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칼럼(ip) 2011-01-14   5366

[칼럼] 장하준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➀

진보 경제학, 시민과 만나다.


새해를 맞아 장하준 교수의 새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말한다>와 함께, 장교수의 <23 가지>가  2010년 대한민국 최고 베스트 셀러라는 소식은 진작 들어 알고 있었다. 이 흥겨운 소식은 새해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 동안 발등에 떨어진 불 때문에 미처 이 책을 읽을 시간을 갖지 못했다. 새해 들어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고 <23가지>를 읽게 됐다. 경제학으로 밥을 먹고 산다면서 일반 독자들보다 형편없이 후진 부대로 쳐졌으니 많이 미안하다. <23가지>를 읽어 보니 과연, 왜 이 책이 독자들로부터 그토록 큰 반향을 얻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무엇보다 딱딱한 경제학 책인데도 너무 쉽고 재미가 있다. 장교수는 이전 책들에서도 대중에 다가가는 글쓰기로 뛰어난 문필력을 보여 왔지만 이번 책은 정말 대단하다. 그동안 ‘경제학 콘서트’라는 문패를 단 이런 저런 책들이 많이 나왔는데, <23 가지>야말로 명실상부한 경제학 콘서트, 그것도 고급 콘서트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같다.  내 머리로는 기껏 5~ 6 개 정도 뽑아 낼 수 있을까 싶은데 무려 23가지 주제를 뽑아내서, 삭막하고 결코 쉽지 않은 우리 시대 최대 경제 및 경제학의 문제를 너무 쉽고 재미있게 풀어 냈다.

둘째,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의 의미와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23가지야 말로 이 문제에 대해 시의적절하게 잘 응답했다고 생각된다. 만신창이가 된 오늘의 세계경제문제와 그것이 경제학에 주는 교훈을 이처럼 쉽고,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고급, 명품 지식을 담아 제공하고 있는 책은, 국내외를 통틀어 결코 흔치 않다. 

셋째, 단순 분류법으로 말하자면 23가지는 보수 경제학이 아니라 진보 경제학 책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한 세대를 풍미한 자유시장주의가 성장도 복지도 모두 실패했음을 비판하고 성장과 복지를 함께 이룰 수 있는 복지국가의 진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3가지는 장교수의 이전 책과 비교해도 중요한 변화를  보여 준다. 예컨대 이전에 쓴 <사다리 걷어차기>나 신장섭교수와 함께 쓴 <주식회사의 한국의 구조조정>과 같은 책들은 주로 성장 중심론이었고, 자유시장주의와 개발주의를 대비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사실 내가 읽기로는 재벌과 외국자본을 이항대립으로 놓는 논법 등 보수쪽 주장과 중첩되는 내용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에 대한 필자 서평 참조. <서평문화>, 2004 겨울, 제 56집). 그런데 이번 책은 성장, 복지 나아가 공정의 가치까지 함께 언급하면서 복지국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박정희 개발국가 모델의 성과를 칭송하는 사람들중에는 개발연대이후 시기가 되면 자유시장주의로 변하거나 여전히 재벌체제 장점만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하는 논자들이 대다수다. 이와 달리 장교수는 복지국가에 깃발을 꽂고 있다. 이는 흔치 않은 경우다. 한국의 진보와 진보경제학으로서는 큰 우군을 얻은 반면, 보수와 보수경제학으로는 큰 적수를 만난 셈이다. 이곳 저곳에서 장하준에 대한 보수적 비판이 개시되고 있음을 보는데 이는 그만큼 이번 책이 이전 책과는 흐름이 다름을 반증한다.

