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칼럼(ip) 2011-07-15   8536

[칼럼] “리얼”한 미래, 시민적 복지국가의 길

 “리얼”한 미래, 시민적 복지국가의 길

 

보편적 복지국가, 가치와 전략

 

보편적 복지국가에서 보편주의란 무슨 말인가. 보편적 복지주의라는 게 우리 삶과 사회의 미래에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대체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또 모르는 구석도 있다. 그 규범적인 의미와 “리얼한” 현실적 의미, 사회경제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 모두에 대해 “보편적”의 의미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나는 여기서 보편적 복지국가에 대한 시민정치적인 발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제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쉽게 보편주의란 수혜대상의 문제다. 빈곤층중심의 잔여적(자유주의적)복지 그리고 피용자 중심이면서 기여에 따라 수혜받는 조합주의 복지와 대비되는바, 모든 국민에 적용되는 복지가 보편복지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해야 한다. 해당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계급 계층,고용지위,년령,성 등에 차별없이 기본권으로서,즉 기본적인 보편적 필요를 보장받는 ‘사회적 시민권’ ( social citizenship)으로서 복지가 보편적 복지다. 이렇게 사회적 시민권에 기반한 보편적 복지국가론은 규범적 목표가치임은 물론이지만, 복지정치 전략으로서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민주주의가 이상(규범적 목표)만이 아니라, 운동 그리고 제도의 세 수준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복지국가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사회적 시민권-이는 책임을 동반한다-은 이상으로서 목표가치지만 운동없는, 실천 전략없는 목표는 유토피아에 머문다. “리얼”하지 않다.그래서 정치 전략적 의미로서, 특히 한국과 같은 엄혹한 조건에서 전략으로서 보편복지가 매우 중요하다.

 

나는 앞서 “추격” 복지국가로서 한국의 위치에 대해 말하면서 스웨덴과의 차이를 지적하고우리의 역량에 비춰 보편 복지국가에 진입해도 그 두께가 얇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전망한바 있지만, 적어도 이상과 정치전략적 의미에서 우리의 복지 정치는 스웨덴적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다. 약한 노동의 힘, 약한 신뢰 기반이라는 한국적 조건은 보편적 복지국가 형성을 어렵게 하는 중대한 제약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조건 때문에, 권력자원이나 신뢰자본면에서 조직된 노동세력이 복지국가 길의 공공적 중심 주체가 되기 어려운 조건이기 때문에, 계급을 가로 질러 국민적 동의와 연대를 창출할 수 있는 보편주의 전략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보편적 복지정치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세가지 논점에 대해 논의를 더 보태고 싶다.

 

사회적 시민권과 사회적 책임기업, 사회-자유 통합적 시민권론

 

먼저, 정치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보편적인 사회적 시민권을 보장받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물론 복지를 떠받치는 경제, 그 물질적 기초의 문제가 있겠다. 그러나 또 다른, 더 중요하게 봐야 할 문제가 있다. 보편적 복지국가를 제기함은 우리끼리,보편복지를 하자는 자들끼리 그져 선언하는 일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곧, 국가는 물론(헌법 제 34조) 기업 또한 보편복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성장제일ㆍ 경쟁력제일ㆍ 파이먼저 키우기 이런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의 사회적 시민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런 책임을 감당하는 “사회적 동반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다시 말해 기업의 시장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은 방지되어야 하며 그 활동과 재산권 행사는 사회적 시민권이라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헌법 23조 2항), 그리고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헌법 제 119조 2항) 규제되고 조정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뒷받침하는 현행 헌법 119조 2항, 23조는 제헌헌법 정신을 이어받으면서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흔히 ‘김종인 조항’으로 불리는 119조 2항과 달리, 현행헌법 119조 1항의 경우 한국헌법사상 처음으로 너무 쉽게 기업의 경제적 자유를 개인의 자유와 동등하게 인정하고 있어 문제가 없지 않음을 지적해 두고 싶다.

 

돈을 지배하는 기업도, 돈이 많은 부자도 막무가내로 경제적 자유를 주장할 일은 아니고, 보편복지국가를 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며,그에 상응하여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적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복지주의의 실체적 의미다. 이는 다른 각도에서 시장경제, 시장적 자유를 자연적으로,’태초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 제도적인 구성물로 생각하는 것이다. 장하준이 말했듯이 정치와 분리된 경제는 없고, 자유시장은 정치적 개념일 뿐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thing1 ).

