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477] 충분히 성평등하다는 불평등한 말

충분히 성평등하다는 불평등한 말

#미투 운동, 이제 당신이 응답할 차례

 

 

이재정 한국여성단체연합 활동가

 

“#미투가 지나치게 성대결로만 흐르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이런 질문을 받았다. 며칠간 이 질문이 계속 떠올랐고, 가슴이 답답했다. #미투 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지 1년 정도 되어가는 지금, 성차별·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말하기와 성폭력을 가능케 했던 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여러 움직임들이 누군가에겐 그저 ‘성대결’로 보였다는 것이 꽤나 씁쓸했다.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성차별·성폭력이 ‘개인’과 ‘개인’간의 갈등이나 ‘집단’과 ‘집단’간의 대결이 아니라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에서 기인한 구조적 폭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외침과 다양한 요구들이 누군가에겐 일생을 건 싸움이고, 누군가에겐 그저 ‘불편한 갈등’인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또 무엇을 말해야 할까.

 

#미투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성차별·성폭력 피해 경험을 이야기하는 #미투 운동은 지난 1월 검찰 내 성폭력 사건을 시작으로 사회, 경제, 문화, 예술, 교육, 종교 등 사회 각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공공기관 및 은행권 채용성차별과 성별임금격차, 여성의 비정규직화 등을 고발하는 #페이미투 운동으로 이어졌고, 이는 성차별이 여성의 노동권과 생존권을 위협하는 굴레임을 드러냈다. 이외에도 ‘성평등 개헌’, ‘성평등정책추진체계’, ‘디지털 성폭력’, ‘불법촬영 편파수사’ 등 다양한 의제들이 #미투 운동의 흐름과 맞물려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미투 운동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 걸까. 나는 그동안 성평등 가치를 위해 싸워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 말하기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고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부천서 성고문 사건, 서울대 신교수 사건 등 한국여성운동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들은 모두 용기있는 여성들의 발화에서 촉발되었고, 사회변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여성단체들은 호주제 폐지, 여성인권 3법(성폭력특별법·가정폭력방지법·성매매방지법) 제정, 남녀고용평등법 등 제도적 성과들을 이뤄냈고, 피해자를 지원하고 가해자에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2015년 ‘메갈’ 이후 SNS를 기반으로 성장한 페미니스트들의 등장과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 역시 #미투 운동의 중요한 마중물이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넥슨 성우 해고 사건’ 등의 목격과 2016년도부터 일어난 ‘#00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일상의 안전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켰고, 말하고 싸우고 행동하는 주체들을 만들었다.

 

여성주체들은 촛불혁명에서도 페미존을 만들거나 집회의 여성혐오 요소들을 지적하고 변화시키며 평등한 집회문화를 주도했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여성이 사회변혁의 주체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시켰다. 촛불혁명은 정권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에도 여성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상에서 차별과 폭력을 경험했다.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만들어낸 경험을 가진 여성주체들은 지치지 않고 싸움을 이어갔고, #미투운동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말하는 여성들은 늘 존재했지만 사회는 듣지 않았고 오히려 피해자에게 ‘의심’과 ‘비난’의 시선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멈추지 않고 연대를 확장해나간 이들의 노력은 성차별적 구조와 문화에 조금씩 균열을 냈다.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이하 ‘#미투시민행동’) 역시 그 균열 중 하나였다. 성차별·성폭력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사회가 함께 성찰하고 변화를 만들어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으로 전 시민사회에 연대를 확장했다. #미투시민행동은 350여개의 여성·노동·시민사회단체와 400여명의 개인들이 모여 #미투운동에 대한 적극적 지지와 연대를 도모했다. 이외에도 전국에서는 지역별 #미투시민행동이 발족되었고, #미투 운동이 일어났던 각 사회영역에서는 대책위원회와 페미니즘 그룹이 만들어졌다. 

 

#미투운동이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

 

#미투 운동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차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성폭력이 얼마나 만연한지 세상에 알렸다. 그동안 여성들의 말하기는 너무나 쉽게 ‘개인의 경험’으로 치환되고 존중받지 못했다. 하지만 수없이 쏟아지는 성차별·성폭력에 대한 증언들은 더 이상 이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가볍게 넘기지 못하도록, 사회가 함께 해결해나가야 하는 중요한 과제로 만들었다. 

