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본 연구소] ‘촛불 시민’에게서 진보적 애국주의 가능성 발견_ ‘애국주의’ 이론 논쟁 확산

지난해 역사교과서 파문을 계기로 촉발된 ‘대한민국사 논쟁’의 후폭풍이 예사롭지 않다. 12월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과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실장의 논쟁을 통해 진보진영 내부로 옮겨붙은 논쟁은 최근 학계 전문가들이 가세하면서 이른바 ‘애국주의’를 둘러싼 이론 논쟁으로 확산되는 형세다. 장은주 영산대 교수(법학과·사진)가 이달 초 발간된 반년간 <시민과 세계>(참여사회연구소 펴냄)에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는 것-진보적 애국주의의 가능성과 필요’라는 글을 발표한 데 이어 박명림 연세대 교수, 신진욱 중앙대 교수 등도 유사한 주제의 기고와 발표문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달 12일 <경향신문>과 웅진지식하우스가 함께 여는 ‘공화주의’ 토론회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도 ‘애국주의’다.


“독단적 국가권력 저항 행동이 공화주의적 애국주의”
장은주 교수 주장에 일부선 “기원론적 사고” 반론도


 
» 오노레 도미에(1808~1879)의 1848년작 <공화국>. 유럽인들에게 ‘공화국’(국가)은 자녀(국민)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이미지로 부호화돼 있다. 루소는 시민의 애국 의무가 국가로부터 제공받는 인간적 삶의 혜택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천황제 파시즘에서 이승만 반공국가, 유신, 5공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는 한국인의 뇌리 속에 국가를 군림하고 학대하는 ‘억압적 아버지’의 이미지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기실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애국’은 오랫동안 금기의 언어였다. ‘유신’과 ‘5공’으로 상징되는 극단적 국가주의가 그들의 뇌리에 ‘억압하는 아버지’라는 국가 이미지를 확고하게 각인시킨 탓이었다. 그들은 권위에 순응해 안위를 찾기보다 ‘분단된 민족’과 ‘억눌린 민중’의 이름으로 불의한 아버지에 저항했다. 그들에게 민족과 민중은 아버지의 폭정에 신음하는 어머니, 형제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확보된 뒤에도 그들의 무의식은 ‘과거의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어떤 말이나 상징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고, ‘자애로운 아버지’에 대한 대중의 갈망 역시 비판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을 사랑하라’는 것은 가슴으로도 머리로도 수용하기 힘든 부당한 강요이자 또다른 억압이었다.


장은주 교수는 진보세력의 이런 완강한 ‘반(反)애국주의’가 놓치고 있는 지점들에 주목한다. 그것은 대중들의 정치적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적 긍지’와 관련된 문제다. 예컨대 서울광장에 모여 앉아 “대~한민국”을 외치는 시민들의 행위를 비합리적인 국가주의적 열정의 분출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개인이 자존감 없이는 정상적 삶을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국가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민의 ‘국가적 자부심’이 필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너스봄의 말을 빌려 말한다.


“애국주의는 대체로 나쁜 것이다. 그러나 애국주의가 위험할 수 있다고 해서, 또는 우파들이 즐겨 이용하는 정치적 수단이라고 해서 진보정치가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진보정치는 오히려 올바른 애국주의로 무장하고 우파가 독점하고 있는 정치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장 교수는 ‘진보적 애국주의’의 가능성을 지난해 여름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합창하던, 광장의 그 시민들에게서 발견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을 통해 국가의 독단적 권력행사에 저항하는 그들의 행동이야말로, 애국의 근거를 ‘공화국’이 보장하는 ‘모든 사람의 평등한 자유와 참여’에서 찾는 ‘공화주의적 애국주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대한민국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공화국’이란 정치체제를 통해 모든 사람의 평등한 자유를 보장하고 실현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과연 인민의 사랑을 요구할 만한 ‘공화국’의 이념에 충실해왔냐는 것이다. 장 교수는 “아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애국을 거부해야 할 이유는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공화주의의 이념을 성문화한 제헌헌법이다. “우리나라가 스스로 민주공화국이라고 선언하는 헌법을 가지는 순간, 그 헌법은 지배의 합리화와 민주적 법치주의의 완성을 향한 내재적-규범적 동학을 발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 투쟁 역시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이념의 실현되지 않은 가치를 환기시키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던 운동”에 다름 아니다. 이를 통해 장 교수가 진보세력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이렇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적인 토대에 대한 솔직한 수용 위에서 갖게 되는 ‘미래에 대한 책임의식’ 같은 것으로 표현돼야 한다.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을 부정하고 조롱하면서 그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실천을 ‘체제 내적’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은 현실을 조금이라도 의미있게 바꿔 나가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이런 장 교수의 주장에 대해선 반론 역시 만만찮다.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실장은 장 교수의 주장을 “기원론적 사고”로 몰아붙인다. 장 교수는 “지금의 시점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면서 현재의 소망을 과거에 투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 실장은 말한다.


“대한민국의 과거에는 도저히 납득하고 수용할 수 없는 부정적 현실들이 존재하며, 그 현실은 아직까지도 살아남아 미래의 발전을 가로막는 질곡이 되고 있다. 그것을 무시한 채 대한민국을 자기준거적, 규범적 현실로 인정하라는 것은 또다른 폭력이다.” 앞으로 전개될 논전의 치열함을 예감케 한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한겨레신문기사 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67318.html

첨부파일: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