭘 한거지. 이게 세상의 위선을 끝장내겠다던 놈이 할 짓이냐.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흐느낌도 아닌 매마른 눈물 몇 방울.

날 찾아 헤매던 선배는 자초지종을 듣고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야, 그렇다고….” 그러나 선배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신문사로 날 데려갔다.

고개숙인 나를 뒤로 하고 선배는 팀장에게 한참동안 보고했다. 수습기자에게 팀장은 하늘보다 더 높았다. 팀장이 뚜벅뚜벅 내게로 왔다. 서류봉투는 뜯어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긴장했다. 아직 정신이 혼미했지만 내심 사표 쓰라면 쓰겠다고 결심했다.

br> “고생했다.” 그러나 팀장은 뜻밖에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입사이후 처음으로 듣는 칭찬이었다. 그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왠지 또 서러워지는 걸 참느라 애썼다.

그 날 저녁, 선배들과 엄청 술 마셨다. 절망의 그늘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바쁜 수습생활에 내몰렸고, 순간순간이 모두 번민인 날들이 이어졌다. 하나의 고민을 계속 붙잡고 있을 여유가 내겐 없었다.

그러나 폭풍같던 수습생활이 끝난 뒤,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화두는 그 날의 것이다. 다시 그런 상황이 돌아온다면? 아마도 나는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다.

겸손과 설득이 가장 중요한 취재덕목임을 이제 확신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취재방식이 취재결과를 규정한다고 보는 게 옳다. 정론을 펼치기 위해서라면 취재과정에서부터 정도를 걸어야 한다.

그럼에도 남는 질문이 있다. 국민의 중대한 알권리를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할 무엇인가가 있고, 그걸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소유자의 동의없이 훔치는 것이라면?

그런 순간이 영원히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래야만 한다면 나는 다시 손을 뻗을 것이다. 그걸 기사로 쓰고, 대신 모든 취재과정을 공개하고 절도행위에 대한 법의 처벌을 받을 것이다. 반드시 폭로돼야 할 정치부패를 밝히기 위해서라면, 나는 부패한 정치인의 집에 몰래 들어가 그의 비밀 뇌물장부를 훔쳐올 용의가 있다. 영어표현을 빌리면 `댓츠 마이잡'이다. 그러나 행위의 죄값은 온전히 내 몫이다. 임의적으로 판단한 `국민의 알권리’라는 가치가 모든 취재행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다. 그날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없이 되짚으며 수많은 `만약’과 `혹시’를 되뇌였다. 그렇게 굳건한 원칙을 세워놓지 않는다면 또다시 어떤 상황에서 내 자신이 힘없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참 불안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건, 그 할머니다. 그 날의 서류봉투는 기사화되지 못했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지도 아직 모른다. 이제 서로 농담 따먹는 `동료기자'가 된 선배와 팀장에게 새삼스레 그걸 물어볼 생각도 없다.

`한계상황' 너머에서 나름의 새로운 경지를 발견했지만, 그 날의 내 판단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나는 `알권리'를 위한다며 횡포를 부렸다. 제대로 된 기자 하나 만드느라 온 몸으로 `보시'한 그 할머니에게 나는 그저 속죄의 마음 뿐이다.

가끔은 취재현장을 다니다 할머니와 마주쳐 지팡이에 흠씬 두들겨 맞는 꿈을 꾼다. 내겐 그 꿈이 악몽이 아니라 길몽이다. 그 두려움을 잊지 않는 한, 최악의 기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거리에는 그 날 오후처럼 인파로 가득하다. 다들 어설픈 기자놈들 때려잡으려고 지팡이 하나씩 들고 있다…

안수찬 『한겨레』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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