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500] 다시, 촛불을 들자

다시, 촛불을 들자

’87년 체제’를 끝내야 한다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반토막이 났다. 지난 하노이 북미회담 결렬 이후 최대의 업적이라 할 한반도 평화체제의 수립에 대한 희망도 흔들리는 이 때, 무엇보다도 경제상황이 좋지 않고 최저임금 인상이 낳은 부작용이 크다는 온갖 공세가 여론을 움직인 모양이다. 게다가 몇 몇 인사 실패 같은 소소한 문제도 민심 이반을 부추겼다는 분석이다. 지지율 하락이야 어느 정도 예견되었지만, 이러다가 ‘촛불혁명’으로 탄생했다고 자임하는 정부가 야심차게 내세웠던 개혁의제들을 슬그머니 하나씩 거두어들이고 아예 촛불의 정신을 지워 버리지는 않을지 하는 우려의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촛불혁명이 기로에 섰다. 

 

‘비판적 지지’를 넘어서 

 

많은 이유들이 제시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문재인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의 본원적 한계를 지적한다. 이에 따르면,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처음부터 ‘진보’와 거리가 멀고 어쩌다 촛불혁명의 과실을 독점하게 되었지만 우리 사회 근본 개혁을 바랐던 촛불 시민들의 열망을 실현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이래의, ‘진보-자유주의-보수’라는 낡은 유럽적 정립 체제를 상정한 진보 정치에 대한 이런 본질주의적 접근이 지금의 상황에서도 얼마나 적실성을 가질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한다. 

 

나로서는 우리 집권 세력이 단지 진보적 지향과 의욕만 강했을 뿐 우리 사회의 복잡다단한 현실을 제대로 진단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정밀한 로드맵을 제시할 수 있는 실천 역량을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는 점이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러니까 문제는 특정 정치인 개인이나 집권 세력의 태생적 문제라기보다는 광의의 우리 진보 정치 전체가 지닌 역사적 한계라는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우리 진보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추상적인 진보적 가치와 도덕적 지향에는 충실했을지 몰라도, 세상을 실제로 조금이라도 바꾸어낼 수 있는 정책과 실천 역량을 준비하는 데는 소홀했다. 주로 도덕성을 내세워 집권하거나 성공했기에 조금이라도 도덕적 흠결이 드러나면 곤혹을 치를 수밖에 없는 특유의 약점도 지니고 있는 데 더해, 국정 운영 역량을 충분히 갖추지 못해 정당한 권력을 쥐고서도 결국 관료에게 의존하여 상황을 관리하는 데만 급급하게 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직까지 어느 정도는 ‘민주적’ 정부의 통제 아래 있지만, 직업적 안정성과 전문성을 무기로 자립화하여 국정 운영의 중요한 혈맥을 사실상 좌지우지 하고 있는 관료들의 농단과 저항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정말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자유한국당으로 대변되는 기득권 적폐 수구 세력의 너무도 집요하고 강고한 저항이다. 정부와 민주당 인사들의 개혁 의지와 역량 부족을 얼마든지 탓할 수 있지만, 그런 부족함에 대한 비판은 우리 사회의 저 기득권 동맹의 막강한 사회적 권력과 그 정치적 힘을 배경으로 해서만 온전하게 타당할 수 있다. 그 부족함이라는 건 결국 그 핵심에서 저들의 저항과 반격을 제대로 넘어서지 못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비판을 하되, 진짜 적이 누구인지 놓치면 안 된다. 그리고 저 오랜 ‘비판적 지지’의 망령도 떨쳐버려야 한다. 누군가는 정치적 진리를 독점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그에 근접하면 지지하고 벗어나면 비판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어떤 정치적 오만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정치를 실천이 아니라 형이상학으로 만들 뿐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저 기득권 세력의 강고한 저항과 반격을 넘어 설 확고한 ‘개혁 동맹’의 구축이다. 준열하게 비판하되, 그리고 그건 너무도 마땅하지만, 그 어떤 정치적 이상과 가치도 저 수구 세력의 난동에 가까운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냥 구두선에 그칠 뿐임을 잊으면 안 된다. 

 

’87년 체제’를 끝내야 한다

 

그런데 저들이 저렇게 정치적 난동을 부릴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온갖 편법과 불의에 기대 형성된 저들의 사회적 권력의 막강함이 출발점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권력이 언제나 곧바로 정치적 힘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는 바로 정치를 통해 그런 사회적 권력을 일정하게 길들이고 규제해서 그 권력이 공동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런데 저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껏 거의 무소불위의 정치적 힘도 누리며 이 사회의 온갖 불의를 심화시켜 왔다. 언론 같은 권력 보조 장치들을 이용한 기만 탓에 저들의 본질을 놓치기만 하는 대중들의 우둔함 때문인가? 어느 정도는 그럴 지도 모른다. 민주 진영의 무능함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승자독식 선거제도와 그에 따라 형성된 지역주의 기반의 정치 체제다. 바로 이 정치 체제가 오랜 세월 수구 기득권 세력이 막강한 정치적 힘을 누릴 수 있었던 진짜 핵심 비밀이다. 인간의 해부학은 원숭이의 해부학을 위한 열쇠라고 했다. 이번의 선거법 개정 시도에 대해 자한당이 ‘좌파의 장기집권 음모’ 운운하며 부리고 있는 정치적 난동은, 바로 이 87년 체제가 얼마나 저들의 본질적 이익과 맞닿아 있는지를 새삼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 시민들은 오래 전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부독재를 끝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은 교활했다.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선에서 막고, 모든 선거가 단순다수결 승자독식의 원리를 따르도록 했다. 모두 나름의 지역적 핵심 기반을 갖고 있던 당시 야권의 지도자들도 당장 정권을 놓치더라도 최소한 지역 맹주 자리는 지키겠다는 욕심에 그런 제안을 수용했지 싶다. 이렇게 탄생한 ’87년 체제’는 그 사이 약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적인 틀을 유지 한 채 지금까지 우리의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제 이 체제를 깨트려야 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지금의 제도가 자한당 궤멸에 더 좋을 수도 있다. 작년의 6.12 지방선거는 이를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재현되기도 힘들 뿐더러,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보수 없는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고, 우리나라 보수 세력도 정치에서 정당한 자기 몫을 가져야 한다. 제일 큰 문제는 지금의 제도가 승자독식의 규칙 때문에 특정 세력이 민주주의적 정의에 어긋나게 과다 대표되고 권력을 독점하면서 정치 세력 사이에 극단적인 ‘전쟁정치’를 일상화시키게 된다는 사실이다.

