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칼럼(ip) 2011-06-27   6782

[칼럼] 정글자본주의를 위한 독재자를 기다리나?

정글자본주의를 위한 독재자를 기다리나?

: 김정호의 장하준 비판을 읽고

* 이 글은 6월 23일 사회통합위원회 주최한 함께 찾는 공정사회의 조건과 과제 제2차 세미나에서 이병천 <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강원대 경제학과 교수)이 발표한 토론문입니다. 세미나의 주제는  ‘공정한 한국경제를 위하여-<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비판과 반비판’ 이었고 이병천 공동편집인은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의 발제에 대해 토론문을 작성하였습니다.

 

 

1. 극단적 시장주의- 공정의 “공”자, “정”자도 없다

 

이 토론회에 참석하는 본인의 마음은 그리 편편치는 못하다. 왜냐하면 토론회의 주제를 <공정한 한국경제를 위하여>로 내걸고 이 무대에 장하준 교수의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주인공으로 올렸지만, 막상 <23가지>가 이 주제에 잘 맞는 책으로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장하준의 <23가지>는 둘 다 최대 베스트 셀러를 기록했으나, 샌델에 비한다면 장하준의 책은 아무래도 성장론에 더 중심이 가 있다. 또 정작 당사자인 장교수는 참석하지 않은, 주인공 없는 세미나라는 점도 걸린다. 장교수가 쓴 책 한 권을 가지고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사회통합위원회라는 곳에서 이렇게 대대적인 토론회를 열 요량이라면, 당사자가 참여하는 모임으로 하는 게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23가지>는 이미 공공재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식의 토론회도 의미는 있을 것 같다. 

내가 이 세미나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는 더 큰 이유는, 본인에게 토론을 지정해준 발제문인 김정호 원장의 글, <국가와 시장>안에 놀랍게도 공정이라는 말이 나오는 곳을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알기로는, 이 토론회는 <사회통합위원회>가 주최했고, 주제는  “공정한 한국경제를 위하여”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함께 찾는 공정사회의 조건과 과제”를 내건 제 2차 세미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국가와 시장>이라는 제목의 김정호 원장의 글에는 ‘공정‘이라는 말, 그리고 ’사회통합‘이라는 말을 한 마디도 찾아볼 수가 없다. ’공정한 경제‘, ’공정사회‘를 함께 찾자는 토론회라면 “어떤 공정이냐”, 보수적 공정이냐 진보적 공정이냐를 놓고 토론해야 마땅할 것같은데, 공정과는 아예 상관도 없는 발제문을 가지고 토론을 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김정호 원장의 글 <국가와 시장>을 읽은 후에 갖게 된 첫 생각은 왜 이렇게 극단적인 주장을 펼까하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은 공정한 경제, 공정한 사회를 함께 찾기보다는 오히려 그 정반대의 역주행 이야기가 아닌가, 다시 말해 불공정 경제․ 불공정사회라야, 그리고 사회통합이 아니라 사회가 분열 되야 오히려 성장도 잘된다는 이야기로 읽혔다. <국가와 시장>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경제적 자유, 경쟁, 개방이다. 그리고 성장이다. 여기에는 공정의 “공”자도 “정”자도 구경할 수가 없다. 이것은 <국가와 시장>의 치명적 맹점이자 특성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가 매우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국가와 시장>이 단지 공정이라는 말을 배제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국가와 시장>이 나름대로 자유시장주의의 ‘프레임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가 극단적 자유시장주의의 프레임에 입각해서 한국의 박정희 모델이나 스웨덴 복지국가의 역사를 자의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과 스웨덴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그의 해석은 사실 너무 터무니없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해석이다. 예컨대 그에 따르면 8.15이후 박정희 정권 성립까지 한국경제는 일제말 전시 동원체제와 같은 배급과 통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국가와 시장>을 관통하는 경제적 자유, 경쟁, 개방, 그리고 성장이라는 말을 배격하고, 그것들을 오로지 자유시장주의의 전유물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나의 대답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경제적 자유, 경쟁, 개방, 성장이라는 낱말을 오직 자유시장주의의 전유물로 넘겨주면, 진보는 경제적 자유, 경쟁, 개방, 성장에 반대만 하는 쪽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런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국가와 시장>이 공정이라는 말 자체를 배제, 제거한 치명적 맹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글을 해독하고 분해해 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나의 토론은 이 지점에 집중되며, 김정호가 장하준을 잘 읽었는지 잘못 읽었는지를 따지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2. 정글자본주의를 위한 독재론 ?

