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아시아 2003-03-17   1186

위험, 기술, 그리고 사회* ②

<번역> 김명진 | 시민과학센터 회원

위험의 사회적 맥락

사회과학자들은 기술적 위험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 왔다. 지난 수년 동안 서로 구분되는 네 가지의 사회과학적 접근들이 등장했는데, 심리학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지리학적 접근이 그것이다. 최근 출간된 단행본들은 이 접근들 각각에 대해 좀더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Krimsky and Golding, 1992; Jaeger et al., 2001). 여기서는 이들 각각을 비판적으로, 그러나 간략하게 리뷰해 보도록 하겠다.

심리학적 관점

최근에 이르기까지 위험 지각(risk perception) 분야는 위험 지각의 바탕에 깔린 인지 과정에 초점을 맞춘 심리측정적 접근(psychometric approach)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많은 연구들은 대부분의 개인들이 체계적으로 위험을 과소 내지 과대평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러한 편향들은 위험 지각의 인지적 구성에 내재한 근본적인 과정들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많은 상식적 전략들, 혹은 인지적 ‘경험규칙(rule of thumb)’들이 이러한 편향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가용성 발견법(availability heuristic)**은 이와 같은 규칙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Tversky and Kahneman, 1982). 이는 사람들이 확률(위험을 숫자로 나타낸 것)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발견법들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소규모의 표본 연구나 실험실에서의 실험 모두에서 같은 연구 결과가 얻어졌다.

전형적인 연구를 하나 보도록 하자. 연구자들이 피험자들에게 사망 원인들을 두 개씩 짝지어 제시한 후 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지 판단해 보라고 요청했다(Lichtenstein et al., 1978). 예를 들어, 피험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하도록 요청받았다. ‘다음 각각의 짝들에서 어느 쪽 사망 원인이 더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가? (1) 폐암인가, 위암인가? (2) 살인인가, 자살인가? (3) 당뇨병인가, 자동차 사고인가?’ 사람들은 폐암이 위암보다, 살인이 자살보다, 자동차 사고가 당뇨병보다 더 많은 사망을 야기한다고 답하는 경향을 보였다. 실제로 자료를 종합해 보면 각각의 짝들에서 후자(위암, 자살, 자동차 사고)가 전자보다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확률 선택 문제에서 보통 세 개 중 두 개꼴로 잘못된 답을 골랐다.

이러한 발견에 부합하는 한 가지 결론은, 일반인들은 자신이 직면한 위험을 평가하는 데 있어 그리 유능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 일반인들의 판단은 어떤 때는 옳지만 틀릴 때가 더 많은가? 어떤 인지 과정이 그런 상반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가용성 발견법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안되었다(Fischkoff et al., 1981; Tversky and Kahneman, 1982). 어떤 사건의 인지적 가용성, 바꿔말해 그것이 얼마나 생생하고 기억하기 쉬운지 하는 것이 그 사건의 지각된 확률에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익숙한 것이 익숙지 않은 것보다, 그리고 최근의 사건이 과거의 사건보다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이는 사람들이 크게 보도된 사망 원인(폐암이나 살인사건 같은)을, 보도는 덜 되었지만 더 잦은 사망 원인(위암이나 자살 같은)에 비해 일반적으로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음을 말해 준다. 가용성 발견법은 편향된 지각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용성이나 여타의 발견법에 대한 의존은 어떤 조건 하에서는 타당한 평가를 낳기도 한다. 어떤 사건의 생생함이 그것이 상대적인 발생 빈도와 일치하는 경우 그 사람의 지각은 타당할 것이다 ― 위의 실험에서 피험자들이 자동차 사고에 의한 사망이 당뇨병에 의한 사망보다 더 자주 일어난다고 판단한 경우처럼 말이다. 개인에게 있어 인지적 발견법이 갖는 가치와 그것이 계속 이용되는 이유는 그것이 효과적이며 종종 들어맞기도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발견법들은 유용한 정보처리 도구이자 문화적·생물학적 진화를 통한 적응의 산물일 것이다.***

