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565] ‘공정’이라는 허상, 그 틈을 파고든 ‘능력 독재’

프레시안과 참여사회연구소가 공동으로 기획연재하는 시민정치시평은 오늘부터 ‘능력주의’를 키워드로 3편의 글을 연속 게재합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이 보여주듯, 능력주의는 한때 한국사회에서 ‘공정한’ 신분 상승의 원칙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사건들은 능력주의, 그리고 이와 맞물린 공정성 담론이 사회의 원자화와 해체를 가속화하고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3편의 연속 기획은 이에 대한 비판적 진단을 담고 있습니다. 한길석 중부대 교수는 능력주의가 경제적 격차를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정치적 포퓰리즘의 원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은 능력주의로 포장된 공정 담론이 노동운동의 단결력을 저해하는 현상에 주목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정희원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는 최근 능력주의 비판에 자주 인용되는 샌델의 한계를 지적하며 능력주의와 사회의 구조적 차별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합니다.

 

능력주의, 제2의 트럼프 탄생시킬 수 있다 / 한길석 중부대 교수

‘공정’이라는 허상, 그 틈을 파고든 ‘능력 독재’ /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마이클 샌델이 진보라는 착각 /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공정’이라는 허상, 그 틈을 파고든 ‘능력 독재’

‘공정’이 배제한 노동은 어떻게 ‘공정’에 대항하나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구의역 ‘김군’과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은 ‘위험의 외주화’라는 용어를 사회화 시켰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위험의 외주화’가 우리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할 사회적 문제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위험의 외주화’는 그동안 사고의 원인으로 노동자의 과실론을 꾸준하게 유포해오던 기업의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위험의 원인이 외주화라는 고용형태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지목한다.

 

그런데 이 ‘위험의 외주화’를 해결하기 위해 외주화된 노동을 다시 직접고용 해야 한다는 해결책은 ‘공정’을 둘러싼 논란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구의역 김군의 동료들은 우여곡절 끝에 정규직으로 전환되었지만, 여전히 스크린도어 수리업무를 맡고 있다. 다른 정규직 노동자들이 이 업무로 배치되거나 김군의 동료들의 직무 재교육을 통해 다른 기술직종으로 재배치되어 서로 섞이지 못한 채 여전히 정규직 안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들은 정규직 전환이후 지속적인 일터 괴롭힘으로 인해 절반 이상의 노동자들이 정신건강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고도 우울’과 ‘중등도 우울’을 겪고 있다. 직접고용으로 물리적 위험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대신 정신적 위험이 증가한 셈이다.

 

김용균 동료들의 경우 상황이 더 심각하다. 컨베이어벨트 운전노동자들은 김용균 특조위와 국가인권위가 직접고용 정규직화 권고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청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정규직 전환을 논의하는 노사정 협의체에서는 직접고용에 대한 논의는 처음부터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자회사’로의 별도 고용방식을 논의하는 수준이다.

 

외주화로 인한 노동자의 죽음을 보도하는 언론은 ‘열악한’ 하청노동자들의 실태를 다뤄왔다. 하지만 그만큼 이들 노동이 왜 정규직화가 되어야하는지, 그 해법은 무엇인지는 다뤄지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공정’을 둘러싼 논란이 집중되면서 하청노동자들의 목소리 대신 공정을 주장하는 ‘입’에 주목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공정을 비판하는 담론조차 공정이 배제한 노동을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오늘날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공정’이 ‘평등’을 내부로부터 허무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만으로 ‘공정’이 털어내버린 수많은 비정규 노동들이 사회적으로 정당한 ‘위치’를 다시 되찾는 데는 한계가 있다.

 

‘외주화는 문제지만 정규직화는 안 될 말’이라는 모순적 주장이 힘을 발휘하는 배경에는 문재인정부의 ‘비정규직 제로 선언’과 함께 추진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전환 정책의 근본적인 한계가 자리한다. 애초에 문재인 정부의 ‘약속’의 대상이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들이었는지 모호하다. 문재인 정부의 선언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이래 끊임없이 싸워왔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미약하지만 완강한 흐름 위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정규직 전환을 단순히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 즉 여전히 불안정하지만 좀 더 나아진 고용유지와 약간의 임금인상 정도로 간주하면서 매우 시혜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런 ‘시혜성’은 공정을 내세운 정규직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반발로 손쉽게 흔들리게 된다.

 

문재인 정부의 ‘공정’의 이념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더 근본적인 해악은 ‘작업장 민주주의’가 내부로부터 허물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득권이 되고 싶어 하는 취준생과 입사 초년생을 앞세운 집단들이 ‘세력화’되면서 행사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민주적인 의견수렴 과정의 외양을 띈다.

