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칼럼(aw) 2003-07-14   850

<안수찬의 여의도 파일> 휴대폰 공화국

왼쪽 바지 주머니 쪽에 ‘떨림’이 온다. 혹시나 해서 손을 갖다 대보면, 역시나 놈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직업병이다.

휴대폰을 가진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에게도 이 ‘21세기형 정조대’와 관련한 몇가지 노이로제가 있다. 인터뷰 도중 벨소리가 울리는 것을 막기 위해 항상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두는 나는 그 ‘떨림’을 놓칠까봐 24시간 내내 잠재된 공포에 시달린다. 각종 전자음에 대한 예민한 반응도 병적이다. 텔레비젼이나 라디오는 물론 지하철, 버스 등의 안내 방송에 끼여드는 전자음을 들을 때마다 화들짝 놀란다. 분명히 진동으로 해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꺼내서 휴대폰을 확인해 본다.

그 때마다 이 징글징글한 놈을 바지춤에 집어넣으며 반드시 하는 생각이 있다. “사표쓰는 날이면 이 놈의 휴대폰을 국장(또는 사장) 앞에 내동댕이치고, 구두 뒷축으로 잘근잘근 뽀갠 뒤에, 사직서를 턱 던지고, 안면근육의 힘을 모아 강력하게 째려본 뒤, 어깨 펴고 사무실을 가로질러 나와, 절에 들어가 버려야지.”

기자들에게 특히 현장에서 뛰어다니는 경찰, 검찰, 정당 출입 기자들에게 데스크가 걸어온 전화를 ‘씹는’것은 용서될 일이 아니다. 휴대폰은 나와 신문사 조직을 잇는 탯줄인 동시에 족쇄다. 그 조그만 기계 안에서 말단 기자들이 일용할 ‘취재 방향과 지면 계획과 욕지거리와 핀잔과 일상의 통제’가 쏟아져 나온다.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 아마도 기자라는 직업은 해볼만한 일이었을 게다.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지난달 내 핸드폰 사용료는 11만5천원이 나왔다. 쥐꼬리만한 월급의 ‘상당액’이다.(한겨레신문 기자의 월급은 특급비밀이다. 아직 고향의 부모님도 내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신다) 기자실에 일반 전화가 있긴 하지만, 그 전화를 쓰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의 눈과 귀가 열려 있는데, 드러내놓고 ‘은밀한’ 취재대화를 들려주는 바보는 없다.

휴대폰에 대한 스트레스는 정치인들도 이에 못지 않다. ‘잘 나가는’ 국회의원의 경우, 보통 2~3개씩의 휴대폰을 갖고 다닌다. 하나는 대언론용, 하나는 가족용, 하나는 당무용 식이다.

몇번 당선됐느냐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초·재선 의원들의 경우, 국회의원 수첩에 공개된 휴대폰을 본인이 직접 휴대하는 경우가 많다. 주로 고위 당직자들의 전화를 받아야 할 일이 많아서다. 반면 고위급으로 올라갈 수록 휴대폰을 비서에게 맡겨두게 된다. 어떤 비서는 자기 휴대폰 하나, 의원의 휴대폰 두세개 등을 한꺼번에 갖고 다니기도 한다.

지난해 대선 내내, 이회창 대선 후보의 수행비서는 2개의 휴대폰을 들고 다녔다. 그 가운데 하나는 언론인들에게도 공개된 전화번호였지만, 나머지 하나의 번호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자신의 휴대폰에 이런 ‘등급’을 매기는 이유는 전화를 ‘걸러받기’ 위해서다. 그 중에 가장 귀찮은 것은 당연히 기자들의 전화다. 새벽 5시부터 취재를 시작하는 석간신문의 등쌀이 끝나면, 오전 10시부터 각 조간 신문의 빗발치는 전화가 이어지고, 조간신문의 마감이 끝나는 오후 4시께부터는 저녁 뉴스를 준비하는 방송 기자들의 확인 전화가 시작된다. 저녁을 먹고 돌아서면 각 신문의 가판 보도를 확인한 각 언론들이 다시 전화를 돌려댄다.

