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킹·도용 ‘식은죽’ 범죄 악용

[참여연대-한겨레 공동기획]당신의 개인정보 안녕하십니까 ②줄줄 새는 주민등록번호

1996년 남쪽으로 건너온 탈북자 김아무개(37)씨는 지난해 중국에 여행을 갔다가 입국 거부를 당했다. 중국 관리들이 김씨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98년 탈북한 강아무개(24)씨 역시 주민등록번호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주요 인터넷사이트 등에 누군가 강씨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 회원으로 가입한 것이다. 고민하던 강씨는 결국 다른 동료 탈북자의 주민번호를 사용해 사이트에 가입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탈북자들의 첫 거주지가 경기 안성 하나원으로 모두 똑같기 때문이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2~6번째 숫자가 거주지를 나타내는데, 탈북자들의 경우 ‘2***’으로 모두 동일한 것이다. 뒷자리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숫자는 생년월일별 ‘당일 신고 순서’를 나타내는데, ‘1’이 대부분이다. 결국 성별과 생년월일만 알면, 탈북자들의 주민등록번호 13자리 중 12자리를 알 수 있는 셈이다. 김씨는 “북한에도 비슷한 번호는 있지만 출신 지역을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는 주민등록번호는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사이트 침입 1400만명 온갖 정보 빼내

생일·성별·출생지 알면 12자리 완성

◇ 프라이버시 침해의 ‘주범’, 주민등록번호= 김아무개(19)씨는 지난해 780만명의 개인정보를 해킹해, 마케팅·리서치 회사에 판매하려다 검거됐다. 신용카드 결제승인 처리업체 1개와 9개 일반 인터넷 사이트에 침입해 780만명의 개인정보를 빼낸 것이다. 김씨가 해킹한 개인정보는 주민등록번호, 신용카드번호, 기타 개인의 신원확인과 밀접한 정보들이 총망라돼 있었다. 김씨는 이전에도 80여개 업체를 해킹해 600여만명의 개인정보를 유출했다가 입건된 적이 있다. 결국 김씨 혼자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1400만명의 개인정보를 빼낸 셈이다.

부산에 사는 노아무개(55)씨는 2003년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땅이 은행에 저당 잡혀 5억원이 대출된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대출을 받으려면 본인 신분증, 등기필증, 인감증명서가 필요한데, 범인은 노씨의 주민등록번호를 알아내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뒤 동사무소에 가서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았다. 등기필증의 경우 법무사가 써준 확인서로 재발급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악용했다. 노씨는 “내가 ‘복제’된 것 같다”며 몸서리를 쳤다.

일선 경찰서의 한 경찰관은 “인터넷 성매매에서 청부살인에 이르기까지 최근에는 본인의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한 범죄가 드물 정도”라고 말했다.

◇ 주민번호는 해킹당한 지 오래 =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주민등록번호의 생성원리가 널리 알려져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주민등록법 21조는 주민등록번호 생성 방법 등을 공개하는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 혹은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은 이미 사문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주민등록번호 생성 프로그램이 인터넷 상에 널리 퍼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뼈대를 이루는 주민등록번호 생성원칙 역시 구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현행법상 주민등록번호가 범죄에 사용되거나 인터넷 상에 공개됐더라도 이를 바꾸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주민등록번호가 공개돼 피해를 입은 사람 중에는 법원에 ‘생일이 잘못됐다’고 호적 정정기재를 신청한 뒤, 새로운 번호를 받는 편법을 사용하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다.

윤현식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은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주민등록번호가 이제는 국민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원흉이 되고 있다”며 “군사정권의 유물이자 각종 범죄에 악용되고 있는 주민등록번호 제도의 개선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효율적인 국민통제 위해 박정희 정권때 도입

박정희 뒷자리 100001 육영수 뒷자리 200001

주민등록번호는 애초 군사 정권이 효율적인 국민 통제를 위해 고안한 제도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 무장간첩 김신조 등이 서울에 침입한 직후인 1968년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국민들에게 12자리 주민등록번호가 찍힌 주민등록증을 발급한다.