나는 물어 본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비롯한 번역서는 빼고, 지금까지 한국 경제학의 역사상  <23가지> 만큼 많이 팔린 진보경제학 책이 이전에 있었던가. 아니, 진보와 보수를 통틀어 이 정도로 시민 대중의 큰 호응을 얻은 책이 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23가지>의 성공은 결코 보통 성공이 아니다. 저자는   ‘경제시민’의 권리 증진을 위해 , 자유시장주의를 넘어서는 경제학의 시민적 계몽을 위해 <23가지>를 썼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목표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음이 분명하다. 비록 늦었지만 큰 박수를 보낸다. 나의 이 박수는 저자에게 보내는 박수일 뿐 아니라, 한국의 진보경제학이 시민 대중과의 만남에 성공한 것에 대해 보내는 박수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단지 박수만 치고 만다면 이는 경제학으로 밥먹고 사는 내 몫을 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또 하나의 이유는<23가지>에 대해 몇마디 보태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를 통해 한국의 진보경제학이 시민과 더 나은 만남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다.


2. 시장과 정치 – 어떤 시장, 어떤 정치인가


장하준의 이번 책이 유례없이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더 나은 대안 자본주의로 갈 수 있음을 23가지로 요점 정리해서 잘 보여준 데 있지만, 가지  수가 많다고 해서 늘 좋은 것은 아니다. 확실히 23가지는 한결같이 알찬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나는  23 가지가 나열되어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  <23가지>의 많은 가지들을 펼치게 하는 중심 생각, 생각의 기둥과 주춧돌은 어떤 것인지에 관심을 갖는다. 날더러 이 책의 things 23을 관통하는 중심 생각을 한 가지만 집어 보라고 한다면 맨머리 부분, thing 1을 선택하겠다.

thing 1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장은 자유로워야 한다. 정부가 개입하면 자원이 적재적소에 쓰이지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해 장하준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모든 시장에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칙과 한계가 있다. 자유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규제가 있는가. 장하준은 시장에서 무엇을 사고 팔수 있는지, 누가 참여할 수 있는지, 거래와 관련된 조건은 어떤 것인지,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지 등등, 이 모두에 규제가 있다고 설명한다. 나는 자유시장이 정치적으로 정의된다고 들고 나온 장하준의 비판이야말로 자유시장주의에 대한 정문의 일격이며, 거의 강령적 수준의 대항 포지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thing1의 논의가 미흡하다고 느낀다.


첫째, 공방이 좀 엇갈린 것 같다. “그들”은 정부개입이 자유시장의 효율성을 해친다고 주장하는데, 장하준은 이를 반박하는게 아니라 자유시장이라 해도 그기에는 모종의 규제가 있어서 알고 보면 자유시장이 아니라 규제된 시장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건 자유시장 효율성론에 대한 논박은 아니다. “그들”은 장하준의 말을 상당 부분 수용하면서 “규제된 자유시장”이 “규제된 비자유시장”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토론은 엇나갔다. 뿐만 아니라 신고전파경제학이 시장 “효율성 독재”론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자유시장주의를 효율성론에 한정하는 것은 좀 일면적이다. 마이클 샌델의 책과 강의를 들어봐도 알지만,자유시장이 자유와 정의를 보장한다는 주장이 있다. 또 자유시장이 가치중립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모두를 다루면서 광의의 “시장실패“론을 구성해야 한다. 따라서 토론은 여전히 열려 있다.