사람들이 위험을 평가할 때 발견법을 이용한다는 발견은 사람들이 기술적 위험의 지각에서도 그것을 사용하는지를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촉발시켰다. 폴 슬로빅, 바루크 피쇼프, 사라 리히텐슈타인과 그 동료들은 이 주제에 관해 상당한 연구성과를 축적했다. 슬로빅/피쇼프/리히텐슈타인 그룹은 사람들에게 위해성을 지닌 다양한 기술, 활동, 물질들(예컨대 핵발전, 자동차, 권총, 흡연, 수영, 민간항공, 살충제 같은)을 제시한 후 그것의 위험과 편익을 평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Fischhoff et al., 1981; Lichtenstein et al., 1978; Slovic, 1987). 그들의 연구는 사람들이 확률은 낮지만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사건들(수천 명을 죽일 수 있는 핵발전소 사고처럼 좀처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사건)은 과대평가하고, 확률이 높지만 결과는 대단치 않은 사건들(엑스레이와 연관된 위험과 같은)은 과소평가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또한 일반인들의 위험 판단이 전문가들의 그것과 일치할 때도 있긴 하지만, 종종 그것으로부터 체계적인 방식으로 벗어난다는 사실도 밝혀내었다.

일반인의 지각에 내포된 편향을 야기한 요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요인들 중 핵심은 가용성 발견법이다. 사람들은 극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만 일어날 가능성은 낮은 사건들의 빈도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사건들이 극적 외양 때문에 인지적 가용성이 높고 따라서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일상적인 사건들보다 극적인 사건들을 강조하면서, 일어날 가능성은 낮지만 끔찍한 사건들을 종종 선정적으로 다루는 언론의 뉴스 보도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Combs and Slovic, 1979; Sandman et al., 1987). 대중과 전문가의 위험 지각에 있어서의 불일치는 위험에 관한 정보의 원천, 그리고 전문가들에 의해 무시되는 위험의 질적 특징을 강조하는 일반인들의 성향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대중이 크게 두려워하는 위험들은 통제 능력의 결핍, 대참사의 가능성, 치명적인 결과, 위험과 편익의 불공평한 분배 등을 수반하는 것들이다. 그러한 위험들은 전문가들에게보다 대중에게 훨씬 더 수용되기 어려운데, 전문가들의 공식적 분석에서는 이러한 질적 요인들을 거의 혹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Slovic, 1987). 결국 일반인과 전문가의 위험 판단에 있어서의 불일치는 서로 다른 위험의 정의에 기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대중이 전문가들과 다르게 위험을 바라본다면, 위험 산정에서 대중의 견해는 어떤 중요성을 가지며, 위험 관리에서 대중의 적절한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한 가지 입장 ― 종종 암묵적으로만 제시되는 ― 은 대중이 위험 평가와 의사결정에서 배제되거나 다른 식으로 권리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예컨대 Breyer, 1993; Cohen, 1987; Starr, 1969를 보라). 이에 비해 두 번째의 좀 덜 극단적인 입장에서는 일반인들의 위험 지각이 전문가들의 그것과 조화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관점의 지지자들은 정책결정자들이 △ 관련 기구와 대중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향상시키고 △ 시민들이 불확실성을 더 잘 평가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 더 나은 위험 관리 전략 ― 위험한 기술에 대해 합당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정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대중에게 제공하는 수단을 포함해서 ― 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도록 요청하고 있다(Covello et al, 1988). 세 번째 입장은 다음과 같은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 거의 모든 위험 평가 및 위험 관리 전략들에 불확실성과 메타-불확실성이 내재해 있고 △ 대중뿐 아니라 전문가들 역시 인지적 편향을 가지고 있으며 △ 기술적 정보만을 강조하는 것은 환경단체와 기업 이해집단이 가진 힘의 상대적 차이 때문에 정치적 함의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세 번째 입장에서는 일반인들이 기술적 위험을 평가, 산정, 관리하는 과정에서 보다 더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본다(Fischhoff, 1990; Freudenburg, 1988; Perrow, 1984; Stern, 1991; U.S. National Research Council, 1989).