그리하여 사회적 기본권은 자유권적 기본권과 분리불가능한, 통합된 보편적 권리 목록으로 보아야 한다.이런 통합적,또는 총체적 시민권론은 자본권력의 자유에 우선권을 주면서 ‘정치에서 분리된 경제’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공사이분’론과 대립되는 것이다.( 이병천, 시민정치와 진보의 미래-공화국의 생환을 위하여, <시민과 세계>, 16, 2009 pp. 24- 25 ). “그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적 기본권을 자유권적 기본권에 단순히 덧붙여진 것으로 보고, 입맛대로 더할 수도 뺄 수도 있다고 본다. 바로 이것이 복지정치에서 선별주의 대 보편주의 대립의 실체적 내용이다. 물론 시장경제에서 경쟁은 일어나며 그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시장경쟁은 살벌하게 맨땅에서 헤딩하는 야만적 서바이블 경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모든 구성원에 사회적 시민권을 보장하는 토대위에서, 그 토대를 깔고 이루어지는,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자들’간의, 늘 패자부활전이 있는 건설적 경쟁이다. 사회적 시장, 사회에 착근된 시장이란 바로 이런 시장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기업주, 부자가 쉽게 호락호락 헌법에 따라 국민대중에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는가?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보편적 복지운동은 삼성을 꼭지점으로 하는 특권 재벌이 사회적 책임기업, 시민기업화이 되도록 하는 선의의 다툼을 우회할 수가 없게 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지와 경제는 둘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보편복지국가 운동과 재벌개혁을 필수 과목으로 하는 경제의 민주적 선진화, 시민경제 운동은 둘이 아니다. 그 다툼이 공멸이 아니라 공생으로, 더 높은 사회통합적 균형에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복지 동맹과 몇가지 딜레마

 

바로 이를 위해 ,사회통합적 보편복지를 위해 우리의 미래의-지금은 아니다-시민적 동료과 될 ‘그들’에 대항하여 보편복지 길을 가능케 하는 ‘우리’의 구성, 또는 복지동맹의 문제가 제기된다. 근래 복지동맹 논의는 주로 상층 동맹( 정치조직이나 제도정당)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사회경제계층 더 정확히 사회경제적 “위험범주” 수준으로 내려가 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스웨덴과 영국 경험을 비교한 김영순의 연구가 훌륭하다. 그녀는 이 연구를 통해 보편적 복지국가의 조건,또는 그 한국적 함의를 다음 세가지로 정리한다. (“보편주의적 복지국가를 위한 복지동맹: 조건과 전망” ,<시민과 세계>, 29호, 2011). 첫째, 노동자 계급의 권력자원이 커야한다. 둘째, 중간층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해야 한다. 셋째, 여성친화적이어야 한다. 이와 함께 그녀는 또 한가지 ,대륙유럽에서 보편적 복지국가가 실패한 사실에 대해 흥미로운 교훈을 지적하고 있다. 그 실패는 노조와 사민주의 정당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계급을 배제하고 노동자계급과 빈곤층에 더 많은 것을 재분배하려는 노조, 또는 사민당의 급진주의적 분파들의 야망 때문이었다.이것이 보편주의가 아니라 계층화된 복지국가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복지동맹의 정치에 대한 또 다른 진전된 논의는 윤도현과 박경순의 연구( <한국의 복지동맹>,2009)에서 볼 수 있다. 이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계급과 위험범주를 잘 구분하는 것이다. 양자는 매우 다른 범주며, 복지연대에서는 계급보다 ‘공동의 위험’이라는 공통된 이해가 더 중요하다. 이 연구에서는 복지동맹의 우선 전략으로 다음 세가지가 제시된다. 즉 1) 선보편적 사회서비스개혁, 후사회보험 및 공적 부조개혁, 2), 선사회보험 ㆍ공적부조개혁, 후보편적 사회서비스 개혁, 3) 보편적 사회서비스 개혁을 전략중심에 두되, 사회보험과 공적 부조에 대한 부분적 개혁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보편복지를 중심에 두는 1) 또는 3)안이 한국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3)안은 가장 바람직하긴 하나 중간층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부담을 안게 되는 반면에, 1)안은 중간층의 동의를 얻어 복지동맹의 가능성을 높이지만 한동안 저소득층과 실업자의 생활불안정을 방치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고 지적한다.

