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법센터 칼럼(pi) 2012-01-31   3349

부러진 화살, 전혀 놀랍지 않은 이야기

부러진 화살, 전혀 놀랍지 않은 이야기

 

김남희(변호사,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영화 ‘부러진 화살’을 보았다. 놀랍게도, 영화를 보고난 나의 느낌은, 너무 익숙하고, 전혀 놀랍지 않다는 것이다. 변호사를 하면서 종종 경험하고 겪었던 고압적이고 권위적이고 불친절하고 오만한 법원의 모습이 보인다. 익숙하다.

 

  사실, 법적 관점에서 보면, 석궁사건에서 박 판사가 화살을 맞았는지 아닌지 여부는 김 교수의 유죄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중요한 쟁점은 아니다. 김 교수가 흉기인 석궁을 장전하고 박 판사를 겨냥하고 다가서는 순간, 김 교수는 이미 살인 또는 상해의 실행에 착수한 것이다. (물론 김 교수는 쏠 의사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므로, 이러한 주장이 맞다면 좀 다른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내심의 의사를 판단하기란 어렵고, 법원은 김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김 교수가 실제로 쏘았는데 박 판사가 경미한 상처를 입은 것인지, 아니면 우발적으로 화살이 발사되어 벽을 맞고 부러졌는지 여부는 범죄가 기수(범죄가 완료된 것)인지 또는 미수(범죄의 실행에 착수하였으나 완료되지 못한 것)인지 여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형법상 미수는 임의적 형 감경사유일 뿐이다. 즉, 기껏해야 양형에 영향을 미치거나 또는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결국, 박 판사가 화살을 실제로 맞았는지 아닌지 여부는 법원의 입장에서는 이 사건에서 중요한 법적 쟁점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고 흉기를 판사에게 겨누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판사들에게는 등골이 서늘한 일이고, 용납할 수 없는 “사법테러”다. 법원 입장에서는 엄중한 처벌이 마땅하다. 물론, 당사자는 그렇지 않다. (김 교수 입장에서는) 나는 쏘지도 않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니 황당할 노릇이다. 사실은 조작되었고, 증거는 사라졌는데, 이를 설명해주는 자가 없고 모든 요구는 묵살된다. 재판과정이 어이가 없고, 증거신청을 받아주지 않는 판사들이 이해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법원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이유로 사건의 결론에는 영향이 없으므로) 김 교수가 화살을 실제로 쏘았는지 아닌지 밝힐 필요도 없거니와, 만약에 김 교수가 화살을 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고 이것이 밝혀진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판사가 거짓말을 한다. 판사가 증거조작을 하고 위증을 한다. 검사가 증거인멸을 한다…” 우리나라 사법부에서 상상할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법원과 검찰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권위는 산산조각이 난다. 절대로,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발생할지도 모르는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피고인의 요구를 묵살하고 (영화 속 판사들처럼) 판사직에 물러나 조직을 위해 희생하거나, 계란세례를 받는 것이 편하다. 결국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법조계의 위신을 위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였던 것이다. 실체적 진실을 위한 요구는 이렇게 법원과 검찰의 위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과연 실체적 진실이나 정의의 요구를 묵살하고, 피고인의 인격과 권리를 철저히 무시해야 할 만큼, 법조계의 위신은 그렇게 중요한 가치인가? 이런 극도의 권위주의는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왜 대한민국 법조계는 이토록 권위적이고, 또 이렇게 경직되어 있는 것일까. 무릇 권위란 타인이 부여하는 것이지 자신이 직접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능력과 인격을 갖춘 자에게는 원하지 않아도 권위가 따라오고, 이 중 하나가 부족하거나 둘 다 없는 경우에는 아무리 찾아도 권위가 따라오지 않는다. 우리나라 법원이 지금 부여되지 않은 권위를 억지로 찾아 누리려 하는 것이 아닌지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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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2012. 1. 31. 한겨레 opinion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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