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시민교육 2009-08-06   6617

[칼 폴라니 강좌 후기] 폴라니로 읽는 이명박 정부 시대

이 글은 ‘위기의 시대에 읽는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의 수강자인 김새봄 씨가 작성하여 주신 글입니다.



이명박 CEO가 운영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고객으로 살아가는 일은 참으로 버겁다. 여기저기서 ‘악마의 맷돌’에 갈려 ‘영혼을 잃은’ 인간들의 악몽같은 비명소리가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평택에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자본가들과 생존권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등을 돌린다. 대신 정부는 언론을 돈의 논리에 따르는 무한경쟁 시장체제로 내몰리도록 만드는 미디어법을 통과시켰다. 바로 폭력과 민주주의적 절차의 훼손, 그리고 날조된 데이터를 들이밀며 장밋빛 미래전망을 통해서다.

국내 혼란 뿐 아니다. 대외적 혼란도 극심하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대공황으로까지 인식되면서 세계는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로 시끄럽다. 시절이 하 수상한 이명박 정권 아래, 우리들은 한 여름에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 모여 위기의 시대에 읽는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함께 읽었다.

▲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위기의 시대에 읽는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강좌 모습
ⓒ 최형락, 프레시안  
 


칼 폴라니의 저작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역사적·구체적 증거를 통해 완벽히 깨뜨린다. 특히 주류 학문, 주류 언론, 주류 정치가로부터 부여받은 우리의 개인은 이기적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경제적 인간관을 반박한다. 경제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총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폴라니는 이런 총체적 인간이 경제적 인간만으로 한계짓고 파괴하는 자기 조정적 시장을 문제적으로 인식하고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 인간관을 기본으로 삼는 주류 경제학의 전제를 가장 먼저 반박할 수 있었다. 문제는 주류 경제학의 전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19세기 자기조정적 시장이 만들어진 것이 숙명이며 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필요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주장함으로써 주류 경제학은 19세기의 자기조정적 시장을 탈역사화시켰다. 문제는 바로 탈역사화에 있다.


19세기 자기조정적 시장은 결코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었다. 주류 경제학의 주장대로, 작은 규모의 시장이 큰 규모로 옮겨가고 이것이 대외무역으로까지 발전된 것은 역사적으로 진실이 아니다. 또 하나의 결정적 문제점은 시장 자본주의를 제외한 사회에 존재하던 시장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의 19세기 자기조정적 시장의 차이를 구분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여기서 그의 독특한 시각을 통해 이를 반박한다. 그것은 바로 사회다.


시장 자본주의(19세기 자기조정적)를 제외한 사회에서 경제는 사회에 ‘묻혀있었(embedded)’는 것이다. 사회안에 시장이 묻혀있었던 시기, 경제적 과정은 호혜·재분배·교환을 통해 이뤄져왔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들어와 다양한 국가제도를 통하여 시장을 사회로부터 ‘탈배태(disembedded)’시키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은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들의 상품화를 통해 이뤄졌다. 인간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만든 임금, 토지의 가치를 상품으로 취급한 지대, 시장의 운용을 가능케 하는 자본을 상품으로 만든 화폐가 그것이다. 따라서 결코 자기조정적 시장은 스스로, 자연스럽게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철저히 만들어졌다.


폴라니는 1930년대 19세기 자기조정적 신화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파시즘의 광풍이 불어닥치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저마다 자유방임하던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뉴딜과 복지국가의 실험이 이어지고, 사회주의국가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폴라니는 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자기조정적 시장과는 정반대로, 자연적으로 스스로 발생하는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의 결과로 바라봤다. 그는 19세기를 이러한 자기조정적 시장과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이라는 끊임없는 충돌, 즉 이중운동의 세기라 봤다. 따라서 이제 사회로부터 탈주한 시장은 스스로 모순점을 안고 있기에 붕괴될 수밖에 없다고 문장을 마친다.

거대한 전환은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사회로 끌어들여왔던 시장은 다시 한번 탈주를 시작한다. 1970년대, 기존의 아이디어로는 설명되지 못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경기침체는 사회로부터 시장의 탈주를 가능케 만든다. 신자유주의라는 아이디어가 바로 그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다시 전 사회의 구성원리로 가능케 만들어줬다.