위의 논의들은 강한 노조, 강한 사민당이 꼭 보편복지 성공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한국이 보편복지국가로 가는 것이 꼭 난망한 일만은 아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공적인 보편복지 동맹, 또는 복지연대 길이 숨차게 가파르다는 것도 잘 말해준다. 먼저, 중간층을 복지동맹 속에 들어 오게 하는 것은 보편복지 동맹 성공의 매우 중요한 관건이다. 그렇다고 여기에만 치중하면 보편복지를 가장 필요로 하는 집단과 거리가 생길 우려가 있다. 여기에 복지 동맹 정치에 첫 번째 딜레마가 존재한다.

 

둘째, 전통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를 넘어 여성친화적, 생태친화적 복지국가로 가는 복지동맹 정치가 제기되고 있다. 아다 시피, 이 문제를 둘러싸고는 진보 대 진보의 대립이 있다. 어떤 쪽은 노동민주주의 문턱도 넘지 못했는데 무슨 놈의 “에코페미니즘”이냐고 반문한다. 다른 쪽으로는 한국사회 특유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과제를 끌어 안아야 하는 견해를 개진한다. 그래야 복지연대의 폭도 확장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후자쪽이며 후기산업사회적 보편복지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졸고, “자유화 양극화 시대와 무책임자본주의”, <아세아연구>, 2005, 48/3, p.66). 그러나 여기에도 딜레마가 없지 않다. 이는 특히 일자리 문제에서 예리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보편복지 정치동맹은 이 딜레마도 잘 넘어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생태적 복지진보는 단지 당위만이 아니라, 생태적 ‘일자리 기적’의 한국판을 제시함으로써 ‘토건 진보’, ‘원전 진보'(?)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스웨덴식 보편복지국가의 경로에서는 김영순의 지적대로 노동자 계급의 권력자원이 컸다.중간층 문제, 여성ㆍ생태문제는 강한 생산직 노동 중심이 존재하면서 다른 계층,다른 이슈를 복지 연대로 끌어안고 합류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그런 권력자원이 없다. 대기업 정규직노동자는 노동 진영안에서는 가장 강한 조직역량을 갖고 있으나 자신들의 단기적 이해를 넘어 노동자 연대를 이루며 장기적인, 보편적인 복지국가를 추구할 유인이 별로 없다. 그들은 포괄적 이해를 갖기 보다 기업별 노조틀안에 머물면서 기업 복지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업별 노조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살아있는,낡은 유산이며 우리는 이 유산을 안고 세계화 격랑속에 빠졌다.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의 복지국가 운동은 ‘노동없는 민주화이행’이후 다시 또 ‘노동없는 복지국가’ 길로 가고 있는 상황이다. (신정완, “스웨덴 연대임금정책의 정착과정과 한국에서 노동자 연대강화의 길”, <시민과 세계>, 18, 2010).여기야 말로 한국 보편복지국가 길의 가장 큰 빈 구멍이며 그 승패는 이 빈구멍에 대한 기능적 대체역할,특히 ‘가치동맹’형성 역할을, 복지국가운동에 나선 시민정치 세력들이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적 복지국가의 길: “리얼” 보편복지, 참여민주주의, 시민적 대항권력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논점일수 있는데,보편복지와 시민참여 민주주의의 상호 관계 문제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나는 이를 두가지 문제의식을 갖고 제기한다. 첫째, 복지국가는 아래로부터 힘이 추동해서 능동적으로 갈 수도 있고, 위로부터 시혜적, 수동적으로, 즉 “낙수효과식 복지”로 갈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사회적 시민권도 능동적(active) 시민권과 수동적(passive) 시민권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의,또는 연대조차도 주도방식과 권력구도에 따라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수동적 사회 시민권에서는 약한 ,수동적 민주주의와 수동적 복지국가가 결합될 것이다. 나아가 이는 일회적 사안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사회경제구성, 정치구성의 근본 특성을 경로의존적으로 규정해 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참여 민주주의를 복지국가 의제로 환원불가능한 별개의 기본 가치로 강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 복지국가를 밀고 갈 아래로부터 힘, 정치적 주체력을 이미 주어져 있는 사회경제적 집단, 기성의 것으로 사고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시민주체, 민중주체를 민주적으로 활성화시키고 부단히 재창조해 가야 한다. 즉 주체를 동태적 개념, 과정의 개념으로 사고해야 한다.

