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칼럼(aw) 2003-06-23   1036

<안수찬의 여의도 파일> “정치판이 원래 그런 거야?”

한나라당 대표경선 유감

안수찬 『한겨레』 정치부 기자 ahn@hani.co.kr

사이버참여연대는 오늘부터 매일 ‘요일별 칼럼’을 신설합니다. 매주 월요일에는 안수찬 『한겨레』 정치부 기자가 여의도 파일을 공개합니다. 현재 국회를 출입하고 있는 안수찬 기자는 언론계에서 필력 좋기로 소문난 ‘명칼럼니스트’입니다.

한나라당 대표 경선이 한창이다. 26일이면 그 주인공이 결정된다.

한나라당은 상부구조를 장악했으면서도 시민사회로부터 왕따 당하는 권력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원내 의석 최대 정당의 대표 경선이 이렇게 여론의 외면을 받을 리 없다(물론 노무현정부에 대해서는 그 반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여튼 그 뉴스거리도 안 되는 대표 경선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자꾸만 머리가 복잡해지는 걸 어쩔 수 없다. 한나라당을 제법 안다고 생각했던 판단도 요즘 흔들리고 있다. “정치판이 원래부터 그런 거야”라고 코웃음 쳐주고 넘기면 그만이겠지만, 또 그래서는 안 되는 게 정치부 기자의 숙명이다. 공포영화를 증오하면서도, 리뷰기사를 위해 그걸 뚫어져라 봐야 하는 문화부 기자의 고통에 비유할 수 있을까? (어느 쪽이건 배부른 엄살인 건 마찬가지라 한다면 뭐 할말은 없다)

정치인은 명분과 레떼르로 먹고산다. “그동안 ( )했던 저는 오늘 ( )를 위해 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빈 괄호의 자리에 뭔가 채워 넣을 내용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다. 앞의 것은 레떼르고, 뒤의 것이 명분이다.

김원웅 의원이 지난해 한나라당을 탈당할 때, 그는 “한나라당이라는 보수 정당의 개혁이 한국 정치의 발전이라 믿었던 저는 오늘, 이 당의 한계를 절감하고 진정한 ‘3김 정치 극복’을 위해 개혁정당에 합류한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에 있던 시절, 그를 따라다닌 레떼르 가운데 하나는 공화당 공채 직원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면서도 정통 개혁세력을 자임하는 모순논리의 회색주의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탈당과 함께 이 레떼르는 오랫동안 잊혀지게 됐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정치개혁에 앞장선 정치인이라는 레떼르를 얻었다.

그러니 명분과 레떼르의 조합을 잘 꾸며내면 정치담론을 장악하고 정치인생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물론 이게 쉬운 일이 아닌 탓에 왕왕 철새도 태어나고 경선 불복도 하다가, 끝내 정치판에서 밀려나기도 한다.

그놈이 그놈?

서두가 길었다. 한나라당 대표 후보 6명이 그동안 달았던 레떼르와 현재 주창하고 있는 명분은 일종의 ‘불협화음’의 전형이다. 그래도 그 조합을 독해해야 하니, 곤욕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나 또한, 민주계(또는 통일민주당)보다는 민정계(또는 민정당)가 군사독재의 잔재와 더 가깝다고 생각했었다. 그걸 계측화 할 수는 없으니, 누군가 민주계나 민정계나 그놈이 그놈이라고 정색을 하고 달려들면 나로서도 반박할 도리는 없다.

그러나 군사정부 시절, 공보처·노동부 장관을 거치며 ‘강성 우익’의 대표주자로 꼽혔던 최병렬 의원이 한나라당 쇄신의 적임자로 평가되는 상황에서 나는 다소 현기증을 느낀다. 이 불협화음을 인내하고 이해하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과 품이 들었다.

간단히 일별하면 이렇다. 최병렬=민정계. 비주류. 영남출신의 수도권 의원 / 강재섭=민정계, 비주류. 대구·경북의 대표주자 / 서청원=민주계. 주류. 충청출신의 수도권 의원 / 김덕룡=민주계. 비주류. 호남 출신의 수도권 의원 / 이재오=계보 없음. 신주류. 영남출신의 수도권 의원 / 김형오= 계보 없음. 비주류. 부산 지역 의원

당 대표 경선에서 집중적인 화살을 받고 있는 서청원 의원은 현재 구시대의 전형으로 이해되고 있다. 딱 한가지 이유인데, 지난해 대선에서 ‘네거티브 선거’와 ‘의원 영입을 통한 조직 선거’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칭 6·3 세대로 중앙대 총학생회장 시절 감옥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97년 대선 때는 민주계를 대표해 이회창 후보를 반대하는 대표적 비주류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불과 5년 만에 대표적인 구시대 정치인으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이재오 의원도 흥미로운 경우다. 민중당 출신인 그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원내총무 등을 역임하며 당당히 한나라당 주류에 성공적으로 편입했다. 지난해 대선 때는 정형근·홍준표·김문수 의원 등과 함께 일종의 태스크포스인 이른바 ‘나바론팀’을 구성해 대 노무현 공세에 앞장섰다. 16대 국회에서 끊이지 않았던 ‘폭로정치’의 전형인 그는 이번 경선에서는 민주화 세대의 대표주자로서 낡은 정치를 끝장낼 세대 교체론자로 등장했다.