 

자유시장과 정치적 독재의 결합

 

미국의 저명한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J. Lakoff)의 프레임론에 따르면 모든 개념들에는 논쟁여지없는 공통 부분과 논쟁적인 부분이 교집합 모양처럼 중첩되어 있다. 따라서 논쟁적인 부분을 어떻게 채우는가에 따라 같은 말이라 해도 진보와 보수가 갈라지는 근본적으로 다른 해석, 다른 프레임이 나오게 된다. 레이코프의 이 프레임론에 따라 나는 경제적 자유,경쟁, 개방, 성장을 논쟁여지없는 부분과 논쟁적인 부분이 겹쳐 있는 말로 이해하고자 한다. 경제적 자유, 경쟁, 개방, 그리고 성장이라는 말에 대해 흔히 사람들은 사회경제 민주, 협력, 폐쇄, 그리고 분배를 대립시키기도 한다. 이 대립은 필요할 경우도 있다. 예컨대 경제자유만으로는 사회경제 민주의 공간을 확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또 달리, 개방에 대해 폐쇄를 대립시키는 것은 진보의 자충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자유, 어떤 경쟁, 어떤 개방, 어떤 성장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관심은 <국가와 시장>이 어떤 식으로 논쟁여지없는 경제적 자유,경쟁, 개방, 성장이라는 말에 새로이 무엇을 접합시켜 논쟁적인  보수적, 자유시장주의적 개념으로 구성하고 있는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제 이에 대해 살펴보자

 

1) 김정호의 글에서 경제적 자유 그리고 이른바 ‘시장의 작동’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억압, 노동 기본권에 대한 억압이라는 논쟁적 부분을 끌어들임으로써 보수적 프레임으로 전환, 재구성된다. 아래는 <국가와 시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논쟁적 부분이다. 극단적 자유시장주의의 실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어서 길게 인용한다.

 

 A. “신생독립국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가 정치적 혼란이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지금도 겪고 있는 문제가 치안부재와 내전이다. 우리나라 역시 수많은 세력들이 서로 으르렁 거리고 있었으며, 직장 내에서 조차도 노동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정상적인 법질서를 위협하는 요소가 도처에 깔려 있었다. 박정희라는 독재자는 그들의 그런 정치적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시장이 작동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집단행동과 정치논리로 점철될 수 있는 직장 내 질서를 계약에 의해서 작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직장 내에서의 정치투쟁이 아니라 생산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사람들은 박정희 시대의 그같은 상황을 노동탄압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생산현장이 정치투쟁의 장으로 바뀌는 것을 막는 조치였던 셈이다. 그로 인한 생산성의 증대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의 상승이라는 열매를 가져다 주었다. 박정희가 했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나 노동운동 탄압 같은 조치는 시장의 작동을 가능하고 경제적 자유를 확대하는 조치였던 셈이다.“

 

B.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은 어떤가. 최소한 현재의 상황을 보면 잘 절제된 민주주의 보다는 방종에 가까워 보인다. 다수결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의 현실이다. 나의 이익만 중요할 뿐 타인의 이익이나 원칙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의 범위를 늘려갈 경우 장하준 교수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정책들이 나타날 수 있을까? 그것보다는 오히려 규율과 계약은 무시되고 집단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제3세계에서 민중이 힘을 잡으면 대개 그런 일들이 나타났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박정희나 이광요, 장개석은 그런 국민들에게 정치를 못하게 하고 그 대신 규율을 요구했다. 홍콩에는 아예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 정치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개방과 시장의 확대를 추구했다. 방종을 자유와 민주로 오인하는 국민들은 그것을 독재로 받아들일 것이다. 직장 내에서의 노동조합 활동과 파업의 자유를 당연히 여기던 노동자들은 전투적 노조활동에 대한 억압을 노동탄압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런 억압들로 인해서 노동시장이 작동을 시작했다고 봐도 된다. 국민들이 별로 원하지도 않은 개방과 규율이 우리와 그들의 번영을 만들어내었다. 지금 모든 것을 국가에 맡겨 놓으면 다시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그리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장하준은 박정희 같은 선한 독재자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국가와 시장>은 시장이 작동하고 경제적 자유를 확대하려면,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노동 기본권을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것이 말하는 시장과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에 대한 억압과 노동기본권 탄압을 요구한다. <국가와 시장>은 민주주의에 대한 짙은 회의와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내가 읽기로는 <국가와 시장>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치적 독재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국가와 시장>의 자유시장주의는 정치적 독재주의와 결합되어 있는 것 같다. 마치 극단적 자유시장주의의 원조격인 하이에크가 칠레의 피노체트 철권 독재를 옹호한 것처럼 말이다. <국가와 시장>은 “장하준이 꿈꾸는 세상은 선한 독재자만이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은 도리어 김정호에게 돌려 주어야 할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와 시장>은 자유시장이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을, 뛰어나게 정치적 개념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장하준이 <23가지>에서 시장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부분은 문제가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너무 국가중심 정치로 경도되어 있는 까닭이다. 나는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들에서 이 점을 누누이 지적했다. 그러나 장하준이 <23가지> thing1에서 자유시장이 정치적 개념임을 지적한 것은 <23가지>의 백미에 해당하며, 적어도 이 부분에서 김정호는 장하준을 비판하기 이전에 그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정치에서 분리된 경제? – 고삐풀린 정글 자본주의의 방종

