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503] 정치 경쟁은 패자를 배제할 필요가 없다

정치 경쟁은 패자를 배제할 필요가 없다

외로운 사람들의 시대, 정치가 해야 할 일 下

 

김만권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우리는 얼마나 외로울까? 

 

앞선 칼럼(“나는 외로움 때문에 선거제도 개혁을 바란다”)에서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탈산업사회에 만연한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아렌트의 경고도 간략히 전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외로운 것일까? 도대체 외로움은 어떻게 생겨나며 어떤 이유로 정치적으로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일까? 더하여 선거제도 개혁이 외로움을 다루는데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더 나은 삶의 질’ 조사 지표에는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가’라는 항목이 있다. 사회적 연계를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다. 그래서 이 항목은 외로움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지표로도 쓰인다. 외로움이 원래 ‘도움을 청할 곳이 없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타당한 쓰임새다. 2017년 이 조사에서 대한민국 사람들은 76%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OECD 41개국 중 최하위였다. OECD 국가 평균이 89%이고 바로 위 40위 멕시코가 80%였음을 확인해 보면 더욱 씁쓸해진다. 외로움부 장관을 임명한 영국은 93%였다. 

 

2018년 4월 한국리서치에서 만 19세 이상 1000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웹조사 결과도 비슷하다. 응답자의 7%가 ‘거의 항상’ 외롭다고 했고 19%는 ‘자주’ 외롭다고 답했다. 26%에 이르는 사람들이 ‘상시적으로’ 외롭다고 답한 것이다. 놀랍게도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가’라는 항목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들과 거의 비슷한 비율이다. 특히 소득이 낮은 사람들, 특히 200만 원 이하의 응답자들은 39%가 ‘거의 항상’ 혹은 ‘자주’ 외롭다고 답한 반면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답한 이들은 11%에 불과했다. 

 

더불어 20대 청년들 중 40% 이상이 상시적으로 외롭다고 답한 반면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답한 비율은 14%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눈에 띈다. 대한민국은 가난할수록 외롭고, 젊을수록 외롭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다 알고 있다. 청년빈곤이 대한민국의 심각한 문제임을. 더 암담한 건 젊은 시절 빈곤하면 나이 들어서도 빈곤하다는 통계들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등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빈곤이 생애빈곤이 된다는 뜻이다. 탈산업 소비사회에서 소비력의 결여를 의미하는 빈곤이 외로움과 서로 연계되어 있음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청년세대는 외로움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자본주의, 경쟁, 그리고 외로움 

 

돌이켜보면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우리사회는 본격적인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겪었다. 구제금융의 아비규환 속에서 ‘경쟁’과 ‘생존’은 우리 사회전체를 대변하는 가치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경쟁에서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이란 자본주의 원칙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갑질’은 승자독식이 병리적으로 드러난 현상에 가깝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다른 사람의 인격까지도 살 수 있다고 믿고 있고, ‘을’조차 ‘병’에게 ‘갑’질을 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갑’이 ‘을’을, ‘을’이 ‘병’을, ‘병’이 ‘정’을 좌절시키고 고립시키는, 외로움을 만드는 연쇄 고리가 사회 곳곳으로 뻗어가고 있다. 지금 청년세대는 경쟁과 생존이란 가치가 지배하고, 그 가치가 만들어내는 병리적 현상 속에 자라난 첫 번째 세대다. 이들이 통계적으로 모든 세대 중에 가장 외로운 세대로 드러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실제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외로움’이란 말이 탄생하고, 자주 쓰이기 시작한 시기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려 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외로움의 탄생 및 확산과 자본주의 발전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경쟁을 통한 이윤추구 속에서 확장된다는 사실, 당대의 자본주의가 (아담 스미스가 주창한 완전경쟁 시장에서 벗어나) 독점적 자본의 승자독식의 세계가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이런 승자독식의 세계에서 패자들은 운명은 뻔하다. 소비적 자본주의 세계에서 연이어 패자가 된다는 것은 쓸모가 없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고, 이는 바우만이 묘사하듯 쓰레기가 된다는 의미다. 시장에서 연패하는 자는 때로 세계로부터 격리된다. 패자는 결코 승자의 진정한 동료가 될 수 없다. 

 

극심한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연패해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나는 이들, 노동시장 안으로 진입조차 못하는 이들은 자기비하에 빠지기 십상이다. 생각해보라. 누군가로부터 당신이 필요 없다는 말을 듣는 경험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존감을 갉아먹기 마련이다. 이런 경험이 수 없이 반복된다면, 간신히 누군가로부터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자는 ‘굴종적’이 되고, 끝내 거부당한 자는 자기혐오에 빠져든다. 이런 현실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경쟁에 나선 자들은 서로를 돕지 못하고, 경쟁에서 밀려난 자들은 때로 자그마한 도움을 받기 위해 붉어지는 얼굴을 숨기며 온갖 모욕을 견뎌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외로움의 본질이 ‘자아를 상실했다’는 것이고, 한편으론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동료들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극단적인 승자독식의 독점적 자본주의 경쟁에서 연패하는 자들이 ‘자아상실’과 ‘동료의 부재’를 피해갈 수 있을까? 

