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칼럼(ip) 2009-09-03   7043

[칼럼] 한국의 중도주의 – 김대중과 그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너무 거칠다. 정치적 경쟁 상대와 공존하는 법, 공존을 통해 상생하는 법, 그리고 상생을 통해 ‘함께 사는 대한민국’, 모두의 나라를 가꾸는 법을 잘 모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몸을 던져 한줌의 재로 변한지 불과 3 개월만에 김대중 전대통령까지 우리 곁을 떠났다.

김전대통령은 연로하긴 했지만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슬퍼한 민주화 평생 동지인 노전대통령의 죽음, 그리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 관계의 삼중 위기상황이 큰 상처를 주어 노약한 그의 죽음을 앞당겼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함께 사는 법을 모르는 이 거친 땅 대한민국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면서 비주류 두 거인이 최후에 남긴 유지가 꼭 같다는 데 주목하게 된다. 바보 노무현은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인동초 디제이는 ’용서와 화해’라는 유지를 주고 갔다. 이 같은 유지는 이승을 떠나는 자가 묵은 업장을 훌훌 다 털어 내고 저승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종교적 메시지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대한민국 현대사와 함께 오랜, 적과 나의 광기어린 흑백 이분법을 이제는 내려 놓고 ‘적대에서 공존’으로 나아가기를 비는 정치적 비원(悲願)일 수 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사람은 공존과 화해를 모르는 흑백 이분법식 광기 때문에 실로 누구보다 큰 고초를 겪었던 비주류 정치인이었던 만큼, 우리는 그 유지가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로서 성격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공상에서 현실의 대지로 내려오면 올수록 김대중은 점점 더 큰바위 얼굴이 되어 다가 온다. 한국 현대사에서 주류 냉전반공주의 구체제와 씨름하는 길은 여러 갈래로 나타났다. 첫째, 비합법 혁명 노선, 전위당 노선이 있었다. 이것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반(反)대한민국 노선이었다. 둘째, 사회민주주의 노선이 있었다. 이를 중도라고, 그래서 여운형, 조봉암의 노선이 중도 노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극우, 극좌 사이라는 의미라면 수긍할 만 하다. 그러나 중도도 중도 나름이다. 그런데 여운형은 공산주의와 단호하게 단절하지 못했다. 반면 조봉암은 공산주의와 단호하게 결별하고 사민주의 노선을 선택하고 실천했다. 선거에서 대중의 상당한 지지도 얻었다. 그런 그였지만 이승만의 광기에 의해 끝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셋째, 아예 주류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을 살 길이라고 본 ‘변형주의’ 노선을 빼놓을 수 없다.

김대중은 위의 갈래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나에게는 김대중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에서 ‘진보적 중도실용’ 노선을 창조적으로 개척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민주주의, 대중경제, 남북 화해와 평화 통일의 세 바퀴로 가는 중도를 내세웠다. 이 노선은 사민주의보다는 더 현실적이었으며, 딱 부러지는 이념보다는 실용을 중시했다. 또 이 노선은 한국의 전통 진보주의에 아주 뿌리깊은 저 자주(NL)파처럼 민주주의와 대중, 서민경제를 자주 및 평화 통일 운동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삼자간의 원만한 선순환을 지향했다. 김대중식 중도주의는 그의 말 그대로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균형’이 낳은 산물이었다.

디제이는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피투성이가 되어, 온 몸으로 세 바퀴 중도 노선을 밀고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이 성공했음은 물론, 주류 냉전반공 권위주의 대한민국에 맞서는 양지의 대한민국을, 비주류 탈냉전 민주평화의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정치인이 되었다. 나아가 그는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경계를 넘어서 세계속의 정치인으로 우뚝 섰다.