둘째, 장하준이 말하는 규제에는 여러 것들이 뒤섞여 있다. 그렇지만 그 상이한 규제들의 성격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시장의 경계를 객관적,과학적으로 규정할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문제, 즉 왜 규제가 필요한가 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버드대학의 대니 로드릭(D.Rodrick)같은 사람은 시장을 창조하는 일, 규제하는 일, 안정화하는 일, 정당화하는 일 등을 구분한다. 그래서 이런 일들을 위해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고 비시장적 제도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로드릭, “지속가능한 세계화를 위하여”, <시민과 세계>,9호,2006).  내게는 이 설명이 훨씬 명료하게 들린다. 로드릭이 말하는 규제에는 장하준과 달리 반독점규제가 들어 있는 부분도 빠트릴 수 없다. 이 문제는 특히 ‘삼성공화국’과 마주하고 있는 한국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로드릭 이전에 칼 폴라니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는  다름아니라 자유시장이 인간 살람살이의 실체적 터전인 노동,토지,화폐를 무리하게 허구적 상품으로 전락시켰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자기 조절 능력이 없다고, 지속불가능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또 자유시장에 내장된 이런 근본 모순 때문에 시장화에 대한 사회의 보호적 대항운동, 그리하여 이중운동의 역사가 전개된다고 갈파했다. 또 자유시장(주의)의 허구성에는 폴라니 문제과 함께 잘 아다시피 마르크스 문제가 있다. 장하준은 thing1의 마지막에 가서야 “시장은 1달러당 1표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 그래서 규제철폐의 주장인즉 “돈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자는 의미”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시장에서는 돈이 말하고 지배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먹”이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이런 정도로 언급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중요하다. “자유”시장이 실질적으로는 “부자유”한 자본권력시스템, 기업권력 시스템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자유시장이란 것은 없다”의 근본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장하준이 제창하는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은 자유시장에 대한 이 폴라니, 마르크스 문제를 그 핵심 구조안에 가져와야 할 것이다.


3. “경제시민”은 “시민경제”를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장하준은 23가지의 머리부분에서 시장이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라는 정말 중요한 주장을 잘 내 세웠지만, 이 때 정치를, 국가를 너무 규제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라는 것, 국가의 할 일을 규제 중심으로, 달리 말해 무엇을 제한하는 소극적 역할 중심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나 국가의 할 일은 규제 훨씬 이상이다. 또 정치란 국가의 할 일 훨씬 이상이다. 국가는 아무래도 위로부터 통치와 직결되지만 정치란 아래로부터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여러 분면을 갖고 있으나 필자 더러 말하라면 정치의 근본은 공동체다. 정치란 무엇보다 참여하고 구성하는 것, 공동체를 구성하고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자로서 열려 있는 너와 나를 “우리”로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이해당사자 구성원들에게 주권자로서 명실상부한 참여의 지분(stake, part)을 쥐어주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삐풀린 월가 금융권력도, 재벌권력도, 강남 부자도 비용은 사회적으로 전가하면서 이익은 독차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시민적 구성원으로서 응분의 책임을 갖고 헌신하고 그런 조건부로 권리도 행사케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사익 특권세력에 대해 민주적이고 시민적인 통제력 또는 규율력을 확보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는 구성하는 것이지만 사익 지배세력을 규율할수 있는 힘과 권력없는 구성의 정치란 없다. 그런 구도속에서 구성원들이 더불어 협력하고 “공동의 부”(commonwealth)를 창조하고, 공동선과 개인성, 개인적 자유와 공적 연대가 선순환하는 것, 이것이 정치이고 능동적이고 생동하는 정치의 활력이다.

그런데 강조해야 할 것은 이렇게 공동의 부를 창조하고 공유하는 정치, 즉 ‘활사활공’(活私活公)의 시민정치가 결코 경제바깥에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순수한 경제란 없고 바로 경제안에 정치가 들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해하는 “시민경제”다. 단지 소극적으로 자유시장은 객관적,과학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멈출 것이 아니라, 참여하고 협력하고 창조하고 공유하고 연대하는 정치를 내장한 “시민경제”론을 구성할때  비로소 로빈슨 크루소적 경제인(호모 에코노미쿠스)과 무한 경쟁의 허구적 경제학, “합리적 바보“(A. Sen)의 자유시장 경제학- 캠퍼스를 제국주의적으로 휩쓰는 <맨큐의 경제학>도 여기에 포함된다-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경제시민의 권리 증진은 시민경제론을 필요로 한다.


이병천|강원대 교수·경제학/<시민과 세계> 공동 편집인


* 이 글은 프레시안 1월 11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이병천 교수는 참여사회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시민과 세계>의 공동편집인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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