 

또 다른 한편으로, <국가와 시장>은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동시에 이루어내려면 정치에서 분리된 경제가 필요하다. 정치는 기본적인 틀만 제공하고 구체적인 결정은 국민 각자가 내리는 방식 말이다”.

여기서 <국가와 시장>은 다시 “정치에서 분리된 경제”를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위에서는 “시장이 작동”하고 경제적 자유를 확대하려면,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노동 기본권을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놓고, 다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동시에 이루어내려면 정치에서 분리된 경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노동자의 기본권과 다수 대중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개입해야 하고, 재벌과 부자의 자유를 위해서는 경제가 정치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둘째, 정치에서 분리된 경제, 정치는 기본적인 틀만 제공하고 구체적 결정은 국민 각자가 내리는 방식이란 게 과연 어떤 경제일까? 그리고 “국민 각자“라는 게 도대체 누굴까? <국가와 시장>은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은 어떤가. 최소한 현재의 상황을 보면 잘 절제된 민주주의 보다는 방종에 가까워 보인다“라고 말한다. 또 국민들이 ”방종을 자유와 민주로 오인“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말을 다시 <국가와 시장>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 <국가와 시장>이 주장하는 경제적 자유야말로 방종이 아닌가. 공정이라는 시장경제의 기본 가치, 공정의 기본규율을 도려낸, 정치에서 분리된 시장은 약육강식이 판치는 정글식 자본주의의 방종, 부자와 재벌이 독식 ․독차지하는 자유방종적 무책임 시장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시장>이 말하는 자유는 소수 독식자의 자유이며, 다수 서민과 노동자의 부자유 위에 꽃피는 부자와 재벌의 자유로 보인다. 여기에 만약 공정이 있다면, 야만적인 약육강식 경쟁에서 결판이 나는 승패, 그것이 곧 공정이 된다. 놀랍게도 <국가와 시장>에는 자유시장주의 또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전매 특허품인, 그 흔한 “낙수 효과” 또는 떡고물 효과“  (trickle down) 에 대한 논의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3. 시혜적 복지론 대 시민적 보편복지론

 

<국가와 시장>의 복지론은 자유방종 정글시장론이라는 동전의 뒤쪽면에 해당한다. <국가와 시장>은 복지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복지의 철학은 어디까지나 자선에 바탕을 두어야 하고 최빈층의 구제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와 시장>의 복지론은 마지못해 해야 하는 시혜적, 잔여적 복지론으로서, ‘복지의 위험’을 최우선으로 걱정한다. “ 복지제도의 가장 큰 위험은 사람들이 일할 의지를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주장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복지문제에는 여러 논점들이 중첩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수준에서 시혜적 복지론과 다투어야 한다.

 
먼저,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 문제가 있다. 신종원은 김정호의 글을 비판하는 <공정한 한국경제를 위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업들은 정부의 ‘불평등한’ 대우, 즉 사전적이고 장기적인 정책 특혜로써 막대한 이익을 입었고 이를 뒷마당에 묻어둔 채 독식하고 있는 반면, 정부로부터 (전혀 성격이 다른) ‘불평등한’ 대우를 받은 국민들은 정반대의 손실과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 지원에 편승하여 확보된 잉여 중 일부, 즉 기업들이 얻은 추가 잉여는 사실상 정부가 재벌 기업에 제공한 ‘지대’나 다름없는바, 이를 회수하여 재분배하는 것은 … 시장주의로만 따지더라도 ‘정의’가 된다”. 이는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는 이야기다. 즉 <국가와 시장>의 자선 복지론은 국가복지가 1차적 시장불공정 또는 공정기준에서 엄청난 시장실패에 대한  2차적 시정조치, 사후 보상 조치라는 점을 보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선 복지론은 자유방종 정글 시장에서 자행된 불공정에 대해 기본 보상 책임조차 감당하지 않으려 하는 무책임 복지, 천민적 복지론이다.

