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법센터 칼럼(pi) 2011-11-29   2803

판사의 표현의 자유

사의 표현의 자유

 

법치주의 국가에서 판사의 권한은 지대하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고 모든 폭력의 행사는 적법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모든 민주국가의 기본원리이다. 예를 들어, 내가 위원으로 있으면서도 비판해마지않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문제도 인터넷게시물을 삭제토록 국가의 권위를 행사하면서 게시자에게는 그러한 삭제가 이루어진다는 통지를 해주지 않는 것은 물론 그 이유도 통지하지 않고 그 이유에 대해 반박할 기회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의 행사를 더욱 궁극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판사에 대한 공공성의 기대는 좌우를 막론하고 지대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최은배 판사의 페이스 북 글은 단순히 공직자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법관윤리의 문제이다. 다른 공직자들의 FTA반대 페북 글이 어떤 이유로 허용되더라도 판사의 FTA반대 페북 글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기준으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공공성의 요청이 판사가 자신의 사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까지 금지해야 할까?

우리는 헌법재판관 및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각 대법관 및 헌법재판관에게 엄청난 논란을 겪고 있는 사안에 대해 사적 견해를 묻고 있으며 그러한 사적 견해를 밝히지 않으면 밝히지 않는 것에 대해 임명거부사유로 거론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에게 천안함에 대한 사적견해를 거의 강제적으로 끌어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판사들이 사적 견해를 가질 수 있음을 당연시하면서 이를 표명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을까?

인사청문회에서 대법관후보자나 헌법재판관의 사적 견해를 묻는 것은 우리나라 최고법관들이 사회적 쟁점들에 대해 일정한 신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공유될 뿐만 아니라 당연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유로 미국 연방대법원은 판사후보자가 사회적 쟁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을 금지하였던 법관윤리규정에 대해 위헌을 선고하였다. Republican Party of Minnesota v. White, 536 U.S. 765 (2002) 물론 미국은 31개주가 판사를 선거로 임명하는 나라라서 우리나라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American Judicature Society, Judicial Selection in the States: Appellate and General Jurisdiction Courts (Apr. 2002) 또 위 판결은 매우 보수적인 견해를 밝혔던 판사의 선거출마에 대해 4명의 진보성향 대법관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혀 5-4로 간신히 결정이 났던 사안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의 소수의견도 판사후보자가 선거운동에 있어서 특정 이익집단의 표를 얻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선거윤리 상의 이유였을 뿐 이미 판사가 된 사람의 사적 견해 표명에 대해서는 누구도 문제삼고 있지는 않았다. 미국의 모든 주에서 명백한 것은 판사가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은 허용될 뿐만 아니라 장려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판사선거 출마자의 사회적 쟁점에 대한 견해표명을 금지하여 위 판결의 대상이 되었던 미네소타 주 마저도 이미 판사가 된 사람들이 강연등을 통해 자유로운 발언을 하는 것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장려(encourage)하고 있었다. Minn. Code of Judicial Conduct, Canon 4(B), Comment. (2002)

최은배 판사는 행정부 최고 공무원인 이명박을 ‘뼛속까지 친미’라고 비난했다. 판사를 행정직 공무원이라고 본다면 그 공무원의 행정적 비전이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사상 결정의 근거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인사상 불이익의 근거가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법관윤리의 입장에서 최은배 판사를 평가하지 않고 공직자윤리위원회에서 일반 공직자의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최은배 판사는 도리어 더 엄격하게 제재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러나 판사는 그 스스로 독립적인 기관이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사법부라는 집단의 독립성이 아니라 재판의 독립성이며 그 재판을 수행하는 개별법관의 독립성임은 최근의 신영철 사태 그리고 야간집회위헌제청사건에 대한 처리 과정에서 우리 대한민국 판사들이 뼈를 깎으며 이미 증명해보인 바 있다. 그러한 판사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판사의 직무이다. 판결문이 도대체 행정부나 입법부의 잘잘못에 대한 판사들의 견해가 아니라면 도대체 사법부의 존재가치는 무엇이란 말인가? 최은배 판사는 판결문을 통해 FTA표결절차의 부당성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한 견해를 사견임을 전제로 미리 밝히는 것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양 대법원장인 인사청문회에서 정치적 이슈에 대해 밝힌 수많은 사적 견해들은 대법원장의 결격사유라도 된다는 말인가?

우리가 말하는 “법원의 민주화”는 판사들에게 무미건조한 중립성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선거는 아닐지라도 판사들의 대중과의 자유로운 소통의 기회를 열어주면서 찾아오는 것 아닐까? 이러한 소통의 다양한 형태 중의 하나가 최근까지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실시했던 법관평가 등이라고 볼 수 있다. 판사들의 입을 막아버린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판사들을 평가할 것인가? 최근까지 미국연방대법원 보수의견의 보루였던 렌퀴스트 대법관의 말이다. “대법관이 헌법재판에 대해 ‘빈서판’이라면 이것은 중립성의 증거가 아니라 대법관으로서의 결격사유이다” Laird v. Tatum, 409 U. S. 824, 835 (1972)

박경신 고려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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