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본 연구소] “거인의 시대, 조무래기들의 삶을 고민한다”


소통. 이명박 정부 들어 정권의 ‘불도저식’ 정책 집행이 이어지면서 사회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더욱 강조되는 화두다. 내전과 민족분단, 군부독재와 시민학살, 민주화와 두 번의 정권교체의 역사를 가진 한국사회에서 소통은 늘 어려운 과제였다.


서로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선 진정한 소통을 위해선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자기 성찰과 대화는 기본 중의 기본일 것이다. 이런 전제 조건이 충족된 소통은 그 사회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밑거름이다.


이런 큰 문제의식으로 참여사회연구소는 ‘참여사회포럼 : 대화’를 매달 한 차례씩 진행한다. 지난 12일에는 박호성 서강대 교수가 ‘화해와 통합의 사회, 정치적 기초’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강연을 가졌다. 이날 강연에는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지정토론자로 참석했으며 장은주 영산대 교수(사회), 이병천 강원대 교수(‘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 조흥식 서울대 교수(참여사회연구소 소장) 등이 함께 했다.


최근 새 책 <공동체론 : 화해와 통합의 사회·정치적 기초>(효형출판)를 내놓은 박 교수는 힘있는 개인들의 자유만이 보장되는 현대 사회의 시대정신을 ‘거인주의’로 규정하고, 이런 ‘거인의 시대’에 힘 없는 ‘조무래기’들의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는 ‘공동체’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다음은 이날 ‘대화’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거인의 독주만 옹호되는 시대


박호성 : 저는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거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의 철학적 토대는 개인주의이고 자유주의에서 표방한 개인은 거인입니다. 힘의 논리에 뿌리박고 있는 토대가 자유주의이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에서 표방하는 개인주의는 거인주의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유일하게 평등한 것은 똑같은 스타팅 라인에 세운다는 것, 즉 기회균등이지요. 1등으로 골인하는 사람은 가장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이지요. 공산주의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평등입니다. 똑같이 골인라인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민주의는 약자거나 아프거나 한 사람을 20-30미터 먼저 세우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개인주의는 거인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유주의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경향이 심화됩니다.


▲ 박호성 교수. ⓒ참여사회연구소 제공



약육강식의 논리가 사회적으로 굉장히 추앙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호랑이’의 자유만을 보장합니다. 힘있는 이들의 자유만을 보장하는 것이죠. 사회적 호랑이들만 활개치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 체제입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대체로 힘 있는 사회적 호랑이들만 자유를 누리는 거인주의가 지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세계를 단일시장화하면서 소비주의와 물신주의가 확산되었습니다. 거인의 독주만 옹호되는 실정 속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제적 거인은 미국, 일본, 중국 같은 나라이겠지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도덕적 진보라든가 인간적 자아실현 같은 이상적 가치는 비실용적이고 속절없는 것으로 손가락질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사적인 이익만 추구하는 ‘상인형 인간’만 만들어내는 사회가 된 것이죠. 공익에 대한 존중은 찾아보기 힘들고 황금만능주의의 행태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 자유경쟁이라든가 빈부격차, 사회적 불평등이 더불어 질주하는 현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심각한 약육강식의 사회윤리가 일상화되고 대다수 약자들이 도움을 호소할 곳을 찾지 못한 채 쓰러져 가는 현실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힘 없는 조무래기들은 어디로 가며 사회적으로 힘있는 왈짜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중의 위기에 봉착한 상황입니다. 인간의 위기와 자연의 위기이지요. 첨단기술이 범람하고 사이버 돌풍이 몰아치고 환경오염의 공포 동시에 대두되고 있습니다. 전 지구의 생존문제 붙들고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입니다. 범세계적인 단합과 결속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하에서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위계질서 극복하고 어떻게 하면 전 국민이 이웃사촌처럼 수평적 공존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공동체 저술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인간성 상실의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어떻게 통합을 구축해 낼 것인가에 대해 골머리를 썩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 위기를 극복해내기 위해서는 자연과의 공동체적인 교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떡고물 공동체 VS 피붙이 공동체