 

이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복지를 단지 현금가치나 서비스가치로, 나아가 사회경제적 정의의 관점만으로도 제한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노동대중, 시민대중의 집단적 주체적 행위력을 강화하고 활성화시키는지, 어떻게 현존하는 심대한 권력 불균형을 깨트리고 계급권력과 국가권력 구조의 재편을 가능케 할 정치적조건을 만드는지에 주목하는 것이다. 즉 그 정치적 정의로서의 가치 , 정치자본 축적으로서의 가치에 주목하는 것이다. 복지체제가 시민적,민중적 대항권력의 형성과 확장(civic empowerment, social empowerment, )에 어떻게,얼마나 기여하는지에 착안해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유토피아 보편복지를 넘는 “리얼”한 시민적 보편복지정치다.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발상인지는 생산,생존수단에서 분리되고 그 접근권이 제한되어 있으며, 시장의 바다에서 나날의 노동과 생활에 지쳐 떨어지는 일반 대중들을 생각하면 곧 바로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지적이 경청할 만하다.

 

” 관대한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노동자들에게 고용관계의 중요한 탈출구를 제공할 수 있으며 이는 자본주의 계급관계 내 권력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바꿀 것이다” ( 에릭 라이트,”기본소득,사회적 지분급여 계급분석”, <분배의 재구성>, 나눔의 집,2010,p.146 )

 

” 내 주장은 좋은 시민이 되는데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내가 우려하는 것은 시장에 연루되면, 유능한 민주적 시티즌십 능력을 발전시키고 유지하고 행사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가 구축(驅逐)당한다는 것이다.” ( S.White & D.Leighton eds., Building a Citizen Society, 2008, p.125 )

 

보편복지는 그 자체만으로 불가결한 기본가치를 갖고 있으나 그 정치적 의미를 새롭게 봐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우리는 보편 복지국가를 추구하지만 오직 그것만을 고립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기본권의 결핍만이 문제는 아니다. 가장 중차대한 문제는 그 기본권의 결핍과 불평등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적 불평등으로 전환됨으로써 우리가 인간적,시민적 존엄성을 잃는 것이다. 설사 부와 소득에서 일정하게 불평등한 조건에 놓인다 해도 우리는 동등한 인간과 동등한 시민으로서 동등한 존엄성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보장받고 상호 인정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시민공동체에서 살아야 한다. 너와 내가 서로에게 동등한, 존엄한 인간으로서, 동등한 시민적 동료로서 서도록 하기 위해, 불평등을 일정 범위 내로 통제해야 하며, 경제적 불평등과 독점이 사회적 ㆍ정치적 불평등과 사회정치적 ‘지배’로 전환되지 않게 해야 한다.

 

시민정치적 관점에서 볼때 보편복지의 중요성은 참여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는 물질적 기초라는 데서 주어진다. 또한 시민대중의 참여민주주의, 참여정치의 기초없이는, 아래로부터 시민적,민중적 대항 권력의 기반( countervailing power base )없이는 보편복지는 말의 성찬으로, 단지 유토피아로, 기껏해야 위로부터 던져 주는 시혜적,낙수효과 복지로 떨어질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단지 하나의 사안, 한 시기의 문제를 넘어서 이 땅에 사는, 살아야 하는 우리들 살림살이의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영구적 속성으로 고착화될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시민적,민중적 대항권력진지의 형성이라는 견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나는 말한다. 보편복지없는 참여민주없고 참여민주없는 보편복지 없다라고. 나는 이런 발상을 보편복지와 참여민주가 맞물리면서 동행, 상생하는 시민적 또는 민주공화적 보편복지’론이라 부르고 싶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새롭게 떠오른 보편적 복지국가의 물음, 그 “리얼”한 시민적 길의 물음이란 다름아니라, 우리가 산업화와 민주화이후, 근대화 50년의 시점에서 앞으로 오래 오래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어떻게 공동의 나라,민주공화의 나라를 이룰건지, 이를 위한 시민적 주체와 시민적 대항권력 진지를 어떻게 구성할건지 하는 새 희망이 담긴 문제설정이다. 시민적 복지국가란 우리 구성원 개개인이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그 사회경제적 삶과 정치적 삶, 문화적 삶에서 존엄한 주체, 서로 주체가 되는 공동의 나라, 개인적 삶과 공적 삶이 생동하는 활사활공(活私活公)의 활력을 창출하는 “리얼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상품이 아니다.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분투하는 김진숙에서, 그녀와 만나고 연대하기 위해 분노하며 ‘희망버스’를 타고가는 사람들의 행렬에서 내가 소통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마음, 시민적 복지국가의 그 푸른 희망이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 <시민과 세계>공동편집인

 

* 이 글은 2011년 7월 15일,  프레시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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