 

외로움, 정치적으로 위험한…

 

영어권 문학작품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최초의 등장인물은 1667년 존 밀턴이 쓴 <실락원>의 악마라고 한다. 이브를 유혹하기 위해 에덴의 동산으로 가는 길에 아무도 없는 황량한 황무지로 들어선 악마는, 그 어느 곳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며 ‘외로움’이란 감정을 드러낸다. 우리가 익숙하다고 부르는 그 외로움이란 감정의 본연은, 실제로는 악마조차 두려워할 만큼 새로운 것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20세기 인류에게 처음 등장했던 전체주의의 기반에 외로움, 바로 이 세상에 속할 곳을 잃어가고 있다는 혹은 속할 곳이 없다는, 파편화된 대중들의 새로운 경험이 깔려 있었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경험은 아렌트의 말처럼 자아의 상실이고, 더하여 내가 속할 곳이 없다는, 나와 함께 할 동료가 없다는 상실감이다. 그 상실감에 빠진 자들은 쉽게 자기비하에 빠져들고, 자기비하에 빠져든 이가 타자혐오에 빠져드는 건 그리 어려운 수순이 아니다. 아렌트는 이런 외로움이야말로 전체주의가 자라날 수 있는 토대며 전체주의가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이라고 말한다. 

 

한 번 더 짚어보면 그 위험한 정치적 경험이 꼭 전체주의로 형상화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외로워진 사람들이 정치적 인정투쟁에 나선 상황을 떠올려보라. 세계에서 배제된 자들로서 외로운 자들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기에게 속할 공간을 줄 수 있는 정치지도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 지도자가 ‘샌더스’인지, ‘트럼프’인지는 상관없다는 데 있다. 사회학자 엘리 러셀 혹실드(Arlie Russell Hochschild)는 <고국에서 이방인으로 살기(Strangers in Their Own Land, 2016)>에서 트럼프가 세계화된 자본주의 경쟁 속에 뒤쳐진 채 미국사회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린, 그리하여 외로워진 많은 중하층 백인 남성들에게 다시 속할 곳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던, 얼마나 감정적으로 위로가 되는 후보였는지 역설한다. 그리고 누구나 알다시피 트럼프는 지금 이들의 지지를 업고 ‘탈’진실정치의 중심에 서서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승자독식 시장과 다른 원리로 구축된 정치의 장 

 

21세기 대한민국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국가가 되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양극화는 소비할 수 있는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를 가르고, 그렇지 못한 다수 중에 시장에 제대로 진입하지 못하거나 밀려난 자들은 외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소한 예를 들자면,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한 대학에선 재수강을 한 학생은 아무리 노력해도 A+를 받을 수 없다. 두 번째 경쟁에서 얻은 성과는 첫 번째 경쟁에서 얻은 성과보다 결코 더 나을 수 없다는 것을 교육기관이 제도를 통해 확인시켜 주는 셈이다. 

 

이 같은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시장경쟁이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고 있는 외로움의 중요한 원천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 외로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예를 들어, 시장이란 제도가 우리에게 지속적인 경쟁 속에 승자독식과 생존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 역시 똑같은 메시지를 전파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운영하고 있는 소선거구제는 승자독식이라는, 독점적인 시장경제질서와 똑같은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전하고 있다. 지금 선거제도 하에선 과반의 여부와 상관없이 1표라도 더 많은 표를 얻는 단 한 명이 지역을 대표한다. 1표라도 더 얻은 자의 목소리만 남는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후보가 지기라도 한다면 내 목소리는 지역 내에서 4년 동안 들리지 않고, 한 정당의 후보가 꾸준히 당선되는 지역에 살기라도 한다면 내가 그 지역을 떠나지 않는 이상 평생 내 목소리를 대표제를 통해선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경쟁에서 패자가 될 때 내 목소리를 타자들이 듣지 못하는 현실. 지금의 선거제도는 외로움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다행히도 정치는, 선거제도는 시장의 원리인 승자독식을 반드시 따라갈 필요가 없다. 아니 ‘승자독식’의 정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의 공존’이라는 정치원칙에 사실상 반한다.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정의로운 제도가 정의로운 세대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한 사회의 기본제도가 어떻게 건설되어 있느냐에 따라 구성원들의 삶의 질, 나아가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선거제도 개혁이 정치가 승자독식의 시장과는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 시작이길 바란다. 모든 유권자들이 참여하는 이 제도의 개혁을 통해 반드시 1등이 아니어도 좋다는 메시지, 경쟁이 반드시 패자를 배제할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 그리하여 패자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메시지, 세심하게는 작은 소수의 목소리도 어느 정도의 지지만 있다면 대표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그래서 시장에서 속할 곳을 잃은 사람들이 정치를 통해 보호받고 있다는 메시지, 다시 속할 곳을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 더 나아가 시장도 반드시 승자독식일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역으로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하여 전반적인 정치제도가 시장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그 경쟁에서 버거워하는 사람들에게, 그 와중에 속할 곳조차 잃을까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마침내 속할 곳조차 잃고 외로워진 사람들에게 적절한 보호를 제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축되기를 바란다. 나는 대한민국 모든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선거제도 개혁이 이런 정치적 재구축의 가장 좋은 출발점이라고 믿는다. 

 

승자독식 시장에서 경쟁과 생존은, 사람이 옆에 있을 때 오히려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든다. 시장권력의 확장 속에 이제 외로움은 정치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적 경쟁은 반드시 패자를 배제할 필요가 없다. 이제 정치는 ‘우리가 승패를 떠나 여전히 함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또 다른 메시지를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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