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칼럼(ip) 2009-09-21   6818

[칼럼] 정운찬의 변신 혹은 실수

정운찬 교수가 이명박 정부 총리로 변신하는 길을 선택했다. 사방에서 ‘어찌 이런 일이’ 하며 놀라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또 배신감을 표시하고 있다. 나 역시 많이 놀랐다. 학자 정운찬은 또 다른 정치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구나, 알다가도 모를 게 정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미처 몰랐던 부분이다.

놀라운 일은 또 있다. 그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과 깊은 상의없이 전격적으로 그런 결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정운찬은 20년 동안 가깝게 알고 지내며 사실상 정치적 ‘멘토‘역할을 해온 김종인 전의원에게 개각 발표 전날에야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또 김상조, 전성인 등 직계 제자들은 아예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큰 결정은 고독하게 내리는 법이라지만, 이 역시 놀랍고 우려되는 부분이다.

정치적으로 가장 아쉬운 일은 민주 진보 진영이 아까운 인물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다시 그 무능력을 보여준 셈이다. 이념, 정책 모두 중요하지만 정치에는 역시 인물이 중요하고, 휘발성이 매우 높은 우리 정치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동안 민주 개혁 진영에 속해 있던 적지 않은 중요 인물들이 보수쪽으로 변신했는데 정운찬 사건은 이 ‘변형주의’ 흐름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경제학계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개혁적 케인즈주의로 불리는 그의 중도 개혁적인 학문적 지향, 원칙에 충실하려는 자세, 깨끗하고 포용적인 인품 등 어느모로 보아도, 정운찬과 이명박 정부는 간극이 너무 크다. 아무래도 민주 진보 쪽이 정운찬에 어울리는 자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 정운찬과 이명박 대통령은 서로 타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이런 식의 깜짝 만남이 이뤄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에서 정운찬은 여러 모로 잘 잡아 두어야 할 요긴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른바 친서민 중도실용 전략이라는 포석, 충청 지역의 포섭, 한나라당 내부에서 박근혜계의 견제 등 이른바 ‘1타 3피’의 묘수다. ‘MB 최고의 인사‘라는 칭찬까지 있다. 그렇게 보면 정운찬이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이 만남은 꽤 오래갈 지도 모른다. 지지율이 50%에 육박했다고 하고 더 오를 것이라는 예측조차 있다. 정운찬이 이명박 정부의 중도 실용 전략에 힘을 더 실어 주는 역할을 하고, 또 운이 아주 좋다면 대권을 향한 꿈이 정말 현실이 될지도 알 수 없겠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운명의 여신은 능력(virtu)을 가진 인간에게 눈길을 주는 법인데,  정운찬은 정치적 경험 자산이 너무 부족한 초보 운전자임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자기 세력 기반도 없다. 현 시점에서 보면 이대통령은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렸지만 정운찬은 너무 위험한 모험을 한 게 아닐까. 앞으로 정치인으로 갈 길은 먼데, 당장 학자로서 치르는 희생은 너무 크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앞길은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총리 후보자 정운찬은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당장 청문회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4대강과 세종시 사업에 대한 소신, 세금 탈루, 위장전입, 병역, 논문 이중게재 등, ‘5대 의혹’이 그를 시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청문회와는 관계없이, 정운찬의 정치인으로의 변신에서 한 가지 정운찬답지 않은 지점, 지식인으로서 정운찬의 ‘실수’를 지적하고 싶다.

정운찬은 총리 지명 직후 연 기자 간담회에서 “대통령과 나는 경제를 보는 시각이 크게 차이가 없다”라는 말을 했다. 과연 그런가. 또 청문회에 대비한 국회 서면 답변서에서는 “농성자의 화염병 투척이 용산 참사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하여 검찰 입장을 옹호하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지식인 정운찬은 자신의 저서 <한국경제 아직도 멀었다>에서, 부와 소득의 편중 분배가 불황의 원인이기 때문에 이런 체제를 옹호하는 낡은 사상을 깨는 것을 소명이라고 믿은 케인즈, 그리하여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진보적인 사회사상가“인 케인즈의 메시지를 자신의 것으로 전달한 바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경제사상 기조인 개혁적 케인즈주의가 노무현 전대통령도 좋아했던 리프킨 그리고 기든스와 사상적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적어도 지식인 정운찬이라면 지식인답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게 아니라 확실히 정리해서 왕년의 ‘개혁적 케인즈주의’였던 자신의 생각도 ‘MB코드’로 변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병천 |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 ‘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

* 이 글은 프레시안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921142142&section=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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