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280] ‘반기문 정계 등판설’의 의미 : 야멸찬, 야비한, 야맹(夜盲)의 정치, 그 끝을 예감한다

 

[시민정치시평 280]

 

‘반기문 정계 등판설’의 의미

: 야멸찬, 야비한, 야맹(夜盲)의 정치, 그 끝을 예감한다

 

홍윤기 동국대학교 교수,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왜 이 국가 시민들의 속을 확 트여주는 대통령을 만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목전의 대통령을 앞에 두고 왜 3년씩이나 남은 대통령 선거의 후보들을 거론하면서, 국내 정치와는 전혀 상관없이 국제 업무를 무난하게 잘 꾸려나가는 현직 유엔 사무총장을 국내 후보군들 사이에 섞어놓고 여론조사 장난을 치는가? 우리나라 시민들은 왜 끝없이 우리 정치 현장에 없는 사람에 매달려야 할까? 정주영, 박찬종, 문국현을 스쳐 안철수에 이르렀던 ‘없는 인물 불러내기’는 이제 느닷없이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에 이르렀다. 이런 여론조사 장난은 현직 정치인들과 대통령을 흔들다가 결국은 모두 민낯을 보이게 만들면서 끝장나곤 했다.

 

사실 이유는 딱 한 가지로 집약된다.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모양새가 속을 터주기는커녕 꽉 막혀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바로 200일 전, 간이라도 내줄 듯이 온갖 위로의 말을 하던 대통령이, 언제든지 만나주겠다던 약속만 믿고 청와대 앞에서 날밤을 새우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청운동 주민센터 앞마당에 방치해버리는 것을 보면서 섬뜩했다. 그러다 지난달 29일 시정연설을 하러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오가면서 “대통령님, 살려주세요” 라고 큰 소리로 애원하며 외치는 유가족들과 두 번이나 마주쳤지만, 이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왼쪽에 선 수행원과 웃음까지 지어 얘기하며 지나쳤다. 이렇게 야멸찬 사람이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질 때 ‘어떻게 저런 이를 대통령으로 뽑았어요’라고 조상 탓을 할 후손들의 소리를, 나라고 해서 천국에서 마음 편하게 들을까 싶다.

 

자기를 보자고 절규하는 시민들과 눈길 한 번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목숨 바쳐 독립운동하던 선조들이 그렇게 갖고자 했던 이 나라의 군사 주권을 오롯이 절반이나 뭉텅 잘라 내주었다. 우리나라를 잡아먹었던 일본은 전쟁할 권리가 있는 정상 국가가 되려고 역사적 사실을 은폐, 왜곡하면서까지 평화헌법을 고치려고 드는데, 군사력이 없어 일본에 먹혔던 이 나라는 멀쩡한 군사 주권의 반을 미국에다 갖다 바쳤다. 나는 우리 대한민국더러 미제의 식민지라고 욕하는 북한의 선전이 정말 근거 없는 비방이라고 믿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제 미국의 동의와 지휘가 아니면 전쟁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보수 논객을 자처하는 조갑제 씨가 언젠가 그랬다. 전쟁할 결심을 할 수 없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라고. 나는 이런 보수주의자가 무엇을 보수하는지 모르겠다. 북한을 몇 배나 압도하는 군사비를 쓰면서도 북한 핵무기 몇 발에 단지 군사 협력이 아니라 전쟁 개시권과 지휘권을 아예 포기하는 군사 종속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안보를 안전하게 보수하는 것인지 저들은 생각이나 해봤을까? 그리고 북한이 쓸 만한 핵무기를 몇 기나 갖고 있는지 어디에 배치하고 있는지, 과연 제대로 알고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것을 입으로 때우는 북한의 혓바닥에 놀아나면서도, 정작 전쟁이 났을 때 우리가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야맹증(夜盲症)에 스스로 걸린 셈이다. 이런 사람들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고 남포항 개방까지 북측에 요구한 것은 숨긴 채 북방한계선(NLL)을 고(故)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에게 넘겼다며, 그가 주권을 포기했다고 비방했었다. 한 것도 아닌 ‘NLL 포기’ 발언을 두고 주권을 포기했다고 맹비난하던 작자들이, 명백하게 군사 주권을 포기한 것을 두고는 도리어 잘 했다고 쌍수로 환영하고 나선다. 어지럽다. 정치적 맹목성에 놀아나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해도 너무한 것이다. 같이 눈멀어야 하나?

 

그뿐 아니다. 진보 교육감들이 다수를 이루는 교육계에 대고 무상급식은 안 되고 보육비는 내놓으라는 식으로 삿대질하듯이 들이밀어 유아들과 그 형들을 맞싸움 붙게 만든 야비함에는 아예 질려버리겠다. 돈 있는 집의 아이들까지 왜 점심밥을 주느냐고, 마치 가난한 집 아이들을 크게 생각하는 양, 일제히 무상급식 예산을 거절했다. 그러면서 무상급식은 ‘공짜 밥’이라고 개칠(改漆)을 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졸지에 공짜 밥을 먹는 거지로 취급되었다. 바로 그래서 복지가 되려면 보편복지가 되어야 한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공짜 밥을 먹는 동안, 있는 집 아이들은 교문 밖에 나가거나 아니면 교실에 남아 ‘공짜 아닌 더 좋은 밥’을 먹기를 바라는가? 하다못해 우리보다 한참 못 하는 후진국 학교에도 이런 점심 풍경은 나타나지 않는다. 학교는 단지 공부만 하고 집에 가는 공설 학원이 아니라 아이들이 다양하게 어울리는 종합 생활 공간이다. 이들 사이를 공짜 밥 먹는 학생과 자기 돈으로 먹는 학생을 갈라 이질감을 불어넣는 것은 야비하다 못해 야박함에 가깝다.

 

너무 몰아붙이고 너무 몰라라 한다. 이 국가의 시민들 마음이 점점 타들어가고 말라가고 있다. 야멸참에 기막히고 야맹증에 불안하다가 야비함에 분노하고 야박함에 절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너무 당연한 일인데 안 하겠다는 까닭이 무엇인가.

이 국가는 한낮의 날벼락 같이 아이들과 가족을 잃은 이들의 억울함은 반드시 풀어줘야 한다.

이 국가가 무력 공격을 받을라치면 당연히 나서서 적을 응징해야 한다.

이 국가는 보육원의 아기들과 학교에 온 아이들을 모두 똑같이 밥 먹여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런 당연한 일들에 무슨 조건이 필요한가.

 

세월호 유가족들이 국가의 발목을 잡은 것이 아니다. 도리어 국가가 세월호 유가족들의 발목을 잡아온 것이다. 쌓여가는 한(恨)의 끝이 너무나 불안하다.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하지 않는 이 국가의 정치인과 대통령을 보고 사람들은 엉뚱하게 안철수를 잡았다가 이번에는 반기문을 부여잡는다. 그런데 여기에도 정치권의 부패한 셈법이 어지럽다. 새누리당 ‘친이’계는 ‘친박’계를 견제하고, 친박계는 친박대로 대통령 레임덕을 막으려 하며, 새정치민주연합의 ‘비노’계는 ‘친노’ 견제용으로, 서로 앞다퉈 반기문 대망론을 던지고 있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어디에도 입버릇처럼 내세우는 민생에 대한 진지한 고려의 기색은 눈 씻고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다.

 

하느님이 있다는 것만 확실하면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다. 제발 당연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시원하게 통하게 해달라고! 그러나 들어줄 정치권은 하느님이 있어도 들어줄 기세가 아니다. 어쩔거나! 어쩔거나!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 본 내용은 참여연대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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