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법센터 칼럼(pi) 2008-09-01   1822

재산권보다 우월한 집회의 자유-"없는 자들의 최후의 보루"

한나라당은 지난달 28일 불법시위로 피해를 본 피해자들이 손쉽게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시민집단소송’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환경, 노동, 소비자, 시장독점 등 사회개혁적 집단소송제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반대했던 한나라당이 들고 나온 것이기에 그 배경부터가 궁금하다.

집회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의 일종으로서 국민에게 정치적 의사 형성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민주적 공동체가 기능하게 하는 불가결한 근본요소다. 직접민주주의를 배제하고 대의민주제를 선택한 우리 헌법에서 일반 국민은 선거권 행사 외에는 집회의 자유를 행사해 공동으로 정치의사를 형성하는 가능성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밖에 집회는 건전한 여론 형성 기능,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사회 형성 기능,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을 발현하는 인격 실현 기능, 민주주의 및 국민주권 실현 기능 등이 있다. 집회의 자유가 이런 기능들을 수행하기에 헌법은 집회의 자유에 다른 기본권에 비해 우월한 지위, 즉 생명권 다음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역시 집회의 자유가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기에 집회로 인한 불이익이나 불편에 대해 국가나 제3자는 수인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집회에 대한 집단소송제도는 집회에 의한 재산권 침해 또는 교통불편을 이유로 집회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게 하는 제도로 결국 우월한 집회의 자유를 그보다 열위의 기본권인 재산권, 더 나아가 기본권도 아닌 교통편의보다 아래에 위치 짓는 위헌적 제도다. 특히 집회는 그 개념 자체에 다중에 대한 위력의 행사와 불편 주기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러한 특성 자체에서 발생하는 타인과의 기본권 충돌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에 대한 제한적 수단만을 강구한다는 것은 결국 집회를 기본권이 아닌 단순한 행정규제의 대상이 되는 일반행위 혹은 더 나아가 범죄행위로만 보는 것으로 헌법에 위반된다.

물론 집회로 인해 재산권의 침해를 받는 사람들로서는 기본권 타령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집회에 대한 제한이 더욱 신중해야 하는 이유는 집회가 토머스 에머슨이 이야기한 것처럼 ‘없는 자’들의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같은 표현의 자유 중 언론의 자유는 남들이 읽어줄 정도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 특히 그중에서도 일반인들의 주장을 담는 공기로서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매스미디어와 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만의 것이다. 결국 사회적 소수자는 어렵고 힘들지만 몸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소수자는 영원 불변한 것이 아니다. 사회가 급격하게 변하는 만큼 언제 누가 사회적 소수자가 될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가 아닌 자라도 사안에 따라서는 언론의 무관심 등으로 몸으로 항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법치주의를 외쳐왔다. 집회에 대한 집단소송제를 도입한다고 하면서 내세운 명분 중의 하나 역시 불법시위를 근절하겠다는 것으로 소위 ‘법치주의’와 통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법치주의는 국가권력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등장한 원리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명박 정부의 행태를 보면 이명박 정부가 내세웠던 법치는 자신이 법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고, 법에 의한 통제를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법이란 이름으로 국민을 통제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이라도 진정한 법치주의를 세우려면 헌법 질서에 맞게 집회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면서 재산권 등 다른 기본권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박주민 변호사(공익법센터 운영위원)

 

*이 글은 9/1 한겨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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