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표현의 자유

익명표현의 자유

李仁皓(중앙대학교 교수·법학박사)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은 채 익명 또는 가명으로 자신의 사상이나 견해를 표명하고 전파할 자유가 있는가? 이 문제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법적 쟁점이 된 적이 없는 주제이다. 그러나 분권적이고 개방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에서 언론자유의 가치가 전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익명표현의 자유가 언론자유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익명표현의 자유는 특히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부규제나 사회규범 아래에서 그 빛을 발하게 된다. 특히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게 있어서 익명표현의 자유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의 신원이 밝혀져 보복이나 괴롭힘 또는 차별에 대한 두려움 없이 소수자로서 또는 새로운 사상가로서 일반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전파할 수 있을 때에 다수가 강요하는 부당한 진리와 사상이 교정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또한 온라인 익명은 흔히 오프라인 세계에서 엘리트연사가 담론을 지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여러 신분징표들, 예컨대 인종, 계층, 성, 출신민족, 그리고 나이 등을 숨길 수 있도록 하여 줌으로써 누구나 사회적 담론을 주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법적 평가가 내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익명표현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인정하고 있는 미국의 판례들이 큰 참고가 된다. 간략하게 이들을 소개한다.

미연방대법원은 전통적으로 기본권으로서의 익명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 일찍이 1960년에 연방대법원은 Talley v. California 사건(주* 362 U.S. 60 (1960))에서 전단배포자의 신원확인을 강제하는 것은 익명표현의 권리(right to anonymous speech)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결정하였다. 1995년의 McIntyre v. Ohio Elections Comm’n, 사건(주* 514 U.S. 334 (1995))에서는, 선거유인물을 발행하는 사람이나 선거본부의 이름과 주소가 명기되지 않은 경우에 그 유인물의 배포를 금지시킨 Ohio주 법률을 위헌 선언하였다. 1999년에도 Buckley v. American Constitutional Law Foundation, Inc. 사건(주* 525 U.S. 182 (1999))에서 연방대법원은 익명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올해 6월에도 연방대법원은 Watch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New York Inc. v. Village of Stratton 사건(주* 122 S.Ct. 2080 (2002))에서, 팜플렛의 발행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름을 시에 제출하도록 요구한 시조례가 증보 제1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익명의 이익”(anonymity interests)을 침해한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연방하급심 법원들도 인터넷에서의 익명표현의 자유를 잇달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주* 예컨대, ACLU of Georgia v. Zell Miller, 977 F. Supp. 1228, 1230 (N.D. Ga. 1997) (인터넷에서 익명 또는 가명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헌법상의 권리를 인정함); ACLU v. ohnson, 4 F. Supp. 2d 1029, 1033 (D.N.M. 1998), aff’d 194 F. 3d 1149 (10th Cir. 1999) (인터넷상에서 익명으로 통신할 수 있는 증보 제1조의 권리를 인정함); ApolloMedia Corp. v. Reno, 19 F. Supp 2d 1081 (C.D.Cal. 1998), aff’d 526 U.S. 1061 (1999); Anderson v. Hale, 2001 U.S.Dist. LEXIS 6127 (N.D.Ill. 2001) (반대자그룹(dissident group)의 익명의 회원은 증보 제1조하에서 자신들의 이메일주소 및 온라인계정정보에 대한 제출명령영장(subpoena)을 취소할 수 있는 특권을 주장할 수 있다) 등 참조.)

