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아시아 2003-03-17   1150

곁다리 텍스트의 즐거움

어린 시절, 별 보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밤하늘에야말로 ‘이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왔는가?’에 대한 답이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위를 쳐다보다 보니 목이 어지간히도 아팠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문득, 고개를 쉬고 아래를 보게 되었습니다. 땅이, 그리고 그 땅을 딛고 선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는 그렇게 보고 싶었어도 볼 수 없었던 것들 대신에, 아주 잘 볼 수 있었음에도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저 하늘 위에서뿐만 아니라, 이 땅 위에서도 별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 뒤부터 그 별들을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 수 있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로 말입니다.

최근에 논문이란 걸 써보았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그 말을 다 하기란 역시 무리였습니다. 학위 논문을 에워싼 여러 가지 형식들과 제약들 때문에 그랬다고 한다면, 그건 핑계에 불과할 것입니다. 적어도 제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진짜 이유는 “하고 싶은 말”이 “말다운 말”로 나오지 않았던 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말’이라는, 논문 내에서 “말다움”이 요구되지 않는 유일한 공간을 축내고야 말았습니다. 찜찜한 기분이 다소 들긴 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 제대로 못했던 설움이 조금은 가라앉은 기분이었습니다. 어쩌지요? 바로 그 말을 허락도 받지 않고 방금 저 위에다가 옮겨놓았으니 말입니다.

어떤 평론가가 책날개의 글들―주로 추천사들―을 ‘곁다리 텍스트(paratext)’라 불렀다 합니다. 책의 내용을 속알맹이라 본다면, 그 책의 표지는 말 그대로 겉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껍데기만으로는 우리가 정말 알고 싶은 알맹이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주례사’같은 껍데기는 알맹이를 과장하거나 왜곡하기까지 하지요. 그렇지만 저는 곁다리 텍스트의 역할이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텍스트에 대해 독자적인 한편으로,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 주고, 그런 면에서 텍스트와 상보적인 역할을 하고, 나아가 텍스트와는 다른―그렇지만 결코 가치가 떨어졌다거나 진리로부터 멀어진 것은 아닌― 제 3의 텍스트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에서 이 모든 과정이 저자나 저자가 만들어낸 알맹이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독자―그 독자가 주례 마인드를 갖지 않아야 바람직하겠습니다만―는 기꺼이, 저자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맘껏 곁다리 텍스트들을 만들어가야 하겠지요.

갑자기 왜 이런 어설픈 해석학을 들먹이는지, 궁금해하실 만도 합니다. 저는 《시민과학》의 역할이 곁다리 텍스트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텍스트(과학적 지식)에 대한 권리를 나누는 것, 그리고 그 텍스트에 대해 “말다운 말(전문 용어)”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낼 만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 또 있습니다. 단순히 독자(대중)가 텍스트를 이해하는 수준을 높이는 차원을 넘어서, 독자를 적극적으로 텍스트의 생산자로서 끌어들이는 한편으로 소박한 저자(과학자 집단)들의 온전한 “알맹이”에 대한 신화를 깨는 것. 결국 그것이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왔는가?’, 나아가 ‘이 모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지선 | 시민과학센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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