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칼럼(ip) 2011-07-07   2891

[칼럼] 한국사회, 야만이냐 문명이냐

모든 사회는 그 사회의 제도, 조직, 일상에서 작동하는 나름의 중심 원리를 갖고 있다. 어떤 사회는 공존과 연대의 가치 위에 세워져 있고, 어떤 사회는 공정한 경쟁과 기회를 중시하며, 어떤 사회에선 힘 있는 자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하버마스는 이를 사회의 ‘제도적 조직원리’, ‘이념적 조직원리’라고 불렀다. 한 사회의 조직원리는 그 사회의 문명적 수준과 도덕적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1932년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히틀러와 나치당은 민주시민과 노동조합, 진보정당을 탄압하며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1차 대전 패망, 인플레와 경제침체로 고통 받던 많은 독일인들은 나치 치하의 경제성장과 영토확장에 열광했다. 반인륜적 폭력에 동참한 보상으로 폭스바겐을 타고 아우토반을 달렸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의 충격으로 독일경제 역시 심각한 마이너스 성장을 겪었다. 이때 독일사회의 반응은 1930년대의 그것과 대조된다.

 
경제위기를 맞아 독일정부는 조업단축 기업에 임금의 약 3분의 2를 정부가 지급하는 고용·소득 보장 제도를 강화했다. 수십만명이 해고를 면했다. 독일정부는 또한 경제난이 심화돼도 저개발국에 대한 지원금을 삭감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독일 언론은 기업이익, 국가이익을 들어 이를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제위기가 사회해체와 나치즘으로 이어졌던 과거의 경험을 경계했다. 독일사회의 문명적 진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사회의 중심 원리는 ‘힘’과 ‘돈’이었다. 정권을 쥔 세력은 국가기관을 사유화하여 반대자들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데 남용했다. 기업은 정부로부터 온갖 특혜를 받으며 초법적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은 서슬 퍼런 공권력에 짓밟혔다. 이런 부조리와 폭력, 타인의 고통에 침묵하고 직장과 가정에 전념한 사람들에겐 그 대가로 ‘산업화의 열매’를 조금씩 나눠줬다. 인륜이 없는, 야만의 사회다.

 

그동안 한국은 기업경제와 과학기술 등 여러 측면에서 놀라운 비약을 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여전히 야만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최근 벌어진 많은 일들이 그러하다. 지난 6월22일, 유성기업 아산공장에선 직장폐쇄 철회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용역경비원들이 쇠파이프, 각목, 소화기를 휘두르며 폭력을 행사했다. 노동자들이 머리가 찢어지고 광대뼈가 함몰되는 등 중상을 입었다. 25일, 홍익대학교는 정리해고 항의 농성에 참여한 청소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무려 2억80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27일, 한진중공업에선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시위 중이던 노동자들이 법원의 강제집행으로 사지를 들린 채 끌려나왔다. 다음 날로 예정됐던 국회청문회는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의 출석 거부와 한나라당의 전원 불출석으로 무산됐다. 30일, 최저임금위원회는 물가상승률에도 한참 못 미치는 시급 인상률을 고집한 경총안에 발목이 묶여 법정시한을 넘기고 파행을 맞았다. 공익위원들은 내내 무력하고 무원칙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이런 최근 사태들은 기륭전자, KTX, 이랜드,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등 지난 몇 년 간의 노동현장 사건들과 그 본질이 같다. 국가권력과 기업권력이 하나가 되어 국민의 존엄성 위에 군림하는 한국사회의 야만성 말이다. ‘20 대 80 사회’라고들 한다. 여기서 80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는 경쟁이지만, 20을 지켜주는 원리는 야만이다. 국민들은 서로 상처를 입히며 무한경쟁 하도록 강요받는데, 기득권 집단은 악법·탈법·초법의 힘으로 자기 이익을 지킨다. 그 장벽에 도전하는 순간, 야만의 규칙이 발동된다.

 

현실이 이러하건만, 정부·여당은 작금의 모든 사태에 대해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은 채 공적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 여당, 경찰, 회사, 깡패들이 똘똘 뭉친 모양새다. 이러고도 ‘친서민’을 말하는 건 독 묻은 사탕발림 포퓰리즘에 다름 아니다. 얄팍한 정치적 술수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야만적 원리와 대결하는 진정성 있는 정치가 진실로 요구되는 때다. 궁극적으로 그런 정치를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건 국민들 자신의 몫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시민과 세계>  편집위원

 

* 이 글은 2011년 7월 6일,  경향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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