그렇지만 97년 외환 위기 국면에서 김대중의 집권은 정치적 민주화 진전과 남북 화해의 길을 개척함과 동시에, 한국경제가 IMF 관리체제하에서 경제적 자유화와 시장 보수 혁명으로 가는 길을 열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중경제론은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디제이노믹스’로 굴절됐다.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IT강국의 초석을 놓았으며 기초 복지까지 마련했지만, ‘관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고삐풀린 시장 권력의 힘이 사회경제적 민주와 공공성을 눌렀다. 이는 물론 이전 김영삼 정부의 실패, 그리고 시대적 한계탓도 크다. 그러나 김대중이 ’IMF 맨’이 되어 금융 세계화와 ’워싱턴 컨센서스’를 추종하고 미국식 모델을 한국의 선진화 모델로 간주하기에 이른 것은 위태로운 선택이었으며, 그 중도 실용 노선의 커다란 내적 모순이자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롭게도 노 전 대통령의 서거 후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큰 폭으로 추락했었는데, 김 전대통령의 서거 후에는 오히려 지지율이 크게 올라 가고 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놀랍게도 이명박 정부가 김전대통령의 국장을 받아 들이고 북한 조문단을 접견한 것이 ‘통 큰 정치’라며 호평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최근 이 정부가 펴고 있는 알량한 ‘친서민 중도 실용’ 전략이라는 것도 제법 먹히고 있다고 한다. 물론 경제 회복이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도대체 이런 현상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바보 노무현이 흘린 피의 효과는 너무 빨리 소진되고, 인동초 디제이가 남긴 ‘화해와 용서’의 정치적 효과와 과실은 오히려 이명박 정부가 몽땅 챙겨 가고 있는 느낌이다. 대한민국 정치판은 단지 거칠 뿐 아니라 너무 싸늘하기까지 하다. 이명박 정부는 온갖 모순들을 내장한 채 배제와 통합의 양동 작전으로 일종의 ‘보수적 진지전’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길게 내다 보면서 장기집권 전략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반면에 민주진보 세력은 주도권을 빼앗긴 채 여기 저기서 각개 전투를 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러다가 각개 격파당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지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10 년이 역사의 막간으로, 진짜 ‘잃어버린 10년’으로 넘어 갈지도 모른다.

김  전 대통령은 ‘용서와 화해‘라는 유지와 함께 또 하나의 유지, 즉 ’민주대연합‘이라는 정치적 유지를 남겼다. 오늘날 연합 또는 연대는 불통-정글 보수 세력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한 깃발이 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연합이냐‘ 하는 것이다. 김대중이 남긴 대연합의 유지는 민주진보세력의 활로를 여는 방안이 될 수도 있지만, 자칫 아전인수격으로 받아들이면 현재의 곤경을 묶어 놓는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연합‘ 유지 자체에 아쉬운 지점이 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자신을 열어 ’나를 딛고 넘어가라‘는 한마디, 민주당이 아집을 버리고 기득권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한마디를 분명히 하고 떠났더라면 지금처럼 분분하지 않고, 새 민생민주 연합의 길, 민주-민생-평화의 대안의 길은 훨씬 더 밝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더라면 그 파장은 컸을 것이다.

살아 있는 우리에게 ‘행동하는 양심’,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을 호소한 두 거인, 87년 체제를 상징하고 그 진보적 가능성을 고도로 실현한 두 비주류 동시대 정치인이 떠났다. 그리하여 한 시대가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새 시대는 혼돈에 빠져있으며 지금 대한민국호는 거꾸로 가고 있다. 미국에 오바마 정부가 등장한 데 이어서 일본에도 민주당의 시대가 도래했는 데, 같은 이름표를 단 한국의 민주당만 길을 잃고 외톨이 신세가 되고 있다.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정치 지형에서 중도의 자리를 보수에 내어 주고는 승산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프레임 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고 안이하게 ‘민주 대 반민주’를 되뇌이며 답습하는 중도로는 전망이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세계화 시대 불통-정글 보수주의에 맞설 수 있는, 디제이와 함께 디제이를 넘어서는 진보적 중도 실용과 창조적 연합의 새 길, 다시 새롭게 바닥에서 시작하여 서민 대중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대한민국판 ‘생활정치’의 새 길은 어디에 있을까. 칠흙 같은 어둠 속으로 먼 길을 향해 떠나는 길 손에게 주인장이 등잔불을 건네 주었다. 길손이 그 등잔불을 건네 받으려 하자 주인장이 등잔불을 훅 불어 꺼버렸다. 이 뭐꼬 ?



<이병천 |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 ‘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

* 이 칼럼은 한겨레 9월 3일자에 실린 글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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