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법센터 칼럼(pi) 2010-11-08   3617

인권의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지 말라

인권의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지 말라 – 모욕죄 비판

박경신 공익법센터 소장/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10월16일 25살 공익요원이 자신의 ‘4대강 비판’ 글 을 두고 인터넷의 보수논객과 말싸움을 벌였다가 이 보수논객이 모욕죄로 고소를 하여 경찰조사를 받다가 자살하여 숨졌다. 평소 내성적이었던 이 공익요원은 근무기간동안 1천 여개의 댓글을 올릴 정도로 활발하게 온라인에서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글을 올리다가 경찰의 전화를 받은 이후 1개도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김주하 아나운서도 이전에 자신을 ‘무뇌’라고 부른 트위터리안에 대해 법적 조치를 경고했는데 아마도 모욕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데 모욕당하는 사람의 인권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들 말하는 모욕죄의 존재에 대해서 숙고해보자. 혹시 더 큰 인권침해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닌지.

 

모욕죄는 말로 타인을 모욕하는 모든 행위를 1차적으로 범죄로 규정한다. 국가가 국민들을 모욕감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좋은 평가를 받을 때 뿌듯해하고 나쁜 평가를 받을 때 기분이 좋지 않으며 나쁜 평가에 감정이 실려있을 때 모욕감을 느낀다. 그런데 타인이 자신에 대해 의견을 표명할 때마다 평가가 이루어지며 삶은 평가의 연속이다. 대학입시, 취업, 심지어는 소위 연애를 할 때도 평가는 이루어진다. 소위 ‘차일’ 때 극도의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다. 그렇다면 국가가 국민들을 모욕감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은 서로에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금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헌법적으로 허용되거나 정책적으로 바람직한 일일까?

 

모욕죄를 text에 대한 통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즉, 평가는 하되 경멸적인 언사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경멸적인 언사’란 존재하는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새끼’라는 말은 욕이 될 수도 있지만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친근감의 표현이 된다.

 

경멸적인 언사는 없다. 경멸적인 상황이 있을 뿐이다. 미국대법원 판결문의 한 구절처럼 한 사람의 욕은 다른 사람에게는 노랫말이 될 수 있다. 모욕은 text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context에서 발생한다. ‘학생같은 소리이다’라는 말은 교수가 학생에게 말하면 모욕적이지 않겠지만 학생이 교수에게 할 경우 모욕적이다. 평가는 하되 모욕을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모욕감 자체는 context에 대한 주관적 인식 즉 자존감에 비례한다. ‘서울시장감이다’라는 말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다고 자평하는 사람에게는 모욕적이다. 모욕죄 보존의 근거로 자주 언급되는 최진실의 자살에 대해서도 박중훈이 가장 정확한 지적을 했다고 본다. ‘우리는 다 안다. 진실이가 왜 그랬는지. . . 그놈의 인기 때문이다.’ 즉 연예인들은 좋든 싫든 엄청난 자존감 속에서 살 수 밖에 없고 이 자존감은 높을수록 쉽게 상처받는다. 물론 법원은 모욕당한 사람의 주관적 자존감의 깊이에 따라 모욕죄 유무죄를 판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공포스러운 가능성은 결국 법원이 자존감을 스스로 예측해보겠다며 모욕당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그를 모욕한 사람을 강하게 처벌하는 것이다. 실제로 모욕죄는 전세계에서 거의 없지만 국가원수모독죄만 존재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아닐까? 모욕죄의 존재에 대해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면 이런 반응들이 돌아온다. “그 법은 ‘가진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즉 모욕당할 자존감을 입증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자들이다.

 

욕은 표현의 자유의 한 부분이다. 표현의 자유는 그 자체가 인권이기도 하지만 다른 인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인권침해는 항상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가장 대규모로 가장 조직적으로 저질러진다. 인권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은 인권을 침해할 힘을 가진 자들을 감시하고 비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의 보장이다.

 

욕도 이러한 비판과 감시를 수행한다. 욕은 과장과 은유이다. 과장과 은유는 자신의 감정과 주장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며 이 중에서 욕은 자신의 피해의식과 그 원인제공자에 대한 증오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특히 그 고통의 원인이 권력자인 경우에 그러하다. 필자는 강의를 하면서 가끔 학생들의 무기명강의평가에서 심한 악담을 보고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비싼 등록금을 내고 나의 얘기를 수십시간 들어야 함은 물론 학점을 통해 자신의 운명이 나에 의해 지배된다. 강의가 부실하거나 평가가 불공정할 때 이들은 이미 피해를 당한 것이고 보복이 두려워 마음대로 시정요구도 못할 때 욕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때 욕은 자신의 열악한 상황을 책임지고 있는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이 된다. 욕을 통해서 권력자들의 횡포나 인권침해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식자층들의 고담준론이 대신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러한 피해의식의 표명이 모두 정당하지 않다. 예를 들어 권력자라고 볼 수는 없는 연예인들에 대한 불합리한 공격들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공격도 자신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것이 상대를 불쾌한다는 이유만으로 국가가 형사처벌의 칼을 들고 개입하는 것은 위에서 본 공익요원의 사례처럼 더 큰 인권침해를 불러일으킨다.

 

대부분 나라의 헌법은 표현의 자유가 일반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일반적인 ‘행동의 자유’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표현이 해악을 일으킬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는 경우 즉 표현이 행위처럼 작동할 경우에만 규제할 수 있다는 ‘소위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원리가 지켜진다.

 

그렇다면 의견과 감정의 표명은 그러한 위험이 없다. 예를 들어, 부동산중개인이 ‘여기에 지하철역이 들어올 계획이 있다’라고 사실적 주장을 하면 사람들이 현혹되지만 ‘여기는 지하철역이 들어설만한 자리이다’라고 의견을 표명하면 사람들은 그리 쉽게 현혹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들의 법제에서 의견과 감정의 표명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사기죄는 허위인 사실적 주장에만 적용된다. 명예훼손은 사실적 주장에만 적용이 되지 의견과 감정의 표명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물론 의견과 감정의 표명이 곧바로 정신적 피해를 일으킬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나라들에는 모욕죄 대신 차별금지법의 일환으로 혐오죄가 존재한다. 혐오죄는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취약집단을 언어로서 공격하는 것을 규제하려는 것으로서 정신적 피해를 일으킬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11/4 한국교원대 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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