신자유주의 시대 한복판에서 한국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다. 이명박 정권의 문제를 지적하는데도 폴라니의 시각은 깊은 혜안을 준다. 그것은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분과 사회로부터 탈주한 시장과의 관계성에서 가능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회로부터 탈주한 시장이 형성된 결과, 경제라는 부문은 철저하게 사회·국가(혹은 정치)와 구분되거나 그것을 상회하는 원리가 되었는데 그것은 ‘정치적인 것’의 상실로 이어지고 결과 ‘정치’로 한계지어졌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태도나 언술행위, 정책을 살펴보면 시장(경제)영역을 정치·사회와 구분짓고 정치·사회를 상회하여 이 모두를 구성하는 근본원리로 취급하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태도는 ‘정치적인 것’을 억누르고, 정치적인 것을 하나의 분야 혹은 부문으로서 제한되는 ‘정치’로만 한정짓는다.


먼저 경제를 정치·사회를 상회하여 모든 것을 구성하는 근본원리로서 취급하는 19세기 자기조정적 시장이란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명박의 언술을 찾아볼 수 있다.



“대학교 총장이나 지방군수나 동사무소 동장도 CEO마인드를 가져야만 한다. 아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CEO마인드로 무장한 CEO형 인간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CEO형 인간이 돼야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경쟁이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도입돼야 한다는 핵심주장으로 구성돼 있다. 즉 “모든 분야에 경쟁의 룰이 도입되고, 그것은 곧 전 세계적인 경쟁을 의미한다.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이명박, 2007, 『위기를 성공으로 이끄는 힘-온몸으로 부딪쳐라』,p60~61)”



사회로부터 탈주시킨 경제로 인해 정치에 대한 폄하로 이어진 과정을 보기전에, 간략하게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의미를 살펴보자.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에 따르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정치”, 곧 경제·문화·종교·사회 등과 구분되는 제도적 영역으로서의 정치는 진짜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즉 정치의 핵심은 사회의 한 제도적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정치는 인간들이 세계 및 자신들 사이에서 맺고 있는 관계를 산출함으로써 사회를 성립 가능하게 해 주는 산출적 원리를 말한다. 사회 자체의 제도화를 실현하는 것이 곧 정치다.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와 구분하기 위해 이런 의미의 정치를 “정치적인 것”, the political로 명명하게 된 것이다. 이런 개념구분을 무폐와 라클라우가 영향 받았다.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맑스-풀란차스-스피노자-칼 슈미트로 이어지는 위 개념의 연구로부터 왔다. 무페에게 politics(정치)는 경제·문화·종교·사회 등과 구분되는 제도적 영역이다. 이와 달리 the political(정치적인 것)은 모든 인간 사회에 본래부터 있으며 우리의 존재론적 조건을 규정하는 차원이다.


정치의 핵심은 정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을 어떤 한 유형의 제도로 제한하거나 사회의 특정 분야나 차원으로 한정지을 수 없다. “정치적인 것은 모든 인간 사회에 본래부터 있으며 우리의 존재론적 조건을 결정하는 하나의 차원(샹탈 무페·이보경 옮김, 2007, 『정치적인 것의 귀환』, p13.)”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정치를 하나의 부문영역으로 제한지어놓았다. 19세기 자기조정적 시장의 유토피아가 1970년대 다시 부활했다면, 이명박 정권은 그 부활의 적극적 추동자이자 이 시대의 정치가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정치가이다. 바로 ‘정치적인 것’의 억압을 통한 ‘정치’로의 한정이다. 그것은 자기조정적 시장의 유토피아에서 시작된 것이고, 바로 사회로부터 탈주한 시장으로 인한 경제와 정치·사회의 구분을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선진국의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국민들이 열심히 생업에 종사할 때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2007년 여름, 후보 시절 한 인터뷰에서)”

“국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인터넷의 발달로 대의정치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정부와 국회는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국회 시정연설-2008.7.12)”



국민들의 적극적 참여와 인터넷을 통한 대의제의 한계를 극복해나가면서 민주주의 발전을 이끄는 모습에 대해, 대의정치의 도전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협소한지 알게하는 대목이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정치는 오로지 정치전문가가 국민의 간섭이나 시선으로부터 떨어져 전문가의 입장에서 실용적이고 효율적이고 효능감이 높은 정책을 생산하는, 의회 혹은 행정부 안에서 만의 일로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다. 정치의 본질인 정치적인 것을 전혀 정치로 인정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난다.