사회학적 관점

위험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은 그 역사가 20여년에 불과하지만, 지속적인 발전을 거쳐 오늘날 다양한 관점들을 포함한 신생 전문분야로 자리를 잡았다. 이 관점들을 종합해 보면 위험 지각과 행위에 사회가 미치는 영향, 위험의 조직적 맥락과 그에 대한 제도적 대응의 중요성, 그리고 대규모 사회변화에서 위험의 역할 등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관점들에는 서로 구분되는 네 가지 연구 방향 ― 어떤 경우에는 그 지향이나 접근법에서 서로 겹치기도 하지만 ― 이 포함된다. 아래에서 토론될 네 가지 방향은 미시에서 중간 단계를 거쳐 거시에 이르기까지 이론적 집적 수준이 점차 증가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첫 번째 방향은 심리측정적 접근을 전례삼아 그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사회학적 렌즈를 들이대어 심리측정의 연구결과를 재검토하고 재개념화하는 것이다. 몇몇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일반인들에게 위험 문제가 두드러지게 부각되어 있는지, 또 심리측정의 연구결과를 확장해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실험실 환경과 비전형적 집단의 소규모 표본에 대한 의존이 그 발견을 일반화함에 있어 심각한 제약요건이라고 지적했다(Gould et al., 1988). 이에 대해 헤이머의 해석 연구는 인지적 발견법이 [실험실이나 소규모 표본조사가 아닌] 일상 조건 하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Heimer, 1988). 굴드 등이 수행한 광범한 표본조사(Gould et al., 1988)와 뒤이어 프랑스(Bastide et al, 1989), 홍콩(Keown, 1989), 헝가리(Englander et al., 1986), 일본(Kleinhesselink and Rosa, 1991, 1993), 노르웨이(Teigen et al., 1988), 폴란드(Goszczynska et al., 1991)에서 이루어진 후속연구들은 일반적으로 심리측정 연구에서 얻어진 결과를 뒷받침하고 있다. 최근의 몇몇 연구들은 심리측정의 패러다임의 기본 생각과 부합하면서도, 성별이나 민족에 따라 위험 지각에서 날카로운 차이가 나타남을 보여주고 있다(Davidson and Freudenburg, 1996; Slovic, 1999). 그러나 많은 개념적, 방법론적 문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 발견법들은 사소한 결정과 사소하지 않은 결정에 서로 다른 영향을 미치는지 △ 서로 다른 삶의 기회에 직면한 인구 집단간에 [위험] 지각은 어떻게 다른지 △ 선택의 틀은 사회적 행위자들간의 권력 차이에서 일차적으로 도출되는지 등이 그런 문제들이다(Heimer, 1988). 가장 심각한 문제는 위험 지각을 통해 실제 행위를 예측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를 다룬 연구가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사회학적 연구의 두 번째 방향은 심리측정 모형에 대해 근본적인 재개념화를 제시한다. 여기서는 인간의 지각이 형성되는 사회적 맥락을 고려에 넣어 위험 지각의 문제를 탐구하는 모형을 제안하고 있다(Rosa et al., 1987; Short, 1984). 이 모형은 모든 사회심리학 연구에서 기본적인 가정, 즉 인간은 때묻지 않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가족, 친구, 상사, 동료 노동자 등의 일차적 영향을 거쳐 전달된 사회문화적 의미에 의해 걸러지는 지각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저명인사들, 그리고 특히 대중매체 등과 같은 이차적 영향 역시 위험 지각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추정된다(Mazur, 1984).