개인절대주의 시대라고 저는 명명합니다만, 이런 시대에 어떻게 우리-특히 사회적 조무래기-를 위해 공동체적인 연대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스스로 던졌습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공동체적인 삶의 형식에 익숙한 민족입니다. 홍익인간은 우리의 이로움을 찾기 위한 미덕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들으면 놀라자빠질 이야기인데 ‘마이 와이프’라고 하지 않고 ‘아워 와이프’라고 하는 것을 보십시오. 전통적으로 우리는 공동체적인 삶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최근 10년새 우리나라 자살률 2배로 급증하고 OECD 평균 2배라고 합니다.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더불어 사는데 지치고 절망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민사회의 현실도 녹록치 않습니다. 시민사회의 갈등과 분열 부추기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의 계급적 갈등이 어느 정도로 위험 수위에 올라와 있는가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수가 전체 인구의 2%, 100만 명을 넘어섰다는 보도가 나온지 오래입니다. 우리 사회도 글로벌 다문화 사회의 문턱을 넘어서게 된 것이지요. 시민사회는 우리가 한번도 체험하지 못한 문화적 충격과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하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부정적인 공동체의식-혈연, 학연, 지연 등-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소속집단의 의식에 좌지우지 당하는 행태를 보입니다. 소집단 충성심 또는 애국심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남한식 출신성분을 따지는 의식이 전체사회의 규범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입니다. 정치사회분야를 통틀어서 부정적 공동체 의식이 퍼져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제가 책에서 인용한 기사에 따르면 재벌들은 정관계 인사들과 혼인관계를 맺어왔다고 합니다. 정치권과 재계의 지배계층이 혼인관계로 묶여 공동체적인 권력 집단으로 군림하는 것이죠. 공생형 공동체, 유유상종형 공동체, 떡고물 공동체의 전형인 것이지요. 한 사례에 불과합니다만 위로는 어마어마한 사람들, 아래로는 보통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부정적 공동체 의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경쟁적 이기주의가 작용하고 있는 실정에 놓여있기도 합니다.


한반도의 입장에서 보면 남은 개인주의, 북은 집단주의로 내세우며 대결하면서 통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개인적 자유와 북한의 집단주의가 얼마나 참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남한 입장에서는 자유롭게 소외당하고 북은 평등하게 굶주린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최대 모순의 하나는 한편에서는 평등이나 인간에 대한 정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지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평등과 비인간적인 상호관계로 길들여진 위계질서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위계질서는 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에 속속들이 뿌리 박혀서 끝없이 사회공동체를 곪게 하는 병균으로 암약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웃사촌과 쌍놈양반이 공존하는 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피붙이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이 죽음이라는 절대평등의 울타리 속에서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숙명적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부귀한 사람과 빈천한 사람 모두 자연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눈 앞의 이해관계 때문에 허망한 싸움을 계속 하는 것은 통탄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 아끼고 도와야 할 천부적 의무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를 더불어 가꾸어나가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주의에 기반을 둔 공동체주의


▲ 홍윤기 교수. ⓒ참여사회연구소 제공 홍윤기 :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삶의 불안전성 구조, 고독이나 공포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오직 공동체적인 삶뿐인지, 아니면 만약에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주는 불안이라면 사회체제를 고치고 기능을 순화시키고 인간들로 하여금 경쟁체제에 저항할 수 있는 민주적 시민성을 강화시킴으로써 공동체적인 폐쇄성으로 회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는 개인주의를 비난하시고 자유주의를 아무리 비판하시더라도 개인적 권리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개인적 권리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공동체적 결속이 동시획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디인가. 제가 볼 때는 이 시대의 공동체를 고민하는 분들은 이 부분에서 집중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자유주의를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성숙이나 개인적 권리를 부인하면서 공동체주의를 구상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공동체론의 사상적 딜레마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걸 뛰어넘고 계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연과 관련된 부분인데요. 개인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매뉴얼을 줘서 어느 관청에 가서 일을 처리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공동체는 아니라는 것이죠. 개인이 위급할 때 그 개인이라는 전인격적인 존재 하나를 보호해주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현대사회는 기본적으로 기능적 해결을 합니다. 어려운 계획이 있으면 너가 알아서 너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라는 구조기능주의적인 해결을 하는데 공동체적인 해결이라는 것은 내가 어려웠을 때는 나를 전인격적으로 보살펴줄 또다른 인격이 내 옆에 항상 대기하고 있다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공동체라고 봅니다.


제 질문은 현재적 유형의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가능한가, 저는 가능했으면 좋겠다고 보는데요, 현대의 공동체는 불가능하지만 현대 안의 공동체는 가능합니다. 테레사 수녀나 피에르 신부처럼요. 현대적 공동체는 관념 상으로 불가능하다고 봤을 때 도리어 공동체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에 결속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단순 결사가 아니라 사회내재적 공동체라는 기획은 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죠.


