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151] 최장집의 ‘정당정치 강조’에 답한다

 

[시민정치시평 151] 


최장집의 ‘정당정치 강조’에 답한다

: 시민정치의 과잉이 대선 패배를 낳았다고?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작년 말 대선 이후 꽤 긴 시간 동안 이른바 ‘멘붕’ 상태에 빠져 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쩌면 민주진보 진영의 지난 대선 패배가 긴 안목으로 보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민주통합당이든 안철수 세력이든 진보 세력이든 집권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고 제대로 된 정치적 능력도 갖추지 못했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로는 설사 집권을 했더라도 과거보다 더 심하게 실패하는 정권이 되어 이후에는 다시는 집권 전망을 가질 수 없게 되는 상황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선 이후 이 진영 전반의 지리멸렬함과 정치적 무능을 보며, 특히 노원병 보궐 선거의 이전투구 판을 보며 더 더욱 그런 생각을 굳혀간다.

 
시민정치의 깃발을 내려야 할까?

이런 맥락에서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의 유능한 정당정치의 필요에 대한 강조가 새삼 와 닿는다. 그것은 그의 오랜 지론이기는 하지만, 최근 그가 <경향신문>의 몇몇 칼럼과 인터뷰에서 지적하는 내용을 보면 민주진보 진영이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 진영이 제대로 된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정당을 건설하고 리더십을 갖춘 정치인을 배출하는 데 실패한 탓이다(☞ 참조: 최장집 칼럼 ‘마이카벨리의 기능주의’). 이 진영 여러 정당들의 작금의 행태와 처지를 볼 때, 너무도 적절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 진영의 정치인들과 시민들의 편협한 민주주의 이해에 대한 그의 공박이 매우 통렬하다. 한 마디로 그들은 민주주의 정치와 권력에 대한 도덕주의적 이해에 사로잡혀 정치적 목적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적 수단인 권력을 적대시하는 바람에 정당과 리더십 및 통치기술을 등한시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참여경선제 도입 등 당내 민주화를 겨냥했던 정당개혁이나 온라인상의 소통 확대에만 매달렸지 제대로 된 정당조직의 건설과 정당정치의 실행 같은 참된 과제를 외면했단다. 그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시민정치’에 매몰되었던 것은 “구체적인 삶의 조건을 공유하는 사회 집단들을 대표하기 어려운 무정형의 정치”로서 결국 “짧은 사이클로 변화하는 여론과 정서의 부침에 이끌리는 포퓰리즘”일 뿐이다. 어쩌면 그는 ‘시민정치의 과잉’이야말로 지난 대선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런 지적은 평소 시민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고 또 지금도 “시민정치시평”이라는 이름의 이 칼럼을 쓰고 있는 나 같은 이에게는 정말 뼈아프다. 설사 나 같은 사람이 믿는 것처럼 시민정치가 우리 민주주의에서 수행해 온 역할과 의미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가 지적하는 대로 좋은 정당과 능력 있는 정치인이 없다면 그것만으로는 어떠한 의미 있는 사회 개혁이나 진보도 실질화되기 어렵다는 점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권력 지향을 무조건 백안시 하는 식의 정치 혐오를 버리고 필요하다면 부도덕의 오염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현실적 문제 해결 능력의 연마를 게을리 않는 마키아벨리적 ‘비르투’를 갖춘 정치가와 지도자를 육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지적에도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앞으로 박근혜 정부를 견제하고 다음 선거들에서 민주진보 진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시민정치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해 보아야 할 필요는 분명해 보인다.


확실히 작년에 치러진 총선과 대선 모두에서 시민정치는 별 달리 성공적인 운동 모델 같은 것을 만들지도 못하면서 목소리만은 컸고, 정당들도 그 요구를 수용하는 시늉을 하면서 (또는 보기에 따라서는 바로 그 때문에)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시민정치운동은 때때로 그 정체성과 독립성을 잃어버린 채 정당청치와 일체가 되어 버리는 모습도 보였다. 따지고 보면 이른바 ‘안철수 현상’의 뜨거움과 실패도 큰 틀에서 보면 미숙하기만 했던 시민정치 지향의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시민정치의 깃발을 완전히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시민정치와 정당정치의 실천적 분업 관계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를 포함해서 시민정치의 역할과 의미를 강조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당정치나 권력정치 그 자체의 의미를 부정하거나 도덕주의적으로 혐오했던 적은 별로 없다. 이병천은 시민정치와 정당정치의 ‘이중 민주주의(two-track democracy)’를 오래 전부터 이야기해 왔다. 참된 지향점이 여전히 모호하기는 해도, 정치 혐오에 편승한다고 비판받았던 ‘무소속’ 안철수조차도 정당정치의 역할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결코 한 적이 없다. 반대로 평소 역동적인 시민적 저항과 투쟁의 산물로 이해될 수밖에 없을 ‘민주화’가 민주주의의 틀이 확립된 이후에도 지속되어야 함을 늘 강조해 온 최장집도 시민정치운동의 역할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시민정치의 과잉이나 우리 민주진보 진영의 정당들이 지나치게 시민정치에 의존한 데 있다기보다는 시민정치와 정당정치의 올바른 관계 설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 있지 않을까? 성급하게 시민정치의 깃발을 내리자고 하기 전에 이 문제부터 좀 더 따져 볼 일이다.