 
둘째, 한국과 같이 기막힌 시장불공정 상황이 아니라 해도 공정한 기회, 경제적 ․사회적 기회 보장이라는 가치기준에서도 보편적 복지를 추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장하준은 기회의 균등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며 일정 수준 이상 결과의 균등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바 있다. 그는 형식적 기회 균등을 넘어 실질적인 기회 균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이 지적은 적절하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두가지를 더 논의해야 한다. 먼저, 한 사회의 불평등 구조는 설사 출발선상에서 실질적 기회가 보장된다고 해도 이후 과정에서 부단히 불공정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다. 따라서 실질적 공정경제, 공정사회를 위해서는 그런 과정적 불공정을 시정하는 일정한, 결과적 균등 조치가 늘 동반되어야 한다. 우리는 결과의 균등이란 말을 이런 의미로 풀이한다. 그 다음에, 불공정 경쟁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설사 공정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반독점 자유경쟁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시장의 주체가 기업이고 기업도 사람과 똑같은 헌법적 권리를 갖게 된 법인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에 대해 비용을 최소화해야 할 ‘자원’으로, ‘인적 생산요소’로 취급하게 된다. 공정 경쟁을 지향한다 해도 ‘보수적 공정’론은 노동=자원의 사고틀안에 있다. 나는 많은 중도적 공정경쟁론 조차도 이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본가의 담합과 노동자의 담합을 똑같이 취급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진보적 공정론은 노동=주체의 프레임, 노동자가 곧 존엄한 인간이며 시민적 주체라는 사고에 선다. 당연히 노동자의 경제적, 정치적 단결과 연대를 옹호한다.

셋째, 김정호는 “생산적 복지”조차도 부정한다. 그는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복지가 필요하다는  장하준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생산적 복지라는 말도 상당 부분 립서비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복지를 “생산적 복지“로 제한하는 것은 물론 문제다. 그렇지만 복지는 얼마든지 생산적일 수 있고, 역사적으로도 성공적인 복지체제는 그랬다. 사실 “생산적 복지”론은 보편적 복지를 거부하는 박세일 같은 중도 보수주의자도 주장하는 견해인데( 그의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을 보라), 이것조차 부정하는 것을 보면 김정호의 복지론은 정말 극단적 정글시장론이 아닐 수 없다.

넷째, 레이코프의 가치 프레임에 의하면 ,<국가와 시장>의 복지론은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을 따르고 있다. 그 키워드는 “규율“ 그리고 ”방종“이라는 말이다. 일하지 않으려고 꾀나 부리는 국민 대중들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 엄격한 아버지, 지도자 그리고 기업주가 부과하는 규율에 복종해야  한다. 복종하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한다. 레이코프는 이와 정반대로 자애로운 부모가정 모형을 대비시킨다. 이 모형에서는 각 개인은 자신의 좋은 삶, 좋은 존재양식을 위한 동등한 실질적 자유와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보살피고 그들에 감정이입(empathy)한다. 여기서 각인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에 상호의존적이다. 나는 자애로운 부모 가정 모형을 지지한다. 보편복지론은 무책임한 방종적 자유, 로빈슨 크루스식 고립된 자유가  아니라, 함께 하는 사회적 자유, 책임있는 자유, 공정과 함께 하는 연대의 가치를 추구한다.

