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444] 지사님, 의원님, 이건 ‘거래’가 아닙니다

지사님, 의원님, 이건 ‘거래’가 아닙니다

정의를 외친 그들은 어쩌다 욕망의 괴물이 되었나

 

신경아 한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바다 건너편에서 불어왔지만 바람은 이 땅에서 더 거세지고 있다. 

 

바람은 곳곳에서 작은 불씨들을 만나 들불이 되고 오랫동안 쌓여온 마른 잎들을 불태우고 있다. 성차별, 성폭력, 여성혐오, 여성비하…. 들판을 빼곡히 채운 성 불평등의 견고한 줄기와 잎들이 불타고 있다. 뿌리에까지 이를지는 알 수 없지만, 당분간 이 불길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바람이 맑고 상처와 분노를 드러내는 목소리가 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가혹한 성적 폭력과 학대가 지속돼 왔는지, 침묵을 강요당해 왔는지, 절대 권력을 가진 가해자에게 되레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어야 했는지.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성폭력 사건들이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미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건들은 이전의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폭력 사건에 비해 훨씬 울림이 크다. 절대 권력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2018년 미투가 검찰이라는 한국사회의 절대 권력 집단에서 터져 나온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제 성폭력에 맞서는 여성들의 화살이 권력의 정점을 겨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의 정점에 권력자가 있다. 절대적 권력을 가진 최고의 지위에 있는 남성이다. 이 사람은 ‘교수님’ ‘감독님’ ‘지사님’ 등 직함이 무엇이든 ‘OO님’이란 존칭어로 불린다. 성폭행 사실이 폭로되는 자리에서조차. 

 

이 사람들 주위에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최고 권력자를 중심으로 만들어가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회와 자원에 의존해 살아간다. 따라서 이들에게 권력자의 몰락은 기회구조의 붕괴를 뜻한다. 이들이 성폭력에 침묵하고 방조자가 되는 이유다.

 

이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피해자 여성들이 있다. 최고 권력자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조직이 만들어내는 기회와 자원에 접근하기 위해, 그들 조직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마지막 남은 땀방울까지 쥐어짜는 이들이다. 

 

권력자는 이들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나는 너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지식을 전수하고 권력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줄 텐가?

 

권력자는 일종의 거래라고 포장한다. 이 거래에서 피라미드의 하단에 놓인 사람들 중 많은 이가 여성, 그것도 젊은 여성들이다. 남성중심적 집단에서 젊은 여성들은 낮은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지닌 젊음과 섹슈얼리티는 쾌락을 위한 거래 수단으로 지목된다. 권력자 남성에 의해. 

 

이런 피라미드 집단과 그 내부의 관계는 대부분 법(法)이라는 울타리 바깥에 있다. 사제관계이거나 고용관계이지만 법적 규제의 대상인 계약적 종속성보다는, 전(全) 인격적 범위에 걸쳐 지배가 행사되는 신분적 종속성으로 정의된다.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관습이지만 누구도 깨뜨리기 어려운 구조물이다. 때로는 명시적인 때로는 묵시적인, 이런 종속적 체제 속에서 집단의 약자인 여성은 자신을 짓밟는 존재에 대해 저항하지 못한다. 저항을 위한 수단도 자신을 지지해 줄 사람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김지은 씨의 증언처럼, 권력자는 육체적 폭력 이전에 정신적으로 피해자를 제압한다. 성폭력이든 가정폭력이든 여성에 대한 폭력 사건에서는 정신적 무력화가 선행한다. ‘너는 나에게 맞설 수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 어떤 것도 소용없을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일상적으로 전달된다. 때문에 위력이나 강압에 의한 행위라는 요건은 성폭력 사건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는 주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성폭력 범죄는 법적 규제의 경계 바깥에 있다. 

 

최고 권력자가 처음부터 가해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밀양의 이윤택이 1980년대 성폭력 피해사건을 그린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시나리오를 썼을 정도로, 처음에는 그도 인간의 존엄과 사회 정의에 목말라 하는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권력의 최정상에 오른 그가 자신의 권력이 ‘더러운 욕망’을 채우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을 알고, 짓밟힌 사람들이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힘까지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눈 뜨는 순간, 그는 괴물로 바뀌었을 것이다. 권력은 자신의 적을 찌르는 무기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베는 칼날이 될 수 있음을 마약과 같은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잊었을 수도 있다. 

 

결국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본질은 권력의 지나친 성별 불균형, 비대칭성에 있다. 권력자와 그 주변의 사람들이 한쪽 성(性)에 치우침으로써 성적 폭력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관행이나 개인적 관계 정도로 외면해 온 것이 2018년 3월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미투 운동의 핵심이다. 여기서 ‘한쪽 성에 치우쳤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권력자와 그 주변에 남성이 많다는 사실뿐 아니라, 남성중심적 관점과 의식, 태도가 규범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람시가 말한 ‘동의에 의한 지배’다. 집단 내에서 권력자는 자신의 관점을 지배적 규범으로 만듦으로써 다수의 피지배자들로부터 동의와 순응을 이끌어 내고 저항을 위한 도덕적 기반을 무너뜨린다.

 

또한 반성해야 하는 사람이 사건이 발생한 집단 내부자들만은 아니다. 김기덕이 만든 성폭력 옹호 영화를 보고 쾌감을 느끼며 환호하는 사회, 서른이 넘은 여성은 더 이상 젊지 않으므로 직장을 떠나라는 회사, 성폭력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더 렌즈를 들이대는 언론, 피해자의 눈물을 진영 논리로 거부하거나 이용하려는 정치인과 그 주변의 무리들. 이 모두가 자기 성찰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별 다른 힘이 없는 대다수의 시민들은 피해자의 아픔에 가슴이 시리고 미투 이후 그녀들을 걱정한다. 때문에 미투는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적 갈등으로, 진보와 보수의 다툼으로 환원돼서는 안 된다. 미투는 권력의 불균형과 위계, 성별 불평등, 노동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책임 불이행,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사회적 무감각, 무제한적 종속성을 충성이나 의리로 오인하는 조직문화…. 이런 수많은 요인들이 교차해 재생산되는 폭력범죄에 대한 고발이다. 우리는 당분간 미투의 원인이 무엇이고 미투가 왜 지속될 수밖에 없는지 더 고민하고 토론해야 한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연재합니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