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칼럼(aw) 2003-01-07   751

“딱총.COM으로 철새정치인을 잡자”

박태희와차한잔 – 최민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총장

윤도현밴드 베이스 박태희

누굴 만난다는 건 내게 기쁨이다. 더구나 나와 다른 분야에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더욱 그렇다. 최민희 민주언론시민운동연합 사무총장은 자연건강법을 함께 나누는 어머니들의 모임 ‘수수팥떡'(http://asamo.or.kr)을 이끌고 있고 작가로도 유명하다. 최근 아토피 치료 사례를 담은 『해맑은 피부를 되찾은 아이』도 펴냈다. 두 자녀를 둔 어머니이기도 한 그에 대한 기대는 그래서 더욱 컸다.

그러나 최민희 사무총장을 만나기로 했던 날 약속시간 보다 20분이나 늦게 도착하고야 말았다. 그날 따라 갑자기 프린터기가 고장나는 바람에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던 질문지를 출력할 수 없었다. 출력할 곳을 찾다보니 금새 시간이 지나버린 것. 운전을 하면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지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콩당콩당 뛴다.

▲ 박태희 윤도현밴드 베이스

그의 얼굴에는 운동가로서 힘과 삶의 역경이 얼굴에 짙게 배어 있었다. 초면에 지각까지 했기 때문일까? 첫 느낌은 더욱 강했다.

잠시 후 “(20분이나 늦다니) 정말 기억에 남겠네요”라는 인사에 뜨끔했으나 “배고프실텐데 식사부터 하시죠?”하는 다정한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금방 차분해졌다. 늦게 오는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는 말이 마치 누나 같기도 했다. 주문을 하기 바쁘게 음식값도 그가 먼저 치러버린다. 돈을 아주 많이 버는 사람에게는 양보하지만 웬만하면 식사비는 자신이 낸다고 한다. 더구나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후배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지키는 그의 원칙이란다.

내가 늦게 오자 미리 와 있던 황 기자와 나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던 모양이다. 내 좌우명은 예수사랑이다. 최총장도 알고 보니 카톨릭 교인이다. 그는 대학시절 시위를 주동할 때마다 “솔직히 정말 떨리고 무서웠다”고 회고하며 그 때마다 예수의 겟세마네동산의 기도를 외웠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 ‘운동’만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민단체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며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털어놓는다. 자기처럼 ‘순수’ 운동파들이 이른바 지식인들의 시민운동에 밀려 구박받았다는 얘기도 솔직하게 했다. 운동만 했던 활동가는 변호사도 의사도 박사도 아니라는 이유로 늘 뒷전에 밀릴 수밖에 없었단다. 씁쓸했다. 더구나 최민희 사무총장은 여성단체 아닌 곳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는 활동가이지 않는가?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눈에 훤하다.

술보다는 일을 통한 신뢰가 우선

나에게도 백일이 막 지난 예성이라는 예쁜 딸이 있다. 최민희 사무총장이 쓴 『황금빛 똥을 누는 아기』라는 책의 주인공은 그의 네 살 된 늦둥이 윤서란다. 가정에도 매우 충실한 모양이다.

남편은 『말』지에서 기자생활을 할 때 만났다. 함께 근무하면서 4년 동안 자신을 지켜보기만 하던 남편은 최 총장이 당시의 남자친구와 헤어지자 바로 자신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고 한다. 평소에는 ‘매우 성실하고 즐겁게 일을 하는 직장동료’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데이트를 하면서 갑자기 전혀 달라 보이더라던 최민희 총장. 남들은 고시공부를 하고 있는 남편이랑 싸우기 일쑤라는 데 자신은 여전히 사랑스럽기만 하단다. 부부금실이 고시 떨어질 때마다 더 쌓인다며 소탈하게 웃는다.

바쁘게 민언련 일을 하면서 술 한잔 하지 않았다는 얘기에는 한번 더 놀랐다. 바로 내가 사는 방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동지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평소 나는 가정 안에서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집밖에서도 큰 일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되도록 일찍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나는 아이를 통해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남자들이 아이를 키우지 않는 것은 아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권리를 포기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내 얘기를 들은 최민희 총장은 “그것이 남성에게는 선택이지만 여성에게는 필수라는 게 안타까워요. 인간관계는 꼭 술이 아니더라도 일을 통해 확실한 신뢰를 쌓을 수만 있다면 더욱 좋은 거 아닌가요”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데미안에 빠졌던 학창시절

▲최민희 민언련 사무총장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고 싶었다. 그것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최민희 사무총장이 아직도 외우고 다니는 헤세의 독백이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학과 공부보다는 책읽기에 푹 빠져 지냈다고 한다. 데미안은 30번이나 읽을 정도였고 한때는 전혜린에 미쳤었다.

그는 당시의 자신을 “공부를 잘 했으니 겉으로는 모범적으로 보였지만 속은 전혀 모범적이지 않았던 학생이었다”고 설명했다.