 

문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자한당은 지금의 제도로 내년 총선을 치르고자 한다. 아마도 약간의 지역주의를 선동하고 부울경이라는 텃밭만 회복하면 결국 다시 제1당이 되고 그 바탕 위에서 다음 대선도 이기겠다는 계산을 하지 싶다.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기필코 막아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단지 87년 체제의 여러 정부 중의 한 정부로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체제의 모든 정부는 사실상 실패했다고 해야 한다. 단순히 특정한 개인이나 세력의 한계가 아니다. 최소한 그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근본적인 체제의 한계고 구조적 한계다. 중앙 정치 차원에서는 승자독식의 규칙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한 여러 세력들의 결사항전 식 쟁투로 나라가 병 들었고, 지역 정치 차원에서는 많은 곳에서 사실상 장기간의 1당 독재체제가 지속됨으로써 시민들의 삶이 피폐해졌다. 이것은 태생적 한계를 안고 태어난 우리 ‘결손 민주주의’의 지독한 운명이다. 이제 이 87년 체제를 끝내야 한다. 

 

다시, 촛불을 들자

 

이 체제를 끝낼 절호의 기회가 왔다. 아마도 마지막 기회이지 싶다. 여전히 부족하고 끝까지 불안하지만, 그나마 이 정치 체제를 획기적으로 바꿔낼 수 있는 선거제 개혁안이 이른바 ‘패스트 트랙’에 태워질 전망이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자한당의 완강한 반대는 이미 예견된 바이고, 다른 정당들 안에도 내심 선거제 개혁을 달가워하지 않는 의원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그들을 욕하기는 쉬워도, 다음 총선에서 국회의원 뱃지가 걸린 일인지라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를 일이다. 단지 그들의 정치적 선의에만 호소할 수는 없다. 

 

이제 시민들이 나서자. 다시, 촛불을 들자. 선거제 개편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때까지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정치권을 압박하고 감시해야 한다. 우리는 고작 제대로 된 개혁 입법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또 다시 실패를 반복할 운명을 지닌 정부를 세우려고 그 추운 겨울에 몇 달이고 계속 촛불을 들지는 않았다. 

 

우리가 원한 건 근본적인 사회 개혁이고, 그것은 정치의 혁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촛불을 든지 2년이 지난 지금,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끝이 아니었다. 87년 체제라는 구조적 병리가 또아리고 있었음을 우리는 새삼 깨달았다. 우리 사회에 개혁해야 할 다른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먼저 이 병리부터 치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민주당을 닦달하자. 다른 개혁 과제들이 좌초한 데 대해서는 자한당의 기괴한 농성 정치와 의석수의 한계라는 핑계를 댈 수 있겠지만, 그 동안 정치 체제 그 자체를 바꾸는 일에 엉터리 계산기를 두드리며 미적거린 데 대해서는 그 어떤 가혹한 비판도 부족하다. 내년 총선에서 자한당을 궤멸시킨 후 새로운 정치 구도 속에서 개혁을 하자고? 감히 단언컨대, 그런 일은 현재의 체제 속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민주당이 다시는 이런 얄팍한 계산을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는 오히려 민주당이 궤멸할 것임을 경고해야 한다.

 

다른 정당들도 개혁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압박하자. 지난 촛불혁명은 시민들의 압박에 이기지 못한 당시 새누리당 의원 다수가 시민들의 강렬한 열망에 투항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한 손에는 촛불, 한 손에는 정치’라는 촛불혁명의 성공 공식은 이번에도 타당하다. 의원들은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게 마련이다. 우리 시민들이 나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압박해서 그들이 그에 따르게 해야 한다.

 

꼭 광장이 아니라도 좋다. 다시 추운 겨울에 길을 나서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제 카페에서든 술집에서든, 트위트에서든 페이스북에서든, 87년 체제를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기 위해 토론하고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비전을 퍼트리자. 다양한 방식으로 쉼 없이 정치인들을 감시하고 압박하자. 다시 개헌에 대한 열망도 모아 정치권에 전할 수도 있겠다. 87년 체제를 끝장 낼 마지막 절호의 기회가 왔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어쩌면 우리나라는 영원히 결손 민주주의의 어두운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이제, 진짜로 징글징글한 이 87년 체제를 끝장내자.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