당시 주민등록번호는 지금보다 한자리 적은 12자리로, 박정희 대통령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100001’, 육영수 여사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200001’이었다. 유신 이후인 1975년에는 “간첩이나 불순분자를 용이하게 식별”하기 위해 법을 개정해, 지역별 번호가 포함된 13자리로 개편했다.

“무의미한 번호로 조합해야”

– 대안은 없나, 납세·의보 등 분야별 번호 달리할수도

‘군인은 죽어서 군번을 남기고, 대한민국 국민은 죽어서 주민등록번호를 남긴다.’

5천만 국민의 평생을 옥죄는 주민등록번호를 개선하거나 아예 폐지하자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가장 유력한 대안은 나이, 성별, 출신지역 등 개인정보가 고스란히 노출되는 현행 번호체계를 최소한 미국의 사회보장번호처럼 무의미한 번호의 조합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박원석 참여연대 사회인권국장은 “과도기적으로 개인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번호를 발급하고, 기존 번호 체계와 병행해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준우 함께하는시민행동 정책팀장은 “전세계 최고 수준인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해, 전산 시스템을 약간만 수정해 주소나 전화번호 등을 검색 인자로 지정하면, 주민등록번호 없이도 개인인증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주민등록번호를 너무 믿은 나머지 다양한 개인 인증 제도 개발을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진보네트워크센터는 납세자번호, 의료보험증번호 등 각각의 목적에 맞는 번호를 따로 사용하고, 민간 분야에서는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해 사용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단체 활동가 지음씨는 “공공, 민간 가릴 것 없이 모든 데이터베이스에 주민등록번호가 쓰이는 현실이 가장 큰 문제”라며 “주민등록번호 같은 체계가 있는 국가라고 해도 이를 사용할 수 있는 국가 기관이나 법적 영역을 분명히 규정해 제한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등록번호의 발급 주체를 중앙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로 이관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윤현식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은 “주민등록 관련 업무를 중앙정부가 관리하다 보니 지방정부는 책임성이 떨어지고, 중앙정부는 행정 효율을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요구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며 “주민행정 사무 전체를 자치단체가 전담하는 관련 법안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주민등록번호 관련 논의가 탄력을 받고 있다. 열린우리당 유인태 의원실 유정곤 보좌관은 “주민등록번호의 오남용을 방지하고, 재발급을 손쉽게 한 개선안과 폐기 가능성 등을 다 열어놓고 대안을 모색중”이라고 밝혔다.

민주노동당도 주민등록증 강제발급 등 인권침해 요소를 제거하고, 관련 업무를 중앙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로 이관하는 내용 등을 뼈대로 하는 법안을 모색하고 있다.

외국에선 대다수 국가 고유식별번호 없어

도입때도 사용범위 엄격 제한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식별번호를 일괄적으로 도입한 나라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주민 식별번호를 도입하는 경우에도 그 사용 범위를 공적 영역 등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벨기에, 그리스 등 상당수 나라들은 국민들에게 일련번호를 아예 부여하지 않는다. 독일은 연방 신분증제도를 운영하지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고유 식별번호는 부여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 사회보장번호를 사용하는데, 일상 생활에서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는 점에서 ‘사실상’ 주민등록번호 구실을 한다고 볼수 있다. 다만 번호가 무의미한 숫자 9자리의 조합으로 돼 있으며, 손쉽게 새 번호를 신청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스웨덴 역시 출생과 동시에 생일과 성별을 알아볼 수 있는 일련 번호를 주민들 모두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이 번호의 사용 목적을 복지행정과 지방자치단체 운영 등으로 한정하고, 민간 영역에서의 사용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지역이나 출생년월일, 성별, 신고순서 등이 포함된 국민식별번호를 사용하는 나라는 중국 등 옛 사회주의권 나라들밖에 없다. 헝가리의 경우 주민등록번호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으나, 동구권 몰락 이후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 판정을 받고 결국 폐지했다.

한겨레 서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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