유능한 정당정치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 같은 곳에서는 그 정당정치를 뭉뚱그려 말하면 안 된다. 내 생각에 새누리당과 그에 맞서는 민주통합당을 비롯한 민주진보 진영의 정당들은 그 정치적 권력 기반을 서로 다르게 갖고 있다.


한국 정치 지형에서 새누리당은 기본적으로 경제와 행정 영역 및 일상적 삶의 공간 전반에 걸쳐 지배적인 힘을 행사하는 대기업, 법조 관료, 주류 언론, 지역 패권 네트워크 등과 같은 ‘사회적 권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반면 민주진보 진영의 정당들은, 때때로 직접적 담지자들이나 지지자들조차도 오해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러한 사회적 권력의 지배 때문에 부당하게 제한당하고 있는 인간적 삶의 가능성을 민주적-연대적 정치의 힘으로 확보하고 확장해 보려는 이들의 ‘시민적 권력’에 토대한다. 여기서 정당정치는 그 본성상 시민정치적 지향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와 같은 경계 짓기가 늘 분명하게 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민주통합당은 영남지역주의와 결코 동일시해서는 안 될 호남지역주의에 상당한 정도로 기대고 있는데, 이 당은 너무 자주 호남 지역 유권자들의 높은 시민성을 오해하고 왜곡하여 그것을 유사 사회적 권력 자원으로 변질시키곤 했다. 수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마땅한 대안을 갖지 못한 많은 시민들의 불가피한 선택을 그 정당의 기득권에 대한 당연한 지지로 착각하기도 한다.


진보 정당들 역시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청년, 영구 실업자 등과 같이 더 절망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화한 계층의 절박한 민주적 시민권 확보 요구는 애써 외면한 채 얼마간 사회적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조직화된 대기업 노조에만 지나치게 기대왔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 정당정치의 무능함은 기본적으로 시민적 권력의 요구와 문법에 충실 하라는 참된 시민정치적 당위를 외면한 데 있다고 해야 한다.


정당정치가 민주적 권력 정치의 고유한 문법을 더 충실하게 이해하고 따라야 할 필요를 무시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심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시민정치와 (민주진보 진영의) 정당정치는 그 역할과 동학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양자는 어떤 실천적 분업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지 어떤 실체적인 대립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정당정치의 무능함이라는 것도 바로 이 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시민정치가 시민사회 속에서 감지된 불의와 부당한 지배 관계를 고발하고 그것들에 맞서는 민주적-도덕적 인정 투쟁을 벌이는 역할을 주로 한다면, 정당정치는 법치의 틀 안에서 시민들의 그 인정 투쟁의 요구를 법적-정치적 언어로 번역해 내고 제도화함으로써 사회적 관계의 구조적 변화를 추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물론 때때로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가령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가 부분적으로 정당의 역할을 대신하고 이른바 ‘소금 정당’으로 만족하려는 듯한 진보 정당들은 사실은 근본적으로 시민정치적 역할 이상을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양자는 각기 나름의 고유한 문법과 동학을 갖고는 있지만 큰 틀에서는 협력적 분업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틀을 벗어난 민주적 정당정치의 유능함이 무엇일지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민주적 시민사회의 정치적 기관이 될 정당이 필요하다

확실히 시민정치가 어떤 직접민주주의적 충동에 사로잡혀 무턱대고 기성 정당정치를 스스로가 대체하고자 하는 열망을 표출하고 반대편에서 정당정치가 그에 놀라 어설픈 포퓰리즘의 유혹에 흔들리곤 했던 것은 잘못이다. 최장집이 경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오류다. 그리고 그의 경계는 그 자체로는 옳다. 그러나 이는 정당정치를 시민정치와의 실천적 분업 관계에서 완전히 떼 놓음으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분업적 연대 관계의 더 완전하고 원활한 작동을 주문할 일이다.


정당정치가 그 본성상 무정형적이고 쉽게 비등과 냉각을 반복하는 대중들의 여론과 정서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민주적 정당정치는 그런 식의 포퓰리즘의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것이 따르고자 하는 대중들의 뜻과 열망을 그 대중들이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서로 서로>, 그것도 <보편적으로>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지향으로 번역해내고 재구성할 수 있어야만 한다. 민주적 정당정치의 유능함이란 바로 이렇게 정치적으로 번역되고 재구성된 시민들의 정의에 대한 요구를 정치적으로 관철시켜 내는 데서의 유능함이다.


시민정치와 정당정치를 단선적으로 대립시키기만 하는 이분법은, 노동자와 시민 사이의 이분법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회정치적 삶의 실제적인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어떤 형이상학적 선입견의 산물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진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런 이분법을 넘어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가능한 최대한의 시민적 존엄의 평등을 보호하고 실현한다’는 규제적 이상에 따라 이해하는, 그러니까 스스로를 <민주적 시민사회의 정치적 기관>으로 이해하는 유능한 민주적 진보 정당의 건설이다. 여기서 시민정치는 정당정치의 덫이 아니라 도약대가 되어야 한다.

 

참여사회연구소가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들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 본 내용은 참여연대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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