‘전화취재’만 하고 현장 취재는 안한다는 오해를 살까봐 미리 말해두자면, 기자들도 국회의원 정도의 정치인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듣기를 강력히 원하지만, ‘그들의 사정상’ 그게 불가능한 경우가 태반이다. 여야간 대북송금 특검 협상을 취재하는 와중에, 최병렬 대표의 의중을 파악하고, 국회 재경위에서 논의중인 특소세 인하 폭을 확인한 뒤, 정대철 대표의 자금수수 의혹에 대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반응을 모아야 하는 ‘멀티태스킹’의 메카니즘이 이런 처지를 더욱 부추기기도 한다.

여튼 이런 식의 휴대폰 공해를 피해 최근 한나라당을 탈당한 개혁파 의원들과 그 보좌관들은 탈당 직전 일주일 동안 휴대폰 접촉을 완전히 차단해 버려, 한동안 기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탈당을 결행한 직후, 그 사정을 물어보니 의원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고심중이라고 말하면 바로 ‘탈당 초읽기’라고 쓰니까,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라고. 그런 기사 나가면 지구당에서 난리가 나는데. 아예 한동안 언론에 안나는게 탈당에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한거지. 미안해.”

휴대폰 스트레스를 말하면서 빼놓지 말아야 할 사람은 정형근 의원이다. 그는 휴대폰 번호를 두어달에 한번씩 바꾼다. 그와 휴대폰으로 접촉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기껏 번호를 알아냈다 해도, 이미 다른 사람이 쓰고 있기 십상이다.

번호를 바꾸는 이유는? 도청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24시간 감시당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한국 정보기관의 기술력이 오래 전에 휴대폰 도청까지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믿는 정치인이다. 하긴 그의 대언론 접촉방식을 보면 휴대폰으로 기자들과 통화하지 않는 게 당연해 보인다.

의원총회나 국정감사장, 국회 본회의 등에서 한마디 내지르고 나면,(“김정일 밀사가 내려왔다” “국정원이 도청을 하고 있다”등) 절대 입을 다시 열지 않는다. 기자들의 이어지는 질문에도 “더이상 말할 내용이 없다”며 입을 다문다. 그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은 없다. 일종의 ‘베일효과’를 노리는 셈인데, 지금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는 듯 하다.

반면 전화통화에 관대한 정치인들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한 기자가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노 대통령이 이를 직접 받았고, 기대치도 않았던 ‘천우신조’의 기회를 맞아 이것저것 다 물어봤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화들짝 놀란 참모들의 강력한 요청때문에, 허심탄회한 통화에 익숙했던 노 대통령도 그 뒤로는 기자 개인과 직접 통화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도 그런 면에서 너그러운 편이다. 그는 대표 경선 시절에도, 다른 후보들과 달리 자신의 휴대폰을 ‘직접’ 받았고, 최근에도 이런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빗발치는 휴대폰을 서슴없이 받는 정치인은 두가지 종류다. 특별히 숨기고 도망다녀야할 구린 구석이 없거나, 태생적으로 언론노출을 즐기는 경우다.

민주당 대선자금 사태와 관련해, 정대철 민주당 대표가 지난 주말 내내 휴대폰을 끄고 일체의 대언론 접촉을 막았다고 한다. 그의 호탕한 성격에 비춰 언론노출을 처음부터 꺼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조차도 어찌 해볼 수 없는 사태의 확산 앞에서, 정 대표는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2,3일간 언론의 질문공세를 피했으니 그의 마음이 정리됐기를 바란다. 의도했건 아니건, 그는 노무현 정권과 신당 창당 등 정국의 핵심고리에 대한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건 그냥 휴대폰을 구두 뒤축으로 밟아 짓이겨 버리는 것만으로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그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안수찬 『한겨레』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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