사회학적 모형에서는 이러한 맥락적 효과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실에도 주목한다. 사람들은 종종 위험한 기술이나 사건에 대해 의미있는 지각을 발전시키기도 전에 그에 관해 행동을 취하거나 태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정부 기구나 기업과 같은 공식 조직들 역시 기술적 위험에 관한 결정이 내려진 실제 이유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 설명을 사건이 일어난 후에 제시하곤 한다(Clarke, 1989). 그와 같은 ‘사후적인(after the fact)’ 믿음들은 이미 형성된 태도나 이미 취해진 행동에 대한 정당화로 종종 이용된다. 이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일방향성을 강조하는 심리측정 모형에서는 무시되어 왔다. 반면 사회학적 모형에서는 이것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세 번째 사회학적 방향은 복잡한 기술과 그것의 이용을 위해 발전된 정책의 시스템적 특성과 맥락을 강조하는 조직적·제도적 접근이다. 이 접근의 대표적인 사례로 ‘정상적 사고(normal accidents)’에 대한 페로우의 분석을 들 수 있다(Perrow, 1984; 1994). 그는 산업사회가 다양한 고위험 기술들을 양산해 냈음을 보여 주면서, 여기서는 그것의 안전을 보증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의 일부가 바로 위험을 가져오는 주요한 원천 중 하나라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많은 기술시스템들에서는 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인간을 포함한)간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사고 ― ‘시스템 사고’ ― 는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복잡한 기술에 대한 공식적 위험 평가는 통상 시스템의 구성요소들 각각의 실패 확률을 계산해 그것의 총합을 구함으로써 전체적인 사고 확률을 추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조직적 접근에서 보면 그러한 정량적 평가가 정확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인데, 왜냐하면 결합지점에서의 실패를 야기할 수 있는 구성요소들간의 수많은 상호작용을 고려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패는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정상적 사고’ 이론의 심란한 결론에는 여러 가지 사회학적, 정책적 함의가 담겨 있다. 이에 따르면 기술적 위험은 공식적 위험 평가를 통해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 위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험한 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이 서로 결합된 방식(Freudenburg, 1988)과 기술이 포함되어 있는 사회-기술적 시스템의 진화과정(Burns and Dietz, 1992a)을 분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해를 위해서는 기업 행위자나 기관의 엘리트가 행하는 의사결정의 조직적·제도적 맥락에 사회학적으로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러한 초점이 이쪽 방면의 사회학 연구들에서 등장하기 시작하고 있다(Jaeger et al., 2001; Short and Clarke, 1992).

‘정상적 사고’ 이론과 대극을 이루는 것이 ‘고신뢰성 조직(high reliability organization, HRO)’ 이론인데, 이 이론을 따르는 연구자들은 대부분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에 자리를 잡고 있다(LaPorte, 1988; LaPorte and Consolini, 1991; Roberts, 1993; Rochlin et al., 1987; Wildavsky, 1988). 버클리 그룹에서는 그 운영이 기술적으로 복잡하고 본질상 위험한데도 놀라울 정도로 안전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조직들을 파악하는 작업을 해왔다. 여기서 복잡성과 위험에 직면해서도 이토록 놀라운 업무수행을 해내는 조직을 일컫는 말이 고신뢰성 조직이다. 버클리 그룹은 여러 건의 연구를 통해 HROs의 존재를 입증하는 경험 연구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해 왔다. 이들은 세 개의 HROs에 대해 광범한 현장연구를 진행했는데, 미 연방항공국(FAA)의 항공교통 관제시스템, 퍼시픽가스전기회사(PG&E)의 전력망(PG&E는 미국에서 가장 큰 전력회사 중 하나이며, 디애블로 계곡 핵발전소를 자체 전력망 속에 포함하고 있다), 미 해군 핵항공모함 두 척의 평화시 비행 훈련이 그것이다.

어떻게 이 조직들은 그토록 안전하게 운영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버클리 그룹의 입장은, 안전과 신뢰성이 조직의 최고 지도자에게 가장 높은 우선순위가 되는 ‘고신뢰성 문화’의 발전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조직들은 여분(redundancy)을 갖도록 ― 부품을 복수로 구비하거나 예비 시스템을 포함하는 것과 같은 ― 시스템을 설계함으로써 하드웨어나 사람이 빚어내는 잠재적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 결국 HRO 이론은 사고가 예방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렇지 않다는 입장인 정상적 사고 이론과 서로 대립한다. 여기서의 입장대립은 매우 중요한 쟁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주제에 관한 경험연구가 더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방향에서 주목할 만한 최초의 시도 중 하나는 핵무기의 관리를 다룬 세이건의 연구이다(Sagan, 1993).