 

#미투는 유명인에 의한 성폭력만이 아니다. #미투 발언자들이 말했던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용기가 되어 각자가 경험한 성차별·성폭력을 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지난 3월 #미투시민행동이 주최한 ‘2018분 동안의 이어말하기’와 ‘대자보 광장’은 각자의 일상 경험을 말하고, 지지와 연대를 확인하는 장이었다. 3월 22일부터 23일까지 1박 2일로 진행된 이어말하기는 다양한 연령, 정체성, 경험을 가진 193명의 발언자가 참여했고, 대자보광장에서는 25미터에 달하는 가벽에 300여개의 대자보가 붙었다. 모두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또한 #미투시민행동은 #미투에서 제기된 다양한 의제들의 해결을 촉구하고 #미투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모여 각자의 요구를 외칠 수 있도록 5차례의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를 열었다. 지난 8월 18일 5차 집회에서는 2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며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국가권력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지금 현재 #미투운동은 어디로 가고 있나?

 

지금 현재 그 많던 말하기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미투 말하기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최근에는 전국으로 스쿨미투가 확산되고 있다. 올 초 제기된 #미투 사건들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고, 전국에서는 매월 #미투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대책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국회는 #미투 운동 이후 #미투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렴하겠다고 최소 130여개의 법안을 발의했지만, 오직 5개의 법안만이 본회의를 통과했고 대부분의 법안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여성단체들은 정부가 책임감을 갖고 여성들의 목소리에 응답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성평등추진체계 마련’을 요구해왔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공약이자 주요 정책과제인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뿐만 아니라 #미투 국면에서 요구했던 각 부처 내 성평등 전담 기구 설치, 예산 확대 등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사법부의 경우, 지난 8월 이뤄졌던 안희정 성폭력 1심 무죄 판결문을 통해 왜곡된 성인식과 편견이 여실히 드러나 큰 실망을 안긴 바 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와 혐오발언 역시 심각하고, #미투와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Backlash)도 일어나고 있다. 피해자의 외모, 성격, 행동 등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뜯어져 평가되고 비난의 이유가 되었다. 열심히 일했던 흔적은 피해자답지 못함의 증거가 되기도 했다. 언론은 자극적인 말과 소재로 사건을 축소하거나 본질을 흐리는 경우가 많았고, 여성들의 요구들을 ‘성대결’의 프레임에 가두고 왜곡했다. 

 

#미투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반격도 이어지고 있다. 올 초 #미투 운동이 있었던 성균관대학교는 최근 총여학생회가 폐지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학내 #미투 운동 이후에도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는 총학생회에 문제의식을 느낀 학생들이 성차별·성폭력 문제에 대응하고 성평등한 학내 문화를 만들어가는 전담기구인 총여학생회를 세우고자 했지만,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총여폐지 건을 총투표 안건으로 올리고 유례없는 방식으로 선거를 강행했다. 성균관대 학생들은 ‘성균관대 성평등 어디가(이하 ‘성성 어디가’)를 만들어 총여폐지 총투표 보이콧과 총여학생회가 필요한 이유를 알렸지만, 결국 총여학생회는 폐지되었고, ‘성성 어디가’ 활동가들은 학내 커뮤니티에서 심각한 사이버불링을 감내해야했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대학에서 나타나고 있다. 올해 6월에는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 재개편 요구안이 통과되었고, 작년 12월 한양대에서는 총여학생회 선거가 무산되었으며, 서강대에서는 총학생회가 안희정 1심 무죄판결 비판 성명을 썼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다 결국 사퇴까지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한 반격은 페미니스트들을 위축시키고 성평등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서 큰 우려가 있다. 이것은 비단 대학만의 일이 아니며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여전히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각자의 공간에서 성찰과 변화를 만들고, 때로는 다시 모여 힘을 모아야 한다. 성평등에 대한 인식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지는 상황에서 그 격차를 좁혀나가는 역할이 필요하다. 

 

이번 성균관대 총여폐지 논란에서 총여를 폐지해야한다는 논리 중 하나는 ‘충분히 성평등하다’는 것이었다. ‘충분히 성평등하다’는 말은 ‘여전히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여전히 대학에는, 사회에는 성폭력 문제에 대응하고 성차별을 지적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성평등에 대한 의제를 던지고 논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상시적인 기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미투 운동이 그동안 싸워온 사람들의 노력과 그들이 사회에 던졌던 수많은 질문들 속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성평등은 어느 날 갑자기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논의가 이어질 때 조금씩 가까워질 것이다. 

 

앞으로도 #미투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여성들은 #미투 이전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더 많은 말하기를 이어갈 것이다. 이제는 말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제대로’ 응답할 차례다.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나 많다. 국회, 정부, 사법부가 성평등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비판해야 하고, 성평등한 사회문화를 어떻게 만들고 공감을 형성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제, 당신이 응답할 차례다.

 

*이재정 한국여성단체연합 활동가는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 상황실 활동가도 겸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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