폴라니의 통찰력은 또 한번 혜안을 발휘한다. 이명박 정권에 저항하여 쇠고기수입금지 반대 촛불집회라는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이 펼쳐졌다. 아직 사회의 요구가 제도화의 단계에 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 한계이지만, 광장의 정치는 점차 제도권 정치인들을 통해 제도권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화 전 단계에 와있음은 확실하다.


▲ <거대한 전환>의 역자이자 이번 강좌를 진행한 홍기빈 박사
ⓒ 최형락, 프레시안  


폴라니는 우리를 믿는다.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의 주체이자 사회 그 자체인 우리들을 믿는다. 사회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자연적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다는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은 앞으로 우리의 미래가 밝을 것이란 긍정적 희망을 갖게 만든다. 폴라니의 통찰력은 현재 한국사회를 비롯하여 전지구적 악마의 맷돌의 실체의 기원을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데 많은 혜안을 준다. 그렇지만 우리는 폴라니를 발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적절한 의문일지는 몰라도 마지막으로 폴라니의 한계를 제시하는 것으로 갈음하겠다.


폴라니가 말하는 사회라는 것은 너무도 모호하고 거대하고 컨트롤이 불가능한 자연적 존재다. 사회의 자기보호 기능이 자연적으로 발휘되면서 시장의 폐해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왔다고 말해왔는데, 사회의 대응은 너무도 오랜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1970년대 다시금 신자유주의가 밀고 들어온 것을 보면, 사회의 대응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폴라니는 맑스를 비판하면서 어떤 계급이든 전면적인 사회를 위한 외침을 해야 사회가 함께 공감하고 움직인다고 말한다. 이를 실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결국 사회가 언제 어떻게 움직일 지는 결코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뤄질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그 사회의 자연적 대응력-그 힘을 어떻게 일깨울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부분이 설명되고 있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즉 폴라니가 말하는 사회는 어떻게 해야 거대한 맷돌을 멈출 수 있는 것인지 하는 고민이 든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오기 전에 진보진영에서 이뤄졌던 논쟁을 기억한다. 진보진영 일부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정부가 들어오는 것은 오히려 환영해야 한다-왜냐하면 신자유주의의 착취를 더 받아야만 민중들이 깨닫고 진보세력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라는 분명 이런 입장이 존재했다. 폴라니가 말하는 사회는 결국 더 최악과 극도로 내몰려야 전면적으로 시장을 내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이르른다. 즉 사회의 모호성과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의 자연성이란 폴라니의 규정으로 인하여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은 실천적으로 만들어내거나 사회인 우리 자신조차 그것을 의식적으로 전면화시킬 수 없다는데 있다. 자연적으로 악마의 맷돌은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으로 인해 멈춰질 것이란 단순한 믿음은 무책임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악마의 맷돌을 멈추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국가의 문제다. 폴라니는 제도를 통해 19세기의 자기조정적 시장과 그 변환을 설명하고 있다. 스피남랜드법, 구빈법, 금본위제 등등. 1장을 보면 제도의 기원을 통해 인류가 처한 조건이 무엇인지, 그 위기를 낳은 제도의 기원을 통해 규명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사회가 여기저기 신음소리를 내고 보호해달라고 외치는 것이 실질적으로 보호라는 기능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제도화돼야 한다. 그 제도를 공식화하고 만들어내는 것은 국가의 인위적 행위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렇다면, 폴라니는 국가를 ‘사회의 매개자’ 라 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조정적 시장이란 인위적 형태를 만들어낸 과정에서 국가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역시나 시장을 위한 제도를 만든 것은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럼 국가는 ‘시장의 매개자’ 라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매우 잔인하고 거대한 자본가의 이미지로 비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매우 다중적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 왜, 어떻게 사회의 매개자로서 국가는 존재하는 것인가? 또한 그것이 제도만으로 가능한 이야기인가? 즉 국가를 사회는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라는 중요한 의문이 생긴다. 또한 제도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역시 마찬가지다.


시장에 대한 유토피아는 결코 파괴되지 않았다. 따라서 사회는 국가와 사회 자신, 그리고 시장에 대해 고민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