최 총장은 청소년 시절 나름대로 방황을 많이 했지만 직업군인인 아버지 밑에서 엄격하게 자란 덕분에 크게 어긋나지 않고 그 시절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그 시절 읽었던 수많은 책들이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이런 문학적 정서와 열정이 88년 『창작과 비평』에 『성난 휠체어』라는 단편소설로 등단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몸 속에 흐르던 반항기는 운동이라는 모범적인(?) 반항으로 대학 시절 때 표출되었다. 그런 후 민언련에 들어가 『말』지 기자를 시작했던 것이다.

또 다른 방황은 최민희 사무총장이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찾아왔다. 소련 붕괴 이후 겪은 이념에 대한 갈등 때문이다. 자신이 얼마나 ‘둔한 학생’이었는지 설명하며 이런 사례를 든다.

“대학 때 선배와 연애를 했어요. 그 선배가 어느 날 오더니 6·25는 남침이 아니라 민족해방전쟁이라고 말하더라구요. 다음해에는 그 선배가 너에게는 미국의 제국주의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듣고 저는 남자친구를 간첩이라고 신고해야 되는 게 아니냐고 고민을 했죠.”

지금은 웃으면서 말 할 수 있는 추억이 됐지만 그 때는 심각했다. 최 총장은 “내가 그렇게 둔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운동을 한다고 생각해요. 남들이 사회과학 서적을 통해 사회주의를 공부하고 세상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아무 것도 몰랐지요. 나는 매우 둔하게 세상을 겪어가며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고민해 왔어요. 그러다가 소련의 붕괴를 접하게 된 거죠”라고 그 때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그를 방황에서 끌어낸 것은 둘째 윤서다. 윤서를 가지며 어느 정도 고민이 해결되었다고 한다. 최 총장은 “윤서를 낳고 삶을 되돌아보니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휴머니스트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극악한 휴머니스트의 사례로 예수를 생각했고 그 후 성당에 나가게 되었어요”라고 말한다.

너는 너의 길을 가면 된다

시민운동에서 마냥 보람만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어떤 일로 웃고, 어떤 일로 눈물을 흘리며 지금 그 자리까지 왔을까?

“감옥에 들어갔을 때 옷을 발가벗긴 채 수색 받던 일 등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힘든 일이 많았죠. 결혼을 한 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당시는 시어머니께서 중풍으로 쓰러져 병간호를 하고 있었어요. 어머니 병간호도 해야 하는 데 남편은 재판을 받으러 가야하고, 첫째까지 천식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날이 있었어요. 그 때가 참 힘들었어요.”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도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최 총장은 움츠러들거나 삶에 대해 비관적이지 않다. 고통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즐거운 일이 생기면 남들보다 더 기뻐한다.

“난치병 환자와 생활하며 자연의학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새벽에 천식으로 위급한 할머니를 병원으로 업고 뛴 적이 있어요. 그때 할머니는 제 등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할머니를 잊을 수가 없네요. ‘수수팥떡’ 모임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어요. 우리 모임에는 엄마와 아기들이 많이 오는데 그 가운데

두 명의 아이가 유아돌연사로 죽었어요. 자연식으로 죽은 건 아니지만 모임에서 활동하다가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문제가 커졌죠. 모임을 이끌던 제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주머니들이 스스로 나서서 이성적으로 해결해주셨어요. 엄마들에게 내가 보호받는 느낌을 받을 때는 아주 뿌듯하고 감사했습니다.

기쁠 때도 많죠. ‘수수팥떡’에서 병든 아이가 치유되거나 불임이던 사람이 임신했을 때 참 좋죠. 민언련 회원이 1000명이 넘었을 때도 저는 정말 너무 좋았어요. 참여연대 1만 회원과 우리 1000명은 달라요. 민언련을 홍보해주는 언론은 없거든요.”

운동가를 가족으로 둔 사람들은 가족 안에서 어떤 갈등을 겪을까. 운동가를 딸로 둔 아버지도 궁금하고 운동하는 부모를 둔 자식들의 심정 또한 궁금하다.

“첫째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일 때 일이에요. 그 아들이 말하길, ‘아빠는 서울대 나오고 엄마는 이화여대 나왔다면서 왜 아직도 단칸방에 살아?’ 하면서 펑펑 울더라구요. 친구들이 놀리고 그러나 봐요. 그걸 보고 마음이 아팠죠. 그런데 남편은 독하게 대했어요. 그런 말하는 게 무슨 아들이냐고.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갔을 때 시험 치면 빵점 받아왔어요.

저는 공부하라는 말 전혀 안 하거든요. 과외도 당연히 안하고.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공부를 잘하면 엄마가 좋겠냐고 묻더니 평균 80점을 받아왔어요. 요즘은 성적이 더 올랐어요. 공부 잘해서 좋다기보다는 그냥 대견해요.”아들자랑 딸 자랑을 한창 한다. 딸은 황금빛 똥을 누는 아이답게 성격이 매우 좋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너그럽고 호의적이라 다행스럽다는 윤서. 모유를 오랫동안 먹인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의 차이라고 생각한단다.