네 번째 사회학적 방향은 거대이론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거대규모를 다룬 거시사회학적 이론이라 할 만하다. 유럽의 사회학적 전통에 뿌리를 둔 이러한 사고방향의 주제는 근대성에서 그 후속형태 ― 일종의 탈근대성 ― 로의 변환이라는 전세계적 사회변화이다. 그런 이론화의 대표적인 예로는 영국의 사회학자인 앤쏘니 기든스의 {근대성의 귀결 The Consequences of Modernity}(1990)과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Risk Society: Toward a New Modernity}(1992)를 들 수 있다. 이 이론들 각각은 대단히 광범한 영역을 다루고 있고 매우 공들인 논리를 구사하고 있으며 극히 미묘한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의 짧은 언급을 통해 그들의 논의를 제대로 소개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그들은 유럽적 전통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이론을 실제 운용하는 데 필요한 의미해석을 다른 이들에게 맡겨두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저작이 위험의 사회학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평가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가 더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론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서 다루지 않고 건너뛸 수는 없다.

기든스 논지의 핵심에 위치한 것은 근대성 ― 17세기에 유럽에서 등장해 점차 전세계로 퍼진 사회생활과 조직의 양식 ― 이 지구화(globalization)로 귀결되었다는 관찰이다. 여기서 ‘지구화’란 ‘전세계적 사회관계의 강화로서,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로부터 수천, 수만 마일 떨어진 일어난 사건에 의해 형성되며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하는 식으로 서로 동떨어진 지역들이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Giddens, 1990: 64). 근대성의 도래와 함께 개인이 접할 수 있는 대인 상호작용의 범위에 가해지던 지역적 제약이 없어졌다. 기든스의 표현을 빌면, 사람들의 사회관계가 ‘장소에 얽매이지 않게(disembedded)’ 된 것이다. 그 결과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은 ‘그 곳에 없고’ 멀리 떨어진 생면부지의 타인들과 상호작용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탈근대성이 가까워지면서 이러한 장소귀속으로부터의 탈피는 이차적인 결과를 낳는다. 전세계적 노동분업, 생산과정과 연관된 위험의 전세계적 확산, 그리고 소비행태의 전세계적 확산과 그에 수반하는 위험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공유된 위험의 패턴에 겹쳐지는 것은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방사능 누출, 지구온난화, 오존층 파괴, 산업활동과 기타 인간활동과 연관된 독성물질의 광범한 확산 등과 같은 전지구적 위험의 등장이다. 이런 위험들은 국경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부자와 빈자 사이의 구획, 세계의 여러 지역간의 구획을 존중하지 않는다'(Giddens, 1990: 125). 한마디로 말해, 탈근대성은 새로운 형태의 지구적 상호의존, 즉 전지구화된 위험에 근거를 둔 상호의존을 만들어냈다. 그러한 상호의존은 다시 신뢰의 중요성을 확대시킨다.

벡의 이론적 논지는 기든스의 입장과 유사하지만 그것과는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벡의 주장은 두 개의 상호연관된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험이 그 중 하나이고 벡이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라고 부르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벡은 자신의 첫째 주제를 전개하기 위해 산업사회와 현대사회간의 근본적 차이를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전자는 재화의 분배를 축으로 하는 반면, 후자는 ‘해악(bads)’ 내지 위난의 분배를 축으로 하기 때문에 이를 ‘위험사회’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산업사회에서 위험사회로의] 이러한 전환은 계급 중심에서 위험지위(risk position) 중심으로 사회조직의 근본적인 재구조화를 수반한다. 또한 그것은 ‘계급지위에서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지만 위험지위에서는 반대로 의식(지식)이 존재를 규정한다’는 공유된 의미문화를 새롭게 만들어낸다(Beck, 1992: 53). 이러한 근본적 변화로 인해 계급과 같은 구조의 중요성이 약화됨과 동시에 사회적 행위자들은 개인화된다. 이제 위험관련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하게 된 개인들은 그런 결정을 책임지고 있는 사회제도에 관해 심사숙고하게 된다. 벡은 기든스처럼 위험의 지구화 현상을 서술하면서 이를 다룸에 있어 신뢰의 역할을 강조하며, 여기에 미래세대에 대한 고려를 덧붙이고 있다.

