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칼럼(ip) 2012-05-11   2232

[기고] ‘미션 임파서블’? 통합진보당을 점령하라

‘미션 임파서블’? 통합진보당을 점령하라
: ‘선거 부정’ 사태 이후를 고민하자

 

장은주 영산대 교수

 

지금 통합진보당 사태가 이 나라 온 언론과 SNS를 도배하고 있다. 온갖 종류의 이야기들이 난무한다. 그 원인 진단에서부터 해법 제시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많은 소리들이 쏟아지고 있다. 커다란 실망감의 토로에서부터 이른바 당권파의 이야기도 들어 봐주자는 동정 표시에 이르기까지 태도도 다양하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우리 사회의 진보적 발전 노정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지에 대해서는 아직 별 다른 토론이 없다. 어쨌든 당권파는 구태를 청산하고 반성해야 하며 통합진보당은 정치적 속죄를 통해 구원받아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최선의 경우에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진보는 깊은 상흔을 털어 낼 길이 없어 보인다는 게 진짜 문제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고 책임만 묻는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대선이 문제다. 그렇지 않아도 4.11 총선의 역사적 패배 때문에 이른바 ‘2013 체제’에 대한 꿈이 반쯤은 날아가 버린 상태인데, 야권연대의 한 쪽이 처절한 국민적 불신의 대상이 되었으니 그 나머지 반의 반도 찢겨진 셈이다. 우리는 이제 또 다른 보수 정권 5년을 감내할 준비를 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더 심각하다. 만약 지금 이대로 통합진보당이 주저앉아 버리면, 그 5년이 10년이 되고 20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난 총선 전후로도 확인했듯이 민주통합당과 거기에 결합해 있는 정치세력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데, 그들을 올바르게 견인하고 좀 더 폭넓고 튼튼한 반-보수 연합정치를 추동할 수 있는 제대로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당 하나 없는 상태에서, 도대체 무슨 수로 정권교체를 이루고 복지국가를 실현하고 한단 말인가? 나는 비록 민주통합당이 지금이라도 올바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대로, 그런 변화의 조짐은 조금도 보이질 않는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통합진보당을 살려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는 지금, 문제를 다시금 적당히 봉합한 뒤, 이 당을 그대로 안고 갈 수는 없다. 그 길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이제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통합진보당의 환골탈태,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이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라는 것, 그 길을 가는 게 사실상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것, 바로 이것이 지금 많은 시민들을 지독하고 긴 ‘멘붕’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진짜 문제다. 무엇보다도 다음 두 가지의 치명적인 난제가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해법을 찾아야 한다.

 

우선, 이른바 당권파를 포함한 (구)민주노동당계 일반의 정치적 세계관에 얽힌 문제다. 여러 차례 ‘친북’ 또는 ‘종북주의’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그 세계관 말이다. 악의적인 보수 언론의 프레임이긴 하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많은 시민들에게 진보와 친북은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낳은 당권파의 패권주의도 이 세계관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해 내지 않고는 진보 정치가 앞으로 나아가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그 다음도 문제다. 자주파 NL 세력이 진보 정치를 망쳤으니 이제 평등파 PD 세력이 나서면 된다는 식의 손쉬운 해법은 없다. 그런 일은 물리적으로도 가능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PD세력이라고 나을 게 없다. 그 세력의 다수는 지난 번 통합진보당 결성 과정에서 자유주의자들과는 결코 함께 진보 정당을 할 수 없다며 합류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고, 그들의 진보신당은 유권자들의 외면으로 소멸하고 말았다. 그렇다. 한심하게도 이제 쪽박을 찬 그들 중 어떤 이들은 NL 세력이 진보정당을 자유주의자들에게 헌납하게 생겼다고 혀를 차고 있지만, 이제 진보와 자유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부터 다시 따져 보며 정말 근본적인 수준에서 진보 정치의 정체성을 새로이 제대로 고민해 보아야 한다. 누군가는 ‘역사의 간지’라 했지만, 재밌게도 지금 NL 세력이 ‘통일전선’의 상대로 생각해서 불러 들였던 자유주의자들이 단호한 결기로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형국이 벌어지고 있다. NL 세력의 (희망하고 예견된) 몰락은 그 자유주의자들이 PD 세력에게 주는 선물이 될 수 있을까? 진보 정치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먼저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정치적 세계관과 패권주의 문제를 보자. 지금 문제는 그 당권파를 단순히 ‘척결’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개탄한 대로 그들의 이념 지향은 정말 시대착오적일 정도로 낡았고 불투명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악’의 상징인 북한과 연결된 그들의 정치적 정체성과 거기서 비롯된 정치적 생존에 대한 강박이 패권주의도 낳았고 이번 사태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를 무슨 ‘국가보안법’의 프레임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접근은 ‘민주주의 원칙’과 ‘사상의 자유’라는 프레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NL 세력의 정치적 세계관을 단순히 북한하고만 연결시켜 이해하지 말고 좀 더 거시적으로, 말하자면 세계사적인 지평 속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식민지나 외세의 침탈을 경험했던 제 3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좌파 운동은 자주 민족주의와 결합하곤 했다. 심지어는 일본의 공산당조차도 최근까지 일본이 미국의 반(半)-식민 상태에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NL 세력의 정치적 지향도 이런 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우리는 그들을, 단순히 무슨 사이비 종교에 사로잡힌 광신자들로서가 아니라, 외세의 부당한 지배로부터 벗어난 자율적인 정치공동체에 대한 나름의 정의로운 지향을 가진 ‘좌파 민족주의자들’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진보 정치의 발전 과정에서 적지 않은 역할도 했다.