노동운동의 유연화와 시민운동의 급진화


박호성 :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주의를 송두리째 지지못하는 어정쩡함이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가진 괄목할만한 성과들도 있고요. 동구공산권이 몰락한 것은 개인적인 성과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편으로는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개인주의의 장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치고 월드컵과 올림픽 치른 나라는 한국 밖에 없습니다. 통일이라는 지향 해야할 목표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도외시 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면서도 국제주의도 추구해야 하는 이율배반적 상황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연대 필요성에 대해 역설한 부분이 있습니다. 노동운동의 유연화와 시민운동의 급진화를 촉구를 했습니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연대해서 앞으로 나가면 우리나라의 지형이 근본적으로 뒤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들이 170만입니다. 우리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사회세력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필수 불가결한 존재고 존엄한 사회집단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사회세력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70만의 노동자들이 한달에 1000원 씩만 모아도 20억 가까운 돈이 모입니다. 어마어마한 큰 일을 할 수가 있는데 해야할 일은 안하고 엉뚱한 논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실 운동이나 성명서 낭독 운동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참여연대가 여전히 모금운동하고 있습니다. 좀 벗어날 때도 되었는데요. 엘리트주의적인 순수이념투쟁 접고 경제투쟁에 주력하고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과 시민사회가 힘을 합쳐 투쟁하자는 제안까지 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화해와 통합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착안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연대론을 정리해놓은 것을 저는 아직 한국에서 찾지 못했는데 연대의 당위성과 필요성 강조한 부분도 유의하여 봐주셨으면 합니다.
 
▲ ⓒ참여사회연구소 제공


장은주 : 화해와 통합의 공동체를 강조하시다가 이런 것들이 집단주의적이거나 전체주의적인 위험에 노출될 위험성은 없는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지나치게 공동체의 긍정적 측면 강조하시다가 보니까 전통적인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억압의 논리들을 너무 쉽게 넘어가신 것은 아니냐는 질문도 있습니다.


장혜원 (청중) : 공동체론을 읽으면서 이질감을 느꼈는데 ’88만원 세대’인 20대는 인터넷 통해 개인주의 자본주의를 내적으로 체화한 세대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인터넷 통해 분절화, 개인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선생님 말한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보려고 해도 나아가지 못하게 막습니다. 나가서 시위할 바에 아르바이트를 하면 돈이 나오는데…구조화된 자본주의에 종속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른들은 운동권에 있으면서 마르크시즘을 공부하시기도 했지만 저희들은 그런 공부한 적이 없는 한계도 있구요. 88만원 세대가 공동체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전략을 알고 싶습니다.


박호성 : 공동체 없이 일상이 존재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까지는 공동체를 부수는 작업이었고 지금부터 다시 공동체를 재건해나가는 과정이 아닌가합니다. 저는 앞으로의 역사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대결로 점철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개인주의가 확립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개인주의가 너무 방만해져서 손쉽게 이기주의로 전락하는 사회도 지구상에는 많기도 하구요. 다른 한편을 개인을 견제하고 개인에게 개입함으로써 전체 공동동체의 권익을 증진시키는데 우선적으로 앞장서야 한다는 두 개의 사조가 맞물려서 대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두 개의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야 하는 상황에 서 있습니다.
88만원 세대, 인간이 인간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홍윤기 : 기본적으로 경제라는 것이 안정되거나 믿을만한 것이 못 되고 있는데 문제는 88만원 세대들을 보면서 교수들은 거짓말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스펙을 쌓으면 빛나는 미래가 보장된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요. 88만원 세대에게 제일 필요한 일은 3년을 백수로 떠돌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제일 부족한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 봅니다.


자본중독에 의한 자본독재가 대한민국이나 전세계를 위협하는 지구상 마지막 전체주의 체제라고 생각을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이럴 때 나타날 수 있는 공동체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인식론적 자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동체가 이루어지기 어려다고 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포함해서 기본적으로 정치적 결단을 촉구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전체를 들여다볼수 있게 하는 정지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이걸 창출하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에 계속 말려들 수밖에 없는 것이죠. ‘국민성공시대’ 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비하시키는 구호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물질적이나 지식의 축적은 돼 있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 전체적인 자각을 목표로 한 교육공동체가 일단은 필요할 듯 합니다. 여건은 되어 있다고 봅니다.


박호성 :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악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옆에 있는 개인과 단체와 사회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키다 보면 사회가 좀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홍기혜 기자(정리),송은희 참여사회연구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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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014140003&section=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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