벡의 둘째 주제는 다른 학자들 역시 강조했던 문제로(Burns and Dietz, 1992a; Dietz et al., 1989; Dunlap et al., 1993), 위험관련 쟁점에서 과학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과학은 한편으로 위험과 위해의 증가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위험에 관한 지식 주장을 위임받은 중요한 사회제도이기도 하다. 벡이 보기에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위험은 모호하고 정의하기 어려우며, 경쟁하는 해석과 상반된 주장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위험의 정의에서 합리성에 대한 과학의 독점이 분쇄된다'(Beck, 1992: 29). 과학이 더 이상 특권적인 지식이 아니라면 위험사회는 어떻게 그 사회를 특징짓는, 점증하는 위험에 관한 지식 주장들을 만들어낼 것인가? 벡이 보기에 해답은 ‘성찰적 근대성’에 있다. 그가 이 말을 통해 의미하는 바의 핵심은 과학, 정치적 이해집단, 그리고 일반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식 주장의 협상 ― 결국 서로 다른 인식론들간의 협상 ― 이다.

이러한 거시이론적 논의는 아직 위험의 사회학에 관한 기존 연구나 신진 연구 속에 썩 잘 통합된 편은 못된다. 근대사회에서 과학의 특별한 성격에 대한 강조는 위험관련 문헌들에서 흔히 나타나는데, 이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위험 과정의 지구화는 전지구적 환경변화에 관한 토론에서 중심 주제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Dietz, 1992; Stern et al., 1992). 과학지식과 여타 지식형태의 결합 역시 기술, 위험 및 영향평가를 다룬 일부 문헌들에서 강조되어 온 주제이다(Burns and Uberhorst, 1988; Dietz, 1987, 1988; Freeman and Frey, 1990-1991; Stern, 1991). 그러나 위험이 보편적이라는 주장은 위험 분포에 관한 최근의 연구와 잘 들어맞지 않는다(아래 이어질 논의를 보라). 논문의 마지막 절에서 언급하겠지만, 이 주제와 여타 관련된 주제를 둘러싸고 광범한 연구 의제가 존재한다.

인류학적 관점

위험 분석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역시 위험관련 문헌들에 기여해 왔다. 이 접근법을 처음 정식화한 것은 메리 더글러스와 애런 윌다브스키의 책인데, 그들은 이 책에서 특정한 위험이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객관적인 위험이나 물리적 실재와는 거의 혹은 전혀 연관이 없는 순전히 사회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했다(Douglas and Wildavsky, 1982). 개인들은 [위험의 객관적인 정도를 따져보는 대신] 자신들이 품고 있는 가치와 공명하는 조직과 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그들이 지닌 중핵 가치는 개인적 특질, 제도적 사회화, 혹은 이 모형에서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다른 요인들에 근거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더글러스와 윌다브스키는 위험을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 ‘기업가들(entrepreneurs)’과 위험을 매우 싫어하는 ‘평등주의자(egalitarians)’ 내지 환경주의자들간의 차이를 강조한다. 여기서 기업가들은 풍요와 자유를 만들어낸다는 이유로 많은 갈채를 받는 반면 환경주의자들은 사이비 종파나 마녀에 비유된다. 더글러스와 윌다브스키는 조직적인 자기 유지의 필요성이 기술적 위험에 대한 환경운동 집단의 우려의 기반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환경주의자들은 ‘우주적 파멸(cosmic doom)’의 감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성원의 결속력을 다진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대해 강한 어조의 비판들이 다수 제기되어 왔다(예를 들어 Abel, 1985를 보라). 이와 같은 비판들에서 핵심적인 생각은, 더글러스와 윌다브스키의 학자적 시각 속에 사회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둘러싼 이론적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한편으로, 이러한 개념 틀을 위험에 관한 민속지 연구와 조사의 방향 설정을 위해 이용하려는 시도도 있어 왔다(Dake, 1991; Dake and Wildavsky, 1991; Douglas, 1992; Rayner and Cantor, 1987; Thompson et al., 1990).