마지막으로,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일 수 있는데, 나는 보편복지와 참여민주주의의 선순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보편복지는 복지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공정하고 평등한 참여의 기회,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참여의 보장이라는 점에서 필수재다.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면서도 똑같은 인간은 아니며 따라서 실적에 따른 일정한 경제적 불평등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우리는 설사 부와 소득에서 불평등한 조건에 놓인다 해도 동등한 인간과 동등한 시민으로서 동등한 존엄성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보장받아야 하며 그 목적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너와 내가 서로에게 동등한 인간으로서, 동등한 시민적 동료로서 서도록 하기 위해,  그러한 동료로서 더불어 사는 시민공동체를, ‘모두의 나라‘를 가꾸어 가기 위해 불평등을 일정 범위 내로 통제해야 하고, 경제적 불평등과 독점이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과 사회정치적 ’지배‘로 전환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돈이란 어디까지나 수단가치다. 좋은 인간, 좋은 시민, 좋은 삶, 인간으로서의 유적, 존재적 가능성을 실현하는 행복, 그리고 좋은 공동체가 바로 목적가치다.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우리들이 보편 복지, 보편적 ’안전망‘을 추구하는 참된 의미는 바로 이렇게 좋은 개인적 삶을 추구하는 인간 능력의 신장(human empowerment), 좋은 시민적 삶을 추구하는 시민적 능력의 증진(civic empowerment) 그리고 개인적,시민적인 좋은 삶의 추구와 좋은 나라가 선순환하고 상생하는 “활사활공”(活私活公)에  있다고 해야 한다. 보편복지는 참여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는 물질적 기초다. 또 국민 대중의 참여민주주의, 참여정치의 기초없이는, 아래로부터 시민 권력의 기반없이는  보편복지는 말의 성찬으로, 기껏해야 위로부터 던져 주는 시혜적 조치로 끝날 위험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편복지없는 참여민주없고 참여민주없는 보편복지 없다. 나는 이를 정의와 연대가 선순환하는 시민적 보편복지론이라 말하고자 한다. 이 부분은 장하준의 <23가지>는 물론이고 현재 대한민국 복지 논쟁 전반에도 부족한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4. ‘극우’적 시장독재는 열린 시장, 열린 민주주의의 적이다

 

나는 <국가와 시장>의 논의가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김정호의 다른 글을 찾아 보게 됐다. 그런 끝에 최근 그가 월간 조선에 기고한 글을 읽었다. 그기서 김원장은 스스로 자신을 ‘극우(極右)’ 인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말만 화려하고 표류하고 있는 현 정부의 ‘중도실용(中道實用)’, ‘친(親)서민’ 정책조차 “한국이 사회주의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라는 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김정호, “MB, 한국경제의 사회주의化 시작? ”,<월간 조선>, 2011/6).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국가와 시장>의 논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좀처럼 보지 못한채 ‘극우’라는 어두컴컴한 구석에 자리잡은 김원장의 눈에는 모든 견해와 정책들은 극우와 극좌 둘로 나누어 지고, 극우가 아닌 것은 모두 불순한 것,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그들”도 우리도 똑같이 자유와 시장을 말한다. 그러나 그 자유, 그 시장은 같은 자유, 같은 시장이 아니다. <국가와 시장>은 고삐풀린, 야만적이고 무책임한 약육강식 정글식 자유시장을 옹호한다. 나는 고삐잡은( disciplined) 공정한 시장경제, 이해당사자가 공정한 참여의 기회를 갖고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감수하는, 더불어 사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옹호한다. 이명박 정부가 추구한, 부자를 더 부자되게 하고 서민대중은 거지처럼 그 떡고물이나 얻어 먹게 하고자 한 MB노믹스 전략은 “떡고물 효과”조차 낳지 못한 끝에, 내실은 빈약한 ‘중도 실용’, ‘친서민’, 심지어 ‘동반 성장’이라는 말까지 내세울 지경으로 몰렸다. 그런데 <국가와 시장>은 이를 두고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고 몰아 세운다. 어쩔 셈으로 그러는가. <국가와 시장>은 자기 이념안에 갇힌 나머지 현정부의 ‘실용주의’보다 더 시대 흐름에서 밀려 났다. 불행하게도 <국가와 시장>은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같다. 그것이 꿈꾸는 세상은 한국에서 꽃피기 어려울 것이다.

 
<국가와 시장>은 자유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추구하는 자유는 소수 특권 기득권집단의 특권적 자유, 무책임한 방종적 자유, 천민적 자유, 나쁜 자유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는 공동의 자유, 시민대중의 자유, 책임있는 자유,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는 자유, 사회통합적 자유, 좋은 자유이다. 나쁜 자유는 좋은 자유에 대한 위협이다. 그것은 자기 파괴적인 자유, 공멸의 자유이다. <국가와 시장>에서 김정호가 추구한 극우적 시장독재는 열린 시장의 적, 열린 시민민주주의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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