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209] 더 많은 윤석열과 권은희가 필요하다

 

[시민정치시평 209]

 

더 많은 윤석열과 권은희가 필요하다

: 유신 회귀 시도에 손발이 된 이들을 기억해야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하루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중에는 많은 이들이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사건들이 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간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오래 기억될 사건들을 연이어 목도하고 있다.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하고, 정부는 노동자의 단결권을 부정하더니, 급기야 정당의 해산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하는 것까지.

 

후일 우리나라 노동인권사에는 박근혜 정부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 재임 기간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이 합법적 지위를 빼앗긴 사건이 기록될 것이다. 현 장관 재임 중에 고용률 70%가 달성될 리도 없지만, 혹여 달성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은 역사책 어느 한 쪽 귀퉁이에도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교조 법외노조화는 노동권을 억압한 현 정권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반드시 기억될 것이다.

 

누구를 조합원으로 받을지에 대한 결정은 노조에 맡기라는 국제노동기구(ILO)의 여러 번에 걸친 권고를 무시하고 전 세계적인 망신을 자초하는 이런 결정은 도대체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꼭 알아야 될 필요는 없다. 누가 처음 생각해 낸 것이든 간에, 어차피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장관이다. 내가 아는 방하남 장관은 이런 폭압적인 결정을 앞장서서 제안할 성격도 아니고, 누구처럼 전교조를 ‘해충’으로 보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더욱 답답하기만 하다. 무엇을 바라 거기서 이런 두고두고 부끄러울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노동부 장관은 이 사건에 있어서 ‘내 소신은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었노라’는 변명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지 않은가.

 

이 시대 노동부 고위공무원으로 전교조에 ‘노조 아님’을 통보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연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기계 부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출세는 잠시 멀어질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해고당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잠시 한직으로 물러나는 정도의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도 싫어서 약자의 목에 칼을 겨누는 자들이 감히 이해와 용서를 구하지는 못하리라. 이렇게 노동인권의 시계를 수십 년 뒤로 돌려놓은 사건에서, 노동부는 국민의 눈에 띌만한 유의미한 문제 제기하는 사람 하나 없이 악역을 수행했다.

 

전교조는 서울행정법원에 법외노조 통보처분 취소소송과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근거법령이 취약한 상태에서 시행령에 근거하여 법적 지위를 박탈한 것은 무효이며, 9명의 해직자가 포함되었다고 해서 6만여 명 조합원 전체의 단결권을 박탈한 것은 과잉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한 것이므로 부당하다는 것이다. 교사이므로 좀 더 엄격하게 법을 지켜달라고 요구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노조에는 적용하지 않는 최고수준의 패널티인 ‘노조취소’ 처분을 내리는 것은 지나치다. 그리고 당장 취소소송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 노조 전임자가 학교로 복귀하고 사무실이 폐쇄되면 이를 다시 원상복귀 하기 어려우므로 집행을 정지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제 눈은 서울행정법원 제13행정부(부장판사 반정우)로 쏠린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부가 저지른 악행을 바로잡고 노동기본권을 지킬 수 있을까? 이것은 판사들이 정치적 외압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판단해 줄 것인가에 달려있다.

 

헌법재판소로 넘어간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도 마찬가지다. 해산심판 청구의 정부 대표로 나선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독일에서 1950년대에 나치당 후신을 해산한 경우를 들이대며 해외에도 선례가 있다는 법무부 공무원들의 후안무치에 기가 막힐 뿐이다. 원로 헌법학자들도 모두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에 공감했다고 하는데, 그게 도대체 누구인지 이름을 좀 물어야겠다. 재판이 진행 중인 RO 사건의 결과를 마음대로 예단하면서까지 서둘러 이 시점에 터뜨린 ‘정당해산’이 필요한 일이라고 들러리 서 준 헌법학자의 이름을 우리는 꼭 알아야겠다.

 

나는 진보 정당과 교사 노동조합을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설득할 능력이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내 뜻은 아니지만, 주어진 역할이 그러하므로 어쩔 수 없이 대신한다는 사람들, 그들의 비겁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달린 경우라면 조금은 너그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신분이 보장된 공무원과 판검사, 그리고 학자들이 이렇게 비겁한 것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많은 사람을 도탄에 빠뜨린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법인 스님이 말씀하시길, “착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것은 좋은 성품이다. 근면하고 성실하면 더 좋다. 그러나 사심 없이 바로 보고, 분명하게 판단하고, 의지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칫 조직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나치 학살의 주범들은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다.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조직이 부여한 역할을 다한 것뿐이라고.

 

우리에게는 더 많은 윤석열 검사와 권은희 수사과장이 필요하다.

참여사회연구소가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칼럼을 연재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들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 본 내용은 참여연대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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