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칼럼(aw) 2012-05-15   4123

[칼럼] ‘의안 신속처리 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무기명 뒤에 숨은 의원들의 비겁함
[시민정치시평] ‘의안 신속처리 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

 

19대 국회 개원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18대 국회 막바지에 이르러 이른바 ‘국회 선진화법’으로 명명된 「국회법」개정안이 2012년 5월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개정안을 지지한 18대 국회의원들은, 국회의장 직권상정 요건 제한과 본회의 무제한토론제도(일명 필리버스터 제도) 도입이 ‘국회 선진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임시회, 정기회가 거의 매달 열리는 상황에서, 회기가 종료되면 해당 안건에 대한 토론은 종결되고, 다음 회기 첫 번째 안건으로 상정되어 표결되는 ‘1회성’ 본회의 무제한토론이 ‘국회 선진화’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금번 개정 「국회법」에서 국회운영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조항은 따로 있다. 이른바 ‘의안 자동상정’ 제도와 ‘의안 신속처리’ 절차의 도입이다. 국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 제도는, 의안의 부실심의를 촉진하여 질 낮은 법률을 양산할 가능성을 높이고, 정책의안의 처리과정에 ‘무기명 표결’방식을 도입함으로써 무책임한 의안심의와 처리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었다. 또한 개정 「국회법」은 헌법에 규정된 ‘과반’의 의사-의결정족수 규정과, 정책의안에 관한 공개·기록표결이라는「국회법」원리를 위반하면서, ‘무기명 표결 3/5정족수’ 규정을 도입하여 국회 의사일정 및 의안처리 원칙을 혼란시켰다.

 

이런 결과는 의회제도에 대한 접근에서, ‘의안심의의 질’보다 ‘의안처리의 양’을 더 중시하는 오래된 한 경향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국민의 복리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건대, ‘상정조차 되지 못한 채 폐기’되는 여러 건의 의안보다 날림으로 처리된 1건의 의안이 더 해악적일 수 있다. 잘못 도입된 제도나 정책을 바로 잡는 일은, 제도를 새로 도입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제도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며, 당장에는 최소한 ‘의안 신속처리’ 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국회법」개정 전, 국회 의안처리 절차

 

국회법 개정 전, 국회 의안처리 절차

 

 

개정 이전 「국회법」은, 의안제출(정부) 혹은 의안발의(의원) 이후 상임위-법사위-본회의 각 단계에서 회부-상정-심의-의결 절차를 거치는데 <그림 1>과 같은 제도를 가졌다. 기본적으로 상임위-법사위-본회의에 의안이 회부된 후 상정단계에서는 위원장 및 의장이 교섭단체(간사 및 대표)와 협의하여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의안 회부 이후 위원들의 숙지를 위해 상임위 단계에서 제정 및 전부개정 법률안의 경우 상정유예 기간을 20일, 부분개정 법률안의 경우 15일을 두었으며 법사위 심의 단계에서는 5일의 상정유예를, 본회의에서는 1일의 상정유예기간을 두었다. 기존 제도에서는, 의안이 상임위에 자동 회부된 이후 본회의 최종 표결에 이르기까지 기한을 명시적으로 제한하는 조항은 없었으며, 기본적으로 상임위-법사위 위원들의 결정에 맡겨졌다. 다만, 국회의장의 ‘심사기일 지정제도(직권상정제도)’에 의해서만이 심사기한을 제한할 수 있었다.

 

 

‘의안 신속처리 제도’의 내용 

의안 신속처리 제도의 내용

 

 

개정 「국회법」은 안건처리의 기본절차와는 별도로, ‘안건 신속처리’ 절차를 도입하였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임위에 회부된 의안에 대해 위원회 재적의원 과반수 혹은 전체 국회의원 재적의원 과반수가 서명한 ‘신속처리안건지정동의’가 위원장 및 의장에게 접수되면, 위원장 및 의장은 이를 위원회 및 본회의의 ‘무기명 표결, 재적의원 3/5(위원회나 본회의)’ 요건으로 ‘신속처리대상안건’을 지정한다. 둘째, ‘신속처리대상안건’이 상임위에서 180일 이내에 처리되지 않으면 상임위를 통과, 법사위에 자동회부된 것으로 간주한다. 셋째, 법사위에 회부된 이후 90일 이내에 처리되지 않으면 법사위 통과, 본회의에 자동 회부된 것으로 간주한다. 넷째, 본회의에 회부된 후 60일 이내에 상정되지 않으면 60일이 경과한 후 첫 본회의에 자동 상정한다.

 

개정 「국회법」의 ‘안건 신속처리 제도’에 따르면, 상임위 회부 단계에서 ‘신속처리대상안건’으로 지정되기만 하면 최대 330일(180일+90일+60일) 후에는 자동적으로 본회의에 상정될 수 있다. 우리 국회는 위원회 중심제로 운영되며, 의안의 심의는 위원회에서 이루어지고 본회의에서는 위원회 심의를 전제로 하여 표결을 통한 결정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신속처리대상안건’으로 지정되면, 위원회 심의가 이루어지든 그렇지 못하든 330일 후에는 본회의 표결 절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의안 신속처리 제도’의 문제 1: 현실과 괴리된 제도만능주의

 

 

