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60] “12월 19일, 투표율 80%를 만들어내는 길은?”

[시민정치시평 60]

 

 “12월 19일, 투표율 80%를 만들어내는 길은?”
: 프랑스 대선을 보는 3가지 관점

 

좌세준 변호사     
     

프랑스 대선의 ‘투명 투표함’이 화제가 되고 있다. 프랑스 대선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기호’ 몇 번 이런 것도 없어서 사르코지 세 번째, 올랑드 아홉 번째, 녹색당의 에바 졸리 첫 번째, 이렇게 포스터 붙이는 순서만 있고 이 순서도 제비뽑기로 정한다는 소식(<경향신문> 2012. 4. 25. ‘목수정의 파리통신’)까지, 먼 나라 프랑스 대선이 지구 반대편에 사는 우리들에게 관심과 화제가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나 그 답을 안다. 12월 19일 목요일. 일요일이 아닌데도 달력에 빨간 색으로 인쇄되어 있는, 5년 만에 꼭 한 번씩만 있는 바로 그날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프랑스 대선을 보는 시각에는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와는 제도와 정치 환경이 다른 프랑스의 대선을 우리나라의 그것과 맞비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다음 3가지만은 짚고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투표율 –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4월 23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 ‘어’하고 입이 벌어졌다. “투표율이 80%를 웃돌 것”이라는 프랑스 대선 1차 투표 결과를 알리는 인터넷 기사. 부활절 휴가에다 일요일에 치러진, 게다가 투표 당일 비가 내렸다고 하는데, 80%라니. ‘80%’의 투표율은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투표율이 있었던가? 자유당 시대까지 올라가지는 말자.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이 가라앉을 무렵 실시된 1987년 대선에서 89.2%, ‘경천동지’할 사건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YS가 당선된 1992년 대선에서 81.9%, ‘국가 부도’ 속에서 ‘헌정 사상 선거를 통한 첫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1997년 대선에서 80.7%. 이게 끝이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치러진 대선, 국회의원 총선 투표율이 80%를 넘어선 적은 한 번도 없다. 선거 전날 밤 ‘지지 철회’의 ‘몽니’가 발생한 가운데 노무현 후보가 당선될 때의 투표율은 70.8%. 그리고 현 대통령은 유권자의 63%만 투표한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런 식의 투표율 막대그래프가 계속된다면 올 12월 치러질 대선 투표율 역시 70%를 넘기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된다.

 

프랑스 대선과 대한민국 대선 투표율의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 프랑스 혁명의 전통을 간직한 프랑스 국민들의 ‘정치적 DNA’가 우리와는 다른 것일까. 진화심리학자들이라면 이 같은 분석을 내놓을 만하다. “인간은 본래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에서 ‘동물’에 방점을 두어 읽는다면 그런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고 말기에는 뭔가 허전함이 남는다. 프랑스의 높은 투표율에 대한 정교한 정치학적 분석은 정치학자들의 몫이다. 아마도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되기보다 다양한 원인이 복합된 현상일 것이다. 특정 선거에서 높은 투표율을 보이는 현상은 어느 나라에서나 나타난다. 특정 선거에서의 이슈가 유권자들에게 민감한 것일수록 그에 대한 반응으로 높은 투표율이 나타난다. 그런데 프랑스는 1960년대 이후 대선과 총선 투표율이 꾸준히 80% 안팎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유럽 국가인 영국과 독일에 비해서도 상당히 높은 투표율이다. 이런 현상은 아무래도 ‘선거제도’와 ‘정당제도’를 포함한 정치적 환경의 차이로 설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프랑스의 투표율을 부러움 반 놀라움 반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프랑스의 높은 투표율이 상당 부분 ‘결선투표제’에서 나온다고 본다.

 

결선투표 – 그 ‘필요성’에 대하여

 

결선투표제는 프랑스 특유의 선거제도다. 2차 대전 후 프랑스는 좌우 양당이 서로 경합한 영국이나 서독 정치와는 달리 좌우 소정파의 난립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58년 드골(Charles De Gaulle)이 제5공화국을 수립한 이후이다.(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226쪽) 1958년 헌법에서는 국민의회 의원 선거에서 결선투표제가 도입되었고, 1962년 헌법에서는 대통령 직선제와 함께 현재의 결선투표제가 도입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다양한 좌우 정파들이 1차 투표와 결선투표 과정에서 정치연합을 통해 집권함으로써, 사실상 좌우 양당제와 같은 정국 운영의 흐름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프랑스의 결선투표제가 여전히 유력한 좌우 양대 정당에게 유리한 정치지형을 제공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극우에서 극좌까지 다양한 정당들이 존재하고 그 정당들에 대한 지지 또한 분산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후보가 1차 투표에서 2등을 하더라도 결선투표에서 1위를 하거나 ‘공동정부’ 또는 ‘정치연합’의 형태로 집권할 수 있다는 기대는 유권자들을 최소한 1차 투표장으로 나오게 하는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이런 결선투표제가 없다. 민주화 이후 우리 선거 국면에서 논의되었던 ‘비판적 지지’라고 하는 말, 지지와 비판이라는 이 ‘형용 모순’의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보라. 단판 승부, 단 한 사람만 되는 선거에서 내가 찍는 후보는 떨어질 게 확실하니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그래도 당선 가능한 후보를 밀어주자는 유권자들의 심리를 반영한 용어가 아니었던가. 그나마 ‘비판적 지지’라는 심리마저 사라져버린 선거라고 한다면 유권자들이 투표장으로 나가지 않는 것을 오로지 그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이들은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투표를 하지 ‘못하는’ 것인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나 정당의 ‘정체성’을 잠시 뒤로 하고, 차악과 손잡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깨는 것은 바로 이 결선투표제의 도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결선투표제 도입에 대한 논의가 특정 정치인의 대통령 당선을 위한 정략적인 논쟁에 그쳐왔다면(한겨레 1989. 10. 6.자, 1면, 1996. 8. 15.자, 4면), 이제는 유권자들의 다양한 선택이 1차 투표를 통해 표현되고, 결선투표를 통해 그 선호의 조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결선투표제’의 제도 본질적 장점에 주목하는 논의로 이행되어야 한다.