지리학적 관점

지리학은 자연재해에 대한 인간의 반응과 경관(景觀)을 변화시키는 인간 활동에 관한 연구에서 독특한 전통을 갖고 있다(예컨대 White 1974). 최근들어 이런 전통은 기술적 위험을 포괄할 수 있도록 확장되어 왔는데, 이와 같이 확장된 전통은 점차로 더 많은 문헌들을 배출해 내면서 위험에 관해 지금까지 나온 사회과학 문헌들을 체계화하는 폭넓은 이론 틀을 개발하고 있으며, 아울러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방향을 제공하고 있다(Cutter, 1993; Kasperson et al., 1988; Renn, 1992). ‘사회적 증폭(Social Amplification)’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이론 틀은 커뮤니케이션이론에서 빌어온 것으로, 위험 지각과 행위간의 연결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주는 한편으로 지금까지 관련 문헌에서 무시되어 온 위험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Machlis and Rosa, 1990).

이 이론 틀에 따르면 위험의 사회적 증폭 역시 유사한 과정을 따른다. 여기서 위험 사건은 신호이다. 그러한 신호에 포함된 메시지는 최종 수신자인 대중에게 도달하기 전에 증폭된다. 증폭은 위험을 고양시키거나 감쇠시키는 방향 어느 쪽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주요 증폭 기제에는 정보 과정, 제도, 사회적 환경, 그리고 다양한 개인적 경험들이 포함된다. 그런데 위험 신호의 증폭은 부분적으로 인지적 발견법에 기인하기 때문에, 이 이론 틀에서는 위험 지각에 관한 심리측정의 연구결과와 위험 커뮤니케이션의 제도적 맥락을 통합해 위험에 대한 반응을 좀더 잘 예측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 출전: Thomas Dietz, R. Scott Frey, and Eugene A. Rosa, ‘Risk, Technology, and Society,’ Riley E. Dunlap and William Michelson (eds.), Handbook of Environmental Sociology (Westport, CT: Greenwood Press, 2002), pp. 329-369.

** “heuristic”은 어떤 체계적인 탐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험적 방법 ― 특히 시행착오 ― 에 의해 학습이나 발견, 문제 해결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발견법”으로 번역했다. ― 옮긴이

*** 일반인들이 이런 설문을 잘 맞추지 못하는 이유는 질문들이 일상적인 사고방식과는 다른 형태로 제시되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다소의 증거가 있다. 예를 들어 Cosmides and Tooby(1996)는 응답자들이 빈도를 묻는 형태의 확률 문제는 잘 맞추지만 베이즈 공식에 의거한 문제는 잘 풀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Gigerenzer et al.(1989)는 언뜻 보아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확률 실험의 결과들이 실은 일관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고 모형(mental model) 이론을 제시했다. 아래에서 보겠지만, 이러한 심리학적 접근은 인간의 사고방식이 진화하고 발전해 온 사회적 맥락 ― 인간의 의사결정을 위한 선택의 틀이 되는 환경 ― 을 고려에 넣음으로써 크게 보완될 수 있다. 인간이 내리는 대부분의 결정은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며, 상호작용에 요구되는 결정의 계산법은 규범적 의사결정 이론에서 통상 이용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토머스 디에츠, 스콧 프레이, 유진 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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