 

물론 나로서는 그 좌파-민족주의적 이념이 형편없이 낡고 틀렸다고 보지만, 여기서 그것의 옳고 그름을 세세하게 따질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들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살아가고 정치도 하게끔 내버려 두어야 한다. 사상의 자유는 단순한 사상의 다원성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아주 극단적으로 이단적인 사상에 대한 관용과 포용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만약 그들이 민주공화국의 근본 틀과 원칙 그 자체를 폭력적으로 훼손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정치적 자유는 넘치다 싶을 정도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게 민주주의다. 그리고 사실 국가보안법적 논리가 아니라 바로 이 민주주의 원칙만이 우리가 그들을 비판할 때 의거하는 참된 준거여야 하고, 또 그것만이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그들의 문제는 단순히 그들의 사상이 아니라 그들의 비민주적인 행태와 습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은 그들이 진정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덕적-정치적으로 압박하는 것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통합진보당의 민주적 재구성’을 통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물론 통합진보당은 지금 ‘진성당원제’를 채택하고 있고, 당권파를 포함한 범NL 세력이 과반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 민주적 재구성이 어떻게 가능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다수결주의 없는 민주주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성당원제가 참된 난관은 아니다. 통합진보당원들은 그것이 통합진보당의 민주성과 진보성을 상징한다고 자랑스러워 하지만, 우리는 진성당원제의 민주성에 대해서부터 제대로 의문을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 통합진보당은 당비로만 운영되지 않는다. 통합진보당은 일반 국민들이 낸 세금에서 나온 막대한 국고보조금으로도 운영된다. 그것은 그 당이 획득했던 대중적 지지의 결과다. 그렇다면 그 당의 의사결정을 오로지 당원들에게만 맡기겠다는 것이 정말 민주적인지는 심각하게 의심스럽다. 시민적-민주적 견제와 감시가 수용될 통로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전체 국가 차원의 민주주의라는 더 큰 틀에서 보면 심각하게 비민주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번에 그 당내 민주주의마저 제대로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는가? 통합진보당이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하고 지지자들의 뜻에 제대로 반응하도록 요구하는 광범위한 시민적 압력, 이 정당한 압력을 더 거세게 가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시민들이 통합진보당에 실망해서 등을 돌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정을 갖고 더 강한 감시를 해야 하는 이유이며, 또 그것이야말로 통합진보당의 민주적 재구성을 위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문제에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좀 더 실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어쨌든 이 진성당원제를 아예 부정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다음 수순은 하나다. 통합진보당의 민주적 재구성은 통합진보당 내 ‘다수파의 재구성’을 통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가능할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의 진보적 발전을 바라는 이들이 대거 통합진보당에 입당을 해 버리면 어떨까 싶다. 우선, NL 세력의 패권주의가 싫다며 당을 떠났던 (구)진보신당원들이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 그 밖에 우리 사회의 진보적 발전을 추구하는 사회단체나 운동 조직들이 가능한 대로 통합진보당으로 합류하는 것도 괜찮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민주적-진보적 발전을 간절하게 염원하고 통합진보당을 지지했던 보통 시민들이 많이들 나서 통합진보당 당원이 되면 어떨까 싶다. 진성당원제가 통합진보당의 근간이라 하니 그 안에서 진보적 시민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면, 통합진보당의 환골탈태는 그 진정한 물질적 토대를 갖추게 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시민정치’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통합진보당 점령 운동 정도로 이 과제를 설정해 두자. 물론 이 운동의 참된 목표는 무슨 패권 추구가 아니라 통합진보당이 민주성과 진보성을 제대로 확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내가 위에서 제기했던 두 번째 문제가 심각한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 아마도 (구)진보신당원들은 통합진보당 입당을 완고하게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NL 세력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들과 진보적 시민들이 걸림돌이라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들 때문에 진보 정치에서 ‘노동’이 사라져 버릴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통합진보당은 진정한 진보 정당이기를 멈추고 민주통합당과 별반 다를 게 없어져 버린다는 투의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진보 정치에 대한 이런 이해 역시 매우 낡고 또 심지어 <보수적>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자세히 논의할 수는 없지만, 내 생각에 진보정치를 노동하고만 연결시킨다거나 ‘보수-자유-진보’라는 정립 지형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진보적-실천적 과제 해결과는 무관한 지독한 도그마일 뿐이다(관련기사 보기). 이번에 통합진보당 내부의 환부가 이런 식으로라도 드러나고 시민적 압력을 통해 그 환부의 실질적 제거라는 전망이 얼마간이나마 현실이 된 데에는 그 PD 세력이 경원시하는 자유주의자들의 공이 컸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이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적 정의의 이념과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며,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진보성은 명백하다. 그리고 사실 그런 차원의 진보성의 실현은 (구)진보신당의 PD 세력이 결과적으로 과거에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한 일이다. 그들은 이번 사태에서 반면교사의 형식으로나마 바로 이점에 대한 처절한 자기반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진보정치가 노동 없이도 가능하다는 투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진보 정치를 모든 종류의 부당한 억압과 지배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추구라는 차원에서 이해했을 때, 노동자 계급이라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포괄 없이 진보 정치가 가능할 리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대기업 정규직 노조 중심의 우리 노동운동이 바로 그 점에서 얼마나 진정으로 진보적인지는 전혀 불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이 땅의 모든 노동자는 또한 동시에, 아니 노동자이기 이전에,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시민’임을 잊지 말자.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노동자계급을 중심에 두는 고루한 역사철학에 사로잡혀 있지 않기로 한다면, 노동 운동이 추구하는 대의의 정당성은 근본적으로 <모든> 시민이 ‘존엄의 평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포괄적 시민성의 원칙에 있을 수밖에 없다. ‘노동 대 시민’의 이분법은 원천적으로 틀렸다.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는 동시에 시민적이기를 거부하거나 시민적으로 되는 데 실패하는 노동 운동은 제대로 전진할 수 없다.