물론, 익명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익명으로 명예훼손을 하거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인 음란물이나 아동포르노를 배포하는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다.(주* 윤명선, “사이버스페이스와 표현의 자유”, {인터넷ㆍ언론ㆍ법}(한국법제연구원, 2002), 28-29면도 익명성의 보장은 표현자의 프라이버시 보호와 언론의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임을 인정하면서도, 익명성을 절대적 권리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법원들은 “익명은 한번 상실되면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자의 익명성을 훼손하기에 앞서, 불법행위의 주장이 어떤 무게를 싣고 있는지 여부를 미리 결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법원은 Rancho Publications v. Superior Court 사건(주* 68 Cal. App. 4th 1538, 1540-41 (1999))에서, 명예훼손이라고 주장되는 표현을 담은 신문광고를 낸 사람들의 신원에 대한 증거개시(discovery)를 차단시켰다. 이러한 입장의 기본취지는 단순한 주장만으로는 헌법상의 권리를 소멸시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도록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상표권침해 사건인 Columbia Ins. Co. v. SeesCandy.com, 185 F.R.D. 573 (N.D.Cal. 1999)에서, 법원은 익명의 인터넷 표현자를 위해 필요한 보호수단에 대해 깊이 검토를 하였는데,(주* 기업비밀(trade secrets)을 침해했다고 주장되고 있는 익명의 인터넷 표현자의 신원을 알고자 법적 구제를 청구한 것을 다룬 유사한 사건으로는 Prepaid Legal Services Inc., et al. v. Gregg Sturtz, et al., California Superior Court, CV 798295이 있다.) 법원은 가처분(temporary restraining order)을 내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딜레마에 봉착하였다. 즉, 위반자라고 하는 사람은 신원확인이 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는 송달도 받지 못하였다. 여기서 법원은 피고의 익명을 전제로 해서 다음과 같이 판시하였다. “피해당사자에게 권리구제를 위한 절차를 제공할 필요성은 온라인포럼에 익명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정당하고 소중한 권리와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 . .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모든 사실들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는 부담 없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열린 커뮤니케이션과 왕성한 토론(open communication and robust debate)을 촉진시킬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곤혹스러움의 두려움 없이 민감하거나 내밀한 상황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여 준다. 불법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곤혹스럽게 하거나 괴롭히고자 하는 다른 누군가가 사소한 소송을 제기하여 자신들의 신원을 공개하도록 요구하는 법원의 명령을 얻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없이, 온라인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주* 185 F.R.D. 573, 578 (N.D.Cal. 1999)) 법원은 이어서 한 쪽 당사자가 익명의 인터넷 표현자의 신원을 밝히고자 하는 경우에 적용되어야 할 제한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New Jersey주 항소법원은 최근에 명예훼손소송에서 익명의 인터넷 표현자의 권리에 관련된 판결을 내렸다.(주* Dendrite International v. Does, 342 N.J. Super 134, 141-142 (N.J.Super AD. 2001)) 여기서 법원은, 원고가 표현자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효과적인 소송수행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을 때에만 익명표현의 권리가 소멸될 수 있음을 보장하기 위해서, 4단계의 심사기준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In re Subpoena Duces Tecum to America Online, Inc. 사건(주* 52 Va Cir. 26, WL 1210372 (Va. Cir. Ct. 2000))에서, 법원은 익명의 인터넷 표현에 기본적으로 헌법적 차원의 보호가 주어지는 것임을 인정하였다: “증보 제1조상의 익명표현의 자유가 인터넷상의 통신에 확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본 법원으로 하여금 미연방대법원의 선례 또는 21세기의 언론 현실을 무시하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온라인상에서 명예훼손적 표현을 한 것으로 주장되는 익명의 피고들의 신원을 요구하는 제출명령영장(subpoena)을 심사하였는데, 문제의 제출명령영장이 집행되어야 할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2단계 심사기준을 적용하였다. 그에 따르면, 첫째 법원은 제출된 소장과 증거자료에 의해, 제출명령영장을 구하는 신청인이 그 신청에 대한 정당하고 신뢰성 있는 근거(a legitimate, good-faith basis)를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여야 한다. 둘째, 제출명령의 대상이 되는 신원정보가 당해 사건의 판단에 핵심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 밖에 연방지방법원은 Doe v. 2TheMart.Com Inc. 사건(주* 140 F. Supp. 2d 1088 (W.D. Wash. 2001))에서, 증권법을 위반한 것으로 주장되는 인터넷 표현자의 신원정보를 구하는 당사자에게 엄격한 책임을 지우고 있다. 즉, 소송당사자가 아닌 익명의 인터넷 이용자의 신원정보를 구하는 당사자는 다음을 입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1) 제출명령영장(subpoena)이 신의에 쫒아(in good faith)

발부되었으며, 달리 부당한 목적을 위해 발부된 것이 아니라는 점 (2) 구하는 신상정보가 핵심적인 주장 또는 항변과 관련이 있다는 점, (3) 구하는 신상정보가 주장 또는 항변에 직접 그리고 실질적으로 관련된 것이라는 점, (4) 주장 또는 항변을 입증하거나 또는 부인하기에 충분한 정보가 어떤 다른 출처로부터는 얻을 수 없다는 점. 이렇게 연방지방법원은 소송의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신원을 공개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기준은 특별히 엄격하며, 제3자의 신원공개는 예외적인 사건에서만 타당할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익명표현의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러한 미국 법원의 태도와 입장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판단컨대, 우리 헌법 제18조가 특별히 통신의 비밀을 보장하고 있고, 통신비밀의 보장은 곧 언론자유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익명표현의 자유는 이미 우리 헌법에서도 깊이 내장되어 있는 기본권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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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료는 함께하는 시민행동 정보인권운동 자료실에서 옮겨왔습니다

사회인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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