“제 아버지는 『조선일보』 구독자이시며 학생운동을 할 때는 제게 차라리 수녀가 되라고 말씀하셨던 분이셨어요. 머리도 깎여 봤고 집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운동하는 바람에 친척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어요. 그 때 무척 곤란했었는데 아버지께서 ‘너는 너의 길을 열심히 가면 된다. 나는 네가 운동을 해도 이름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이름을 얘기하면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은 진짜다라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아버지께서 제가 하는 일을 이해해 주실 때 기뻐요. 작년에 언론사 세무조사 때도 ‘언론개혁도 필요하다. 누가 뭐라 해도 너는 너의 길을 가면 된다’고 저를 격려 하셨죠.”제16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바로 다음날 만나서 일까. 네티즌의 힘으로 당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었다. 최 총장도 이번에 확인했던 네티즌의 힘을 보면서 이를 어떻게 언론개혁에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선거를 거치면서 언론권력의 70%를 차지하는 조중동의 뜻을 꺾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거예요. 그 힘은 네티즌에게서 나온 것이죠. 인터넷이 언론권력을 해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입니다. 따라서 무엇인가 새로운 아이템을 구상 중이에요.”

그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이야기 한다. 대통령, 국회의원을 뽑기만 하면 국민의 할 도리를 다했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할 때가 왔나보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됐으니 이제 욕먹을 일만 남았어요. 대통령 후보였을 때는 아름다운 희망이었지만 이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됐으니까. 오늘 『오마이뉴스』에 이제는 ‘딱총.com’을 해야한다고 제안했어요. 국민이 철새정치인을 몰아내 국회를 정화시켜야 해요. 지금 노무현의 제1의 적은 국회지요.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차지한 이상 국회가 노무현의 발목을 사사건건 잡고 나올 거예요. 2004년 총선에는 당을 떠나 지각 있는 사람이 국회에 들어가야 해요. 그렇게 하기 위해 낡고 부패한 정치인은 몰아내야 합니다.”

당선된 건 노무현이 아니라 노무현을 선택한 국민이다. 국민은 개혁에 대한 욕구를 대신 실현해 줄 사람으로 노무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할 사람으로 그를 선택했다. 그는 대통령만큼이나 국민도 져야할 의무가 많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 ‘딱총.com’.

“2000년 총선연대 식으로 시민단체가 나서서 공천을 해라, 하지 말라는 방식은 시비를 불러올 소지가 있어요. 그러나 국민들이 나서서 철새정치인을 가려내고 뽑지 말자고 하거나, 반대로 바르고 꼿꼿한 정치인들을 선정해 뽑아주자고 하면 전혀 다른 차원의 시민운동이 될 거예요. ‘딱총.com이라는 철새잡이를 해야해요. 철새정치인을 잡는 모임을 만들어 2004년 총선을 준비하자고 노사모에 제안했어요.

노사모가 정치개혁을 바라면 이 일을 해야 해요. 입법부를 개혁해야죠. 노무현이 할 수 없어요. 노무현식의 새 정치 새 희망을 실현하려면 국민들이 다른 과제를 해결해야지요. 노사모의 지역조직을 국민 철새잡이 모임으로 전환하고 자기 지역구 의원들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들의 의전활동을 감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을 2004년에 국민들이 심판합시다.”

대선이 끝난 후 구체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도 알게 되어 기분 좋다. 이제 정치는 희망적이다. 나의 관심과 행동에 달려 있다. 그것을 이번 선거에서 확인했다. 시간은 빠르다.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때 너무나 아쉬웠다. 한 지도자를 아끼는 최민희 총장을 보면서, 그 또한 이 시대에 걸맞는 여성 지도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심심할 때는 만화를 본다는 최민희 총장. 아이들과의 공감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만화가 눈물이 나도록 너무 재미있다고 한다.

오늘 나는 민언련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한 해를 마무리지으며 참 좋은 분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최민희 총장과 잠시 얘기했던 『예수는 없다』는 책을 빨리 사 봐야겠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많은 데 예수의 말을 실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에 우린 동감할 수 있었다. 오늘 나는 예수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새해는 참 희망적이다. 야호!!

민언련 최민희사무총장

조금은 어두운 조명 빛에

거친 삶의 흔적이 보인다

눈을 마주치고

작은 미소를 머금을 때면

젊은 날의 순수와 사랑이

애틋하게 살아 숨쉰다

차 한잔을 나누다

1980년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

풋풋한 새내기 여대생을 만난다

그때 풀지 못했던 5·18

나의 역사의 오류를 되씹어본다

하나 하나 나누는

삶의 일상들을 통해

그녀의 눈빛과 작은 미소가

나에게 부어주는 성령의 기름처럼

나의 발을 씻기는 예수의 손길처럼 느껴지는 건

겟세마네동산에서 드리는

예수의 기도와 함께

삶의 영역에서

거짓과 불의 앞에

당당히 맞서는 삶이었기 때문이리라

누나처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나를 보듬고 사라진 뒷모습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2002. 12. 20 참여연대 밑 찻집에서 박태희

**박태희 씨는 뮤지션답게 최민희 총장을 만났던 날을 기억하며 즉흥시를 지어 보냈다.

이 기사는 참여사회 2003년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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