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법센터 칼럼(pi) 2009-06-05   837

잘못된 사법관행이 문제

론책임론 방향 잘못 됐다 
 

언론책임론 방향 잘못 됐다 
[박경신 교수 기고] 잘못된 사법관행이 문제
 
 2009년 06월 04일 (목) 18:18:49 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 ( kyungsinpark@korea.ac.kr
 
 
노 전 대통령에 대하여 검찰의 주장을 중심으로 편파적으로 보도하고 논평했던 언론들의 고해성사가 이어지고 있고 반성하지 않는 언론에 대한 비판이 줄을 잇고 있다. 언론은 진실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한다는 이상을 추구하고 있고 이 이상에 비추어 언론이 스스로 참회하고 사물의 양면을 더욱 균형 있게 보도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참회는 언론계의 내부적 성찰이 되어야 하지 언론을 실질적으로 위축시키는 사회적 기류가 형성되어 추후에 그러한 법적 탄압의 근거가 되는 데에 일조해서는 안 된다. 
노 전 대통령은 우리의 슬픔의 크기만큼이나 공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임기 중 비리 혐의에 대한 정보는 국민들에게 중요한 것이었고 검찰이 이 정보들을 공개하는 한 언론은 이를 보도할 의무가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임기 중에 아무리 적은 액수의 돈이라도 이를 임기 중에 ‘잘 나가는’ 기업인으로부터 받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공적인 일이었고 편파적이거나 추측성일지라도 일부 부정확한 점이 있더라도 보도는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했다.
    
  ▲ 29일 고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시신을 태운 차량이 시청을 향하고 있다. ⓒ인터넷 사진 공동취재단  
 