 

가령 건강보험공단은 ‘2030청년노동자들의 반발’을 내세워 콜센터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잠정적으로 중단한 상태다. 이를 위해 작년에는 자체적으로 조합원 8천 명에게 콜센터 노동자 직접고용 관련 설문조사를 해 80%에 달하는 조합원들이 채용방식의 공정성을 들어 정규직전환에 반대하는 조합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이러한 의견수렴의 결과 위에서 건보공단 이사장은 “양측이 합의해오면 이를 존중해 시행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뿐만 아니다. 민주노총 소속의 건강보험공단 노동조합 집행부는 ‘콜센터 정규직전환 반대’를 내걸고 당선되었다. 노조 위원장은 얼마 전 건강보험 콜센터 노동자들이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파업에 돌입하자 적극적으로 언론인터뷰에 나서서 콜센터 노동자들의 파업에 반대하는 의견을 밝혔다.

 

건보공단 콜센터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는 공공운수노조는 파업기간 내내 소속 노조인 정규직노조의 민주노조 정신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표명 조차 내놓지 못했다. 이에 발맞춰 언론들은 건보 콜센터 노동자들의 파업을 ‘제2의 인국공 사태’로 간주하며 노노갈등의 양상으로 다루었다. 정부, 공공기관, 정규직노조, 언론은 직접고용을 ‘끝없는 갈등의 씨앗’으로 간주하면서 공정이 만든 허구적 중립지대에 민주주의와 여론을 위치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빠져나온 것은 정작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목소리이다. ‘능력 독재'(마이클 샌델)를 행사하는 입장들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평등의 이념을 훼손하는지 목도하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은 문재인정부의 정규직전환 방침의 시혜성을 거부하면서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다. 비정규 노동자들은 처우개선과 고용안전 이전에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들이 수행하고 있는 일의 ‘사회적 인정’을 발언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구조조정의 핵심은 ‘핵심 업무와 비핵심 업무로 노동을 구별한 뒤 비핵심 업무를 아웃소싱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지난 20여 년간 ‘나쁜 일’로 간주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 되어버린 자신들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부심은 자신들의 일을 ‘무시’하고 있는 ‘공정’의 목소리에 대항하면서 표출되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정규직들이 하는 일보다 더 종합적이고 더 많은 숙련이 필요로 하는 일이에요”라는 건보 콜센터 노동자들의 자부심은 역설적으로 외주화의 결과이다. 이들의 숙련이 전체적인 노동시스템에서 조직적 숙련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오직 노동자들의 경험으로 체화되는 동안 이들의 노동은 원청과 하청업체 모두가 잘 알지 못하는 일, 그래서 대체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공정’은 이러한 독자적으로 성장해온 일의 가치들을 파편화하고 고립시켜 가치들을 폄하하는 것을 통해 지금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정부의 지침과 공공기관의 일정에 맞추어 자동적으로 전환된 정규직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일이 ‘좋은 일'(good job)로 인정되고 있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다시’ 직접고용 투쟁에 나서기도 한다. 공정에 포획된 정규직 전환으로는 공정담론을 무력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들 업무에 대한 차별과 무시는 내부화된 채로 심화될 뿐이었다.

 

그래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비정규직들의 싸움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요구 아래에, 비정규 노동자들이 씨앗처럼 품고 있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성을 어떻게 서사화하는지에 대한 번역과 해석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공정’의 맞은편에서 이미 ‘공정’을 포위하고 있는 다양한 일의 가치, 평등과 민주주의의 표현물들이 적극적으로 해석되고 유통되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적 ‘위치’안에서 비정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말해야하는 내용의 자원을 발견하며 ‘공정’에 대항하는 실천들을 재발명해낼 수 있다.

 

프레시안과 참여사회연구소가 공동으로 기획연재하는 시민정치시평은 이번에 ‘능력주의’를 키워드로 3편의 글을 연속 게재합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이 보여주듯, 능력주의는 한때 한국사회에서 ‘공정한’ 신분상승의 원칙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사건들은 능력주의, 그리고 이와 맞물린 공정성 담론이 사회의 원자화와 해체를 가속화하고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3편의 연속 기획은 이에 대한 비판적 진단을 담고 있습니다.

 

한길석 중부대 교수는 능력주의가 경제적 격차를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정치적 포퓰리즘의 원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진단했고,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은 능력주의로 포장된 공정 담론이 노동운동의 단결력을 저해하는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정희원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는 최근 능력주의 비판에 자주 인용되는 샌델의 한계를 지적하며 능력주의와 사회의 구조적 차별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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