 

물론 나는 여기서 하는 이런 정도의 이야기로 그들을 제대로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곤 믿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으로 노동 운동에 뿌리를 둔 진보 정당 운동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 보자는 투의 태도는 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진보 정당 운동이 지금 여기까지 오는 데도 거의 30년이 걸렸다. 진보정치에 무슨 백마 탄 왕자라도 나타나기를 기다리자는 건가?

 

어쨌든 지금 모두가 진보 정치의 올바른 정체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할 것 같다. 민주-진보 진영 전체가 맞고 있는 지금의 이 혹독한 위기 상황을 하루 빨리 극복해야 한다. 자칫 우리 사회의 참된 진보적 발전이 아주 나중으로 미루어지거나 아예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그 위기의 극복은 진보 정치를 이해하는 우리의 정치적 사유 습성과 행태에 대한 전면적 쇄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단순한 당위가 아니라 지상 명령이다. 낡은 틀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시민과 함께 하는 진보 정치가 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수많은 시민들이 통합진보당으로 몰려가서 그 당을 완전히 새로운 시민적 진보 정당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 당을 허깨비 같은 NL적 의제 같은 것에 매달리는 정당이 아니라 시민들과 더불어 일구어내는 민주적 축제 속에서 인권과 민생-복지 같은 참으로 진보적인 의제들의 해결을 최우선의 정치적 과제로 삼는 그런 정당으로 탈바꿈시켜 낼 수 있다면, 이번의 위기는 그야말로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정말 하루빨리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면, 사그라져 가는 평화복지국가의 비전도 새롭게 다시 살려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가 진보 정치의 참된 민주적 메타모포시스가 이루어지는 긴 과정의 소란스러운 통과의례 정도로 마무리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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