권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에 관계없이 인권침해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인권을 침해할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비판과 감시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마치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가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한 측면에만 천착하였다거나 일부 과장된 면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검찰수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수만 명의 국민으로부터 매국노 소리를 들은 정운천 전 장관이 지금 자살이라도 한다면 우리 모두 다시 참회의 글을 올릴 것인가? 특히 일부 진보매체들의 경우 ‘친한 사람일수록 엄정한 것이 언론의 정도’라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아픈 속을 다스리며 노 전 대통령에 대해 공격적인 글들을 쓴 것으로 알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다고 해서 이제 와서 이러한 자세를 포기한다는 것은 당시 아픔을 견뎌내었던 데스크와 기자들의 영혼을 파는 일이다. 이러한 원칙적인 입장이야말로 노 전 대통령이 한국사회에 보여주려고 했었던 모습이며 언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다.
‘검찰 수사 중 자살’의 원인을 파헤쳐야
누가 노 전 대통령을 죽였는가? 자살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복잡한 이유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중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를 이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한다. 우선 노 전 대통령은 임기 중에 훨씬 더 많은 인터넷 상의 악플과 언론의 비방에 시달렸지만 임기 중에 기가 꺾인 적이 없었다. 임기 중과 임기 후의 결정적 차이는  악플이나 비방이 아니라 검찰의 강압적인 수사와 검찰에게 이러한 수사를 허용한 사법관행이다. 더욱이 노 전 대통령처럼 언론보도의 중심에 서지 않았던 여러 사람들이 검찰 수사 도중에 자살한 점 역시 이 의심을 강화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검찰 수사 도중의 ‘자살’이 왜 발생하는가라는 일반적인 문제로 접근을 해 볼 수 있다.
검찰수사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형벌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검찰수사가 형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이 원칙을 보호하는 하위원칙들이 영장주의와 자기부죄거부권이다.
영장주의란 체포, 구속, 압수수색과 같은 개인의 신체적 자유나 사생활의 제약은 수사기관과는 독립된 법관이 ‘범죄수사에의 필요성’이나 ‘죄를 범하였다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 등을 영장을 통해 인정한 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헌법적 원리이다. 즉 유죄의 입증은 아니더라도 유죄의 합리적인 의심이라도 있어야만 이에 상응하는 불이익이 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법 상으로는 체포영장의 경우 검찰의 출두요구를 거부하고(“and”)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만 발부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법원은 검찰의 출두요구를 거부한 것만으로도 쉽게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있다. 압수수색에 있어서도 형사소송법 제215조의 ‘범죄수사에의 필요성’도 그다지 높게 심사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결국 법원은 검찰에게 별다른 혐의입증도 없이 수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준 상황이고 이 상황에서 피의자들은 체포나 압수수색을 당하는 더 큰 봉변을 피하기 위해 열심히 검찰출두에 응하고 있다.
그런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진행되는 검찰출두야말로 피의자가 느끼는 치욕을 배가하는 요소이다. 게다가 검찰출두가 한 번 이루어지면 ‘저 사람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자발적으로 걸어나갔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사회전반에 퍼지면서 그 사람의 심리적 압박은 더욱 커져간다. 검찰 수사 자체가 형벌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김해에서 서울에 이르는 수 시간에 이르는 버스여행 뒤에 다시 새벽 5시에 돌아오는 ‘형벌’과도 다름없는 수사는 노 전 대통령이 받은 정신적 압박의 정점이 되었다. 그러나 영장주의가 지켜지는 사회라면 노 전 대통령은 쉽게 이런 치욕을 자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검찰이 형사소송법 제200조의2 상의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만한 상당한 이유’를 입증한다면 체포영장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이 자진출두하도록 압박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유리한 증거는 모두 공개해왔던 검찰의 관행에 비추어 그러한 증거는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법원의 구속영장에 대한 자세는 불구속원칙을 향하여 상당히 진일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체포영장과 압수수색영장을 쉽게 내주는 사법관행이 존재하는 한 수사의 형벌화는 계속될 것이다.
피의사실공표,  유죄확정 전이라면 공인이라도 자제해야한다는 범위로 확대되면 곤란
혹자는 노 전 대통령의 사인으로 치욕적인 검찰출두보다도 검찰의 피의사실공표를 꼽는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이 수사에 응한 것은 체포나 압수수색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언론을 통해 검찰이 공표한 피의사실에 대해 해명의 필요를 느껴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검찰의 피의사실공표가 금기시되어야 하는 이유는 추후에 그 사건을 맡을 판사나 배심원에게 편견을 가지도록 하거나 여론을 통해 압력을 넣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해하기 때문이다. 즉 유죄증거들을 미리 공개하여 사회적으로 여론에 대한 확신을 확산시키면 판사나 배심원이 무죄판단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피의사실공표가 피의자가 공인인 경우 등의 최소한으로 한정되어야 함은 불문가지이다. 특히 검찰이 공인이든 사인이든 피의자의 유무죄에 대해 논평을 하는 것은 금하여야 한다(미국 Los Angeles검찰청의 대언론정책).
사실 지금 ‘참회’하는 상당수 언론사들이 검찰의 피의사실을 전달하는 나팔수 역할을 한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참회하고 있다. 하지만 언론사의 참회도 ‘피의자가 공정히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선에서 그쳐야지 ‘유죄확정 전까지는 범죄수사에 대해 드러난 단서들의 보도는 공인이라 할지라도 자제해야 한다’는 범위까지 확대되는 것은 곤란하다. 
자기부죄거부권이 지켜지는 사회였다면…
언론이 정말 할 일은 우리나라 검찰과 법원이 헌법 제12조2항이 보호하는 자기부죄거부권을 존중하는지 감시하는 일이다. 자기부죄거부권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사회였다면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사건에서와 같은 피의사실공표를 할 동기가 적었을 것이다.
검찰이 피의사실을 언론을 통해 공표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수사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여 이를 통해 피의자를 압박하여 자발적인 진술을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묵비권 또는 진술거부권으로도 불리는 자기부죄거부권이 지켜지는 사회에서 결백을 확신하는 피의자들은 검찰의 언론플레이에 ‘마음의 벽’을 쌓고 전혀 심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죄추정원칙의 사회에서 유죄입증에 대한 책임은 검찰이 가지고 있고 피의자는 자기파괴에 이르는 입증에 협조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나는 결백하니 너희들이 뭐라고 떠들든 내가 협조할 의무가 없다. 너희들이 알아서 유죄증거를 가져와 보라’는 선언이 그다지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즉 명예롭게 묵비권을 행사할 자유가 인정되는 사회에서 결백한 피의자가 ‘결자해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이 선택한 방식의 결자해지의 방식은 말이다. 
혹자는 ‘의심받을 짓을 할 사람이 해명할 압력을 느끼는 사회가 올바른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국가는 강제력과 폭력을 국가가 독점한 사회이다. 국가가 개인을 파괴하는 절차인 형사절차에 있어 개인에게 ‘적극적 해명’의 의무를 씌우는 것이야말로 ‘고문’ 그 자체이며 무죄추정의 원칙이야말로 바로 이를 금지하는 것이다. 
언론의 진짜 잘못은 다양성의 부재
필자는 언론이 ‘더 균형잡힌 보도를 했을 걸…’ 이라며 자성하는 것을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모든 언론이 서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나서면서 검찰의 언론플레이에 일조한 것을 한목소리로 참회하면서 국민의 알권리가 보장되어야 할 공적사안에 대해 보도를 자제하려 하는 것도 문제다. 이것은 마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에 대해 모두가 나서서 ‘퇴임한 권력자의 위선’만을 비판하면서 검찰수사 관행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던 모습 – 즉 ‘다양성의 부재와 획일성의 모습-을 재연하는 것이다.
    
  박경신 교수.  
노 전 대통령은 이 땅의 모든 ‘비주류’의 화신이다. 노 전 대통령은 ‘주류에 대한 올곧은 거부’라는 자신의 삶을 더 살기 위해 죽었다. 노 전 대통령이 주류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언론을 바랬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수가 뭐라 하든 자신의 정도를 지킬 수 있는 언론을 바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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