세대교체로 치자면 강재섭 의원을 빼놓을 수 없다. 한때 ‘이회창 시대의 황태자’로 불리던 그는 민정계 및 대구·경북 지역의 맹주라는 ‘옛 레떼르’를 모두 떨쳐내고, 실용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제2 창당’을 주장하고 있다. 적어도 이번 경선구도에서 그는 꼴통보수의 상징으로 통하지는 않는다.

김덕룡 의원도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는 마찬가지다. 대표적 6·3 세대로서 민주계의 좌장이자 당내 개혁세력의 수장으로 꼽혔던 그는, 가장 보수지향적인 최 의원과 ‘돈독한 관계’를 과시하고 있다. 이른바 ‘반 서청원 연대’의 중요한 축인 김 의원에 대해서는 “일단 당권을 최 의원이 갖고, 1년 뒤 전당대회에서 대권 도전을 놓고 다시 한번 진검 승부를 겨루기로 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기본적으로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은 이른바 ‘이회창 시대’의 잔재 때문이다. 이 전 총재는 97년 대선 패배 이후, 기존의 계보 구도를 흔들면서 ‘친위부대’ 구축에 전력을 기울였다. 민정계 가운데 김윤환을 쳐내고 하순봉을 껴안은 것이 대표적이다. 상대를 분열시키는 이런 전략은 민주계의 서청원을 대표로 앉힌 대신, 민주계의 수장인 김덕룡을 소외시킨데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2000년 총선때 386 세대를 대거 영입해 ‘홍위병’을 구축하거나, 당내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던 김문수, 이재오 의원을 적극 후원한 것도 이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부침’을 겪은 정치인도 적지 않다. 강재섭이 대표적인데, 97년 대선때 이회창 후보의 정치특보를 맡았던 그는 98년부터 사실상 정치적 동면기에 들어간다. 측근 중의 측근으로 불렸던 윤여준 의원이 지난해 대선에서 끝내 제 영토를 복원하지 못한 것도 이때문이다.

이회창 총재의 측근 참모들은 이런 과정에 대해 “계파 정치를 무너뜨리고 ‘이회창식 개혁’을 실현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행보”라고 설명했다. 이 논리대로라면 적어도 이회창 총재 체제에서는 이른바 ‘친창’ 세력은 그나마 개혁에 적극적이고, ‘반창’ 세력은 반개혁적이라는 등식이 성립돼야 하지만, 그것도 꼭 그렇지는 않다.

최근 여성 대통령감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박근혜 의원의 경우 대표적인 ‘반창’ 정치인이었지만, 그 구상만큼은 비교적 당 쇄신에 근접해 있었다. 물론 그의 대북·이념관이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반창이지만 개혁세력’이라 평가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정치적 변신의 귀재들

 

그러니 이 혼란스런 상황을 다소나마 정리하자면 이렇다.

-안기부 파견검사로 민정당 때부터 잘나가다 일찌감치 이회창 후보를 밀어 차기를 노렸지만, 운나쁘게 밉보여 졸지에 비주류로 밀려나, 이제는 개혁세력의 대표주자가 된 강재섭.

-한때 학생운동에 몸담았다가 『조선일보』에 입사해 정치판을 기웃거리다 김영삼의 비서로 들어가 민주화 운동을 했지만, 3당 합당으로 다시 보수정치세력에 일익을 더했고, 다시 반창을 주장하며 비주류로 몰렸다가, 당 대표를 맡으며 이제는 주류 중의 주류로 거듭난 서청원

-군사정권 시절, 특혜 속에 사세 확장을 거듭했던 『조선일보』의 편집국장 출신으로, 전두환 정부 이후 잘 나가는 정권 핵심 실세였으나, 이회창 총재와 사이가 좋지 않아 오랫동안 비주류로 있다가, 오늘날에는 초선급 의원들로부터 ‘말이 통하는 지도자’라는 평가까지 받으며 당 쇄신의 적임자로 거듭난 최병렬…

 

뭐 이런 식이다. 1년 임기의 한나라당 대표 탄생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26일이면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새 대표가 될 것이다. 그의 프로필을 나는 지면에 실어야 한다. 진심어린 레떼르를 붙여, 그가 내건 새로운 명분에 애정을 실어줄 자신이 내게는 없다. 이런저런 정치적 변신을 거듭하는 동안, 단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기에, 오늘의 그들이 있었을 것이다.

한나라당 경선에서 너도나도 당 쇄신의 구호를 외치지만, 내 눈에는 명분과 레떼르가 무원칙하게 뒤섞여서 그 본류조차 짐작하기 힘든 정치적 변신의 귀재들만 보인다. 제대로 된 보수 정당이 하나쯤 있는 것은,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탄생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기왕에 이 정당을 취재하고 있으니, 그런 의미부여라도 돼야 신나지 않겠나. 나는 왜 만날 공포영화만 보면서 리뷰 기사를 써야 하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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