개정 「국회법」에 따라 ‘신속처리 대상안건’은 어떤 안건들이 될 수 있을까? 우선, 상임위 회부단계에서부터 걸러낼 수 있는 ‘중요하지 않은 의안’들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만약 그 의안이 위원회 ‘심의’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지 않은’ 의안이라면, 굳이 ‘위원회 재적위원 3/5이나 본회의 재적위원 3/5의 무기명 표결’이라는 복잡한 절차를 거칠 필요 없이, 과거처럼 ‘회부→상정’단계에서 걸러내면 된다. 굳이 상임위 자동 상정→법사위 자동 상정→본회의 자동 상정을 거쳐 표결 단계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약 ‘신속처리 대상안건’이 ‘중요하지 않은 의안’이 아니라 ‘갈등적이지 않은 의안’을 대상으로 한다면, 위원회는 이 안건을 충분히 ‘심의’해야만 한다. 특히 일부 개정 법률안의 경우, 법률의 개별 조항의 수정을 요구하게 되는데 개별 법 조항의 수정은 다른 조항이나 다른 법률과의 관계에서 전혀 다른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으므로, ‘갈등적이지 않은 법안’이라고 하더라도 연관 법률 및 조항과의 관계는 충분히 심의되어야만 한다. 만약 ‘갈등적이지 않은 의안’이 그 대상이라면, 굳이 ‘신속처리 대상법안’으로 지정하여 심의기한을 제한하지 않아도 위원회 내에서 ‘갈등적인 의안’과 분리하여 상임위→법사위→본회의에 부의하면 된다. 현재에도 위원회가 의안을 처리하는데 ‘접수시간 순서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등의 특별한 규정은 없으므로, 운영의 묘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은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또, 만약 ‘신속처리 대상안건’의 법적 심의 시한인 상임위 180일, 법사위 90일이 ‘그 어떤 의안의 심의’에도 충분한 시간이라고 판단했다면, 멀리 갈 것 없이 18대 국회의 현실을 다시 되돌아 보라. 18대 국회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5월 초 시점, 국회는 접수의안 14,761건 가운데 56%인 8,273건 밖에 처리를 못했다. 대부분 임기만료 폐기로 남겨지게 될 6,488건이 과연 ‘신속처리 절차’가 없어서 남겨졌는가?

 

 

‘의안 신속처리 제도’의 문제 2: 비현실적인 심의기간 제한

 

 

‘의안신속처리’ 절차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현재 국회 일정을 고려할 때 현실성이 없거나 부실심의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만약 ‘예산안과 예산부수법안’에 집중하도록 되어 있는 9월 정기회 직전에 제출된 법안이 ‘신속처리 대상법안’으로 지정되었다면, 이 법안은 ‘신속처리 대상안건’의 상임위 처리시한인 180일을 고려할 때 다음 해 2월 임시회에서 상임위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곧바로 법사위에 자동 회부되어야만 한다. 6월 임시회에서 제출된 법안도 마찬가지다. 6월 임시회에서 일사천리로 상임위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9월 정기회 기한을 넘겨 곧바로 법사위로 자동 회부되어야 한다. 우리 국회는 8월 결산심의에서 시작해서 9월 국정감사, 10월∼12월 예산심의 일정이 있으므로, 8월∼12월 국회일정을 고려하면 앞뒤로 상임위 180일, 법사위 90일 심의기한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안건 신속처리’ 절차는 부실심의를 피하기 위해 아예 활용되지 못하거나, 활용된다면 안건의 부실심의를 촉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민의 복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의안들의 부실 심의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의안 신속처리 제도’의 문제 3: 왜 무기명인가?

 

 

개정 「국회법」은 ‘의안 자동 상정’과 ‘의안 신속처리’ 과정의 곳곳에 ‘무기명 표결방식’을 도입하고 있는데, 이는 정책표결에 관한 한 공개·기록 표결로 처리하도록 한 「국회법」의 원리에 어긋난다. 개정 「국회법」의 입법자들은 이 제도들이 의안의 의결이 아니라 의사일정의 결정에 ‘무기명 표결방식’을 도입했으므로 「국회법」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할지 모

르겠다.

 

하지만, 정책의안의 처리과정에서 참여의원들의 입장을 공개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내가 뽑은 대표가 행한 대표행위에 대해 유권자들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함이며, 선출된 대표의 정치적 책임에 관계된 것이다. 따라서, 위원회 및 본회의에서 의안의 결정과정뿐 아니라 의안의 심의절차를 결정하는 과정의 정보 역시 당연히 유권자들에게 공개되어야 한다.

 

만약, 어떤 위원회에서 무기명 표결로 ‘신속처리 대상안건’을 지정한 다음, 위원회 의안심의 기한을 넘겨 자동으로 본회의 표결이 이루어졌는데, 그 결정으로 피해를 보는 유권자들이 있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본회의에서 찬성과 반대를 한 의원뿐 아니라, 위원회 부실심의가 이루어지도록 최초에 결정한 위원들 역시 책임이 있으며 유권자는 그에 관한 정보를 당연히 알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신속처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위원들은 그만한 근거를 가지고 판단을 내렸을 터, 왜 그 결정을 ‘무기명 표결’로 처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개정 「국회법」을 통과시킨 18대 국회는, ‘신속처리 대상안건’지정이 왜 ‘무기명 표결’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지, ‘의안 자동 상정’의 과정에서 왜 본회의 부의를 위해 ‘무기명 표결’방식이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관해 설명해야 한다. 「국회법」의 원리를 훼손하지 않는 납득할만한 설명을 제공할 수 없다면, 이 조항은 폐지되어야 한다.

 

 

 

※이 글은 5월 15일 프레시안 ‘시민정치시평’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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