 

연대의 정치 – 그 ‘가능성’에 대하여

 

이번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에서 올랑드 후보가 당선되면 17년만의 ‘좌파’ 대통령이자, 프랑스 역사상 2번째 좌파 대통령이 된다. 잘 알다시피 프랑스의 첫 좌파 대통령은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rand)이다. 1981년 5월 10일 프랑스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미테랑은 예상을 깨고 중도 우파의 현직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Valery Giscard dEstaing)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당시 미테랑은 1차 투표에서 데스탱(28.3% 득표)에게 2.5%를 뒤지고도(25.8% 득표) 결선투표에서 데스탱을 3%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프랑스 헌정 사상 첫 좌파 대통령 미테랑을 만든 것은 1차 투표에서 4위를 한 공산당 조르지 마르셰(15.3% 득표)가 결선투표에서 사회당 후보 미테랑 지지를 선언한 것이 결정적 힘이 되었다.

 
1981년이면 우리 언론이 ‘중공’, ‘북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다. 미테랑은 대선 직전인 1981년 2월 중국과 북한을 방문하는데, 당시 우리 신문들은 “북괴 김일성은 14일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사회당 당수에게 북괴와 프랑스 사회당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켜나갈 것을 다짐했다”는 보도를 싣고 있다.(동아일보 1981. 2. 16.자, 1면) 이런 시기였으니만큼 당시 미테랑의 당선에 대해 우리 신문들이 “프랑스와 좌파 정권,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어감”, “프랑스에 불확실성의 시대가 이제 시작된 느낌”(동아일보 1981. 5. 11.자, 1면)이라는 논평을 낸 것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그러나 당시 대선에서 미테랑을 공개 지지했던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의 『슬픔이여 안녕』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었으니, 미테랑에게 붙은 ‘좌파’라는 수식어에 대해 과잉반응을 보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이번 프랑스 대선 결선 투표에서도 좌파연합의 멜랑숑(11. 1%), 녹색당의 에바졸리(2.31%) 등 좌파계열 정당들은 사회당 올랑드 후보 지지를 직간접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반면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사실상 ‘최고의 승자’라는 평을 받는 극우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Marine Le Pen, 17.9% 득표)은 사르코지가 쏟는 구애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사르코지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선언할지는 명확하지 않다. 올랑드 후보가 결선 투표에서 우파의 사르코지를 넉넉히 누르고 당선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회당의 정파연합 우위에서 비롯된다.

 

20여 년 전 헌정사상 처음으로 ‘좌파’ 대통령을 당선시켰던 프랑스 국민들은 이번 대선 결선투표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18세 때 미테랑의 연설을 듣고 정치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는 올랑드 후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은 사회당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결선투표를 통해 ‘연대의 정치’를 만들어내는 선거제도와, 1등이 아닌 4등, 5등 후보를 지지한 프랑스 유권자들의 힘이다. 5월 6일 프랑스 국민들의 선택을 지켜보자.

진보가 대선에서 이기려면?

 

프랑스 대선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2012년 대선에서 대한민국 진보세력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결선투표제’가 없다. 대선 ‘투표율’ 또한 얼마 전 치른 총선 투표율을 감안할 때 ‘80%’까지 끌어올릴 묘책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진보가 유일하게 기댈만한 것이 하나 있다면 ‘연대의 정치’다. 이것마저 놓친다면 필패하리라.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프랑스 대선의 ‘80% 투표율’은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결선투표제’라는 선거제도를 프랑스 좌파의 ‘정치적 연대’의 기회로 활용한데서 나온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지난 총선의 ‘야권연대’의 차원을 넘어 진보세력의 이루어내야 할 ‘연대의 정치’의 의미를 묻는 이들에게 나는 프랑스 좌파의 역사적 경험을 되짚어 볼 것을 권한다. 1960년대까지 최고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대중정치가를 갖지 못했던 프랑스 공산당(PCF Parti Communiste Français)과, 조직은 없고 명망가들만 많았던 프랑스 사회당이 <공동정부강령>이라는 좌파 연합을 달성한 것은 1972년 6월의 <공동정부강령>이었다.(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232쪽) 1981년 미테랑의 집권은 바로 이때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이번 12월 대선에서 우리들이 가지지 못한 제도적 한계를 넘어, 진보세력이 진정한 의미의 ‘연대의 정치’를 탄생시킨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80%’ 투표율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참여사회연구소가 2010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들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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