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본 연구소] ‘민주적 애국주의’ 진보 공론의 장으로

‘애국주의 릴레이 논쟁’이 남긴 것은…
낡은 관념? 연대 구심점?
 

   ‘민주적 애국주의’ 진보 공론의 장으로

지난 7월23일 <한겨레>가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는 것’이란 제목의 학술지 기고문을 소개하면서 시작된 ‘애국주의 논쟁’이 네 차례에 걸친 학자들의 후속 공방을 거쳐 지난주 일단락됐다. 권혁범(대전대)·장은주(영산대)·이택광(경희대)·신진욱(중앙대) 교수가 참여한 이번 논쟁은 ‘뉴라이트 교과서 파동’과 ‘2008년 촛불집회’ 등 최근의 정치적 이슈들과 연계된 민감한 주제를 다뤘던 만큼, 학술 논쟁으로는 드물게 학계와 사회운동단체, 일반 독자들의 폭넓은 관심을 끌었다. 학자들 가운데는 전자우편으로 논쟁 참여를 타진하거나 아예 기고문을 보내온 경우도 있었다.

네 차례의 날선 공방이 오갔지만 논쟁의 지점은 ‘민주적 애국주의의 가능성’이란 전선 너머로 확대되진 않았다. 그 가능성은 다시 두 개의 차원으로 나뉘는데, “애국주의가 민주적 성격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논리적 차원과, “그 민주적 애국주의가 대한민국에서도 가능한가”라는 실천적 가능성의 차원이다.


네 사람의 주장을 정리하면, 우선 권혁범 교수는 민주적 애국주의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이택광 교수는 민주적 애국주의론에 나타나는 논리적 허점을 파고들면서 이런 권 교수의 논지를 뒷받침했다. 반면 장은주·신진욱 교수는 민주적 애국주의가 논리적·실천적 차원에서 모두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장은주 등 “국가는 정치공동체”
권혁범 “세계시민주의 로 가야



권 교수는 무엇보다 애국주의에 내장된 전체주의적 위험을 우려했다. 민주적으로 제어되는 애국주의일지라도 국가적·국민적 위기 국면에서는 언제든지 인권과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전지구적 이동과 소통이 증대하면서 나타난 문화적 상황에서 애국주의는 더는 현실에 부합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다며 “차라리 세계시민주의를 통해 애국주의의 위험한 물결을 견제하고 제어하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권 교수의 비판에 대해 장은주 교수는 국가와 애국주의에 대한 권 교수의 “형이상학적·도덕주의적 이해” 방식을 문제 삼았다. 민주적 애국주의에 대한 권 교수의 냉소는 국가를 ‘괴물’로, 애국주의를 ‘반드시 부패할 수밖에 없는 이념’으로 간주하는 형이상학적 사고의 산물이란 것이다. 그는 대신 애국주의를 ‘정치적 실천을 위한 우회 불가능한 지반’으로 규정했다. 정치라는 것은 “사회 성원들이 집합적 의견과 의지를 형성해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인데, 이때 “국민국가와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연대의식”은 오늘의 조건과 한국적 맥락에서는 정치적 실천을 위한 필수적인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왼쪽부터 권혁범, 장은주, 이택광, 신진욱
 
 
장 교수는 이런 민주적 애국주의가 대한민국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로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명문화한 대한민국 헌법을 꼽았다. “우리나라가 스스로 민주공화국이라고 선언하는 헌법을 가지는 순간, 그 헌법은 지배의 합리화와 민주적 법치주의의 완성을 향한 내재적-규범적 동학을 발현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장 교수의 주장을 “논리적 혼란의 산물”로 규정하면서 담론의 ‘내파’를 시도했다. 장 교수가 두 가지 당위명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인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는 명제로부터 ‘대한민국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를 아무런 매개 없이 도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대한민국≠민주공화국’인 현실명제의 난관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는 당위명제로 치환해 넘어선 뒤 이로부터 ‘대한민국 사랑’이란 윤리적 의무를 추출하는 장 교수의 논법은 어떤 타당성도 가질 수 없다는 얘기다.


다양한 이념적 편차 확인 속
“이론 논쟁에 그쳐” 아쉬움도


이 교수의 비판을 겨냥해 신진욱 교수는 민주화 이후 시민들의 정치적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며 이 나라는 극복해야 할 것만이 아니라 지켜야 할 많은 것들을 갖게 되었고, 문제 많고 불완전하지만 대한민국이 시민들이 함께 만드는 ‘내 나라’가 되어가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정치적 자의식이 성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는 나(우리)의 삶의 무대이며, 내(우리)가 주인되는 공동체라는 의식은 정당하고 중요할 뿐 아니라, “진보정치가 민중적이면서 동시에 국민적 지지를 받는 세력이 되기 위해 굳건히 발 디뎌야 할 토양”이라고 신 교수는 말한다.


네 사람의 논쟁에 대해 미국 뉴스쿨대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김만권씨는 투고문을 통해 ‘애국주의’에 대한 진보진영의 지나친 거부감을 안타까워했다. 김씨는 “애국주의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들린다면 내가 속한 정치공동체에 애정을 갖고 그 공동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도록 돕는 행위 정도로 이해해 보자”며 “진보라는 것도 결국 우리 사회가 좀더 민주적 방향으로 갔으면 하는 애정에서 시작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한 여성학자는 “‘좋은 국가(민족)주의 대 위험한 국가주의’는 지난 세기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돼 온 논쟁 주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의 접근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며 논쟁의 한계를 지적했다.


지난해 말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의 ‘대한민국 긍정론’을 비판하면서 논쟁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실장은 “헌법애국주의 같은 추상적인 담론을 곧바로 역사 해석에 적용하거나, 진보정치가 가져야 할 기준점으로 제시하는 등 무리한 주장들도 적지 않았다”며 “논쟁이 지나치게 이론적인 차원으로 경도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한겨레신문 기사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748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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