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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기술정책
  • 2004.10.20
  • 1333


지금껏 전력정책, 한번도 국민의 동의나 사회적 합의 구하지 않아

지난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3박4일 동안 시민과학센터 주최로 열린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합의회의’는 이제까지 우리나라 정부가 고수해온 원자력 중심의 전력정책이 과연 타당한가를 일반시민의 관점에서 꼼꼼히 따져보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1978년 고리 1호기가 완공되어 첫 상업운전을 시작한 이래 총 19기의 원자력발전소가 지어졌으며 현재 국내 총 전력생산 중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넘게 되었다. 그런데 정부의 장기전력수급계획에 따라 앞으로 9기의 원전을 추가로 건설하게 되면 이 비중은 2015년에 44.5%에 이를 전망이다. 문제는 원자력의 공급확대에 기반한 이러한 전력정책이 한번도 국민의 동의나 사회적 합의를 구하지 않고 추진되어 왔다는 점이다.

정부의 이러한 일방적 정책 추진은 이미 큰 사회적 저항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1990년의 안면도 사태와 94년의 굴업도 사건 그리고 작년에 벌어진 부안 사태 등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의 부지선정을 둘러싼 논쟁이 무려 18년을 끌어오면서도 아직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정부가 주민과 환경단체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밀어붙이기식으로 원전의 홍보와 방폐장의 건설만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소모적 갈등과 그로 인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원자력 중심의 전력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구할 필요가 있으며, 그 유력한 방편중 하나로서 일반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를 여기에 적용하면 좋겠다고 시민과학센터에서는 판단하였다.

시민의 입장에서 전력정책을 논의하다

‘합의회의’란 마치 외국 법정의 시민배심원과 같은 것을 정책결정에 도입한 아이디어로서, 예컨대 원자력이나 생명공학처럼 첨예한 사회적 쟁점이 되며 충분한 정보를 토대로 전문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는 정책사안에 대해 보통의 시민들도 주체로 참여할 수 있게 만드는 혁신적인 제도이다. 15~20명 정도의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되는 시민패널은 다양한 입장과 지식을 가진 전문가패널로부터 정보를 제공받고 학습한 뒤, 치열한 토론과 숙의 과정을 거쳐 스스로 마련한 최종 정책권고안을 사회에 공표해 정책에 반영되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합의회의는 덴마크에서 1987년 처음 성공적으로 개최된 이래 다른 유럽 국가들과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 등 많은 나라로 확산이 되고 있는 중이다.(*전세계에서 현재까지 진행된 합의회의의 내용을 살펴보려면 http://www.loka.org/pages/worldpanels.htm을 참조할 것.)

시민과학센터가 현재 국내의 상황으로 볼 때 모험인 줄 알면서도 원자력 정책에 대해 합의회의를 시도해보기로 과감하게 결정한 것은 과거 두 번에 걸쳐 쌓은 성공적인 합의회의의 경험과 자신감이 그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1998년에 유전자조작식품의 안전성을 주제로 열렸던 합의회의와 1999년 생명복제기술의 윤리성 문제를 다루었던 합의회의는, 비록 공식적인 주최기관은 유네스코한국위원회였지만 두 번 다 그 프로젝트책임자를 비롯해서 실질적인 추진팀은 시민과학센터의 구성원들이 맡았던 것이다. 이 두 번에 걸친 합의회의 경험을 통해 시민과학센터는 우리나라의 보통 시민들도 참여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외국 어느 나라의 시민들 못지 않게 민주적 정책결정의 훌륭한 주체가 될 능력이 충분하다는 믿음을 확고히 가지게 되었다.

회사원, 주부, 농업기술자 다양한 층들이 모여 합의

원자력 문제처럼 찬반의 쟁점이 첨예한 주제의 합의회의에서는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그 생명이기 때문에, 조정위원회 구성에서부터 시민패널과 전문가패널의 선정에 이르기까지 준비과정의 모든 사항에 대하여 원자력에 대한 찬반 입장 중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기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합의회의의 주인공인 시민패널은 6~7월 중 약 3주에 걸쳐 주로 신문광고와 인터넷을 통해 모집하였으며 총 176명의 지원자 중에서 연령과 성, 직업, 거주지 등을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16명(남 9명, 여 7명)을 선정하였다. 20대 초반에서부터 70대에 걸친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된 이 시민패널은 퇴직교사, 회사원, 주부, 학생, 기업가, 농업기술자 등 원자력과 전력정책에 대해 전문지식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그야말로 평범하고 다양한 일반시민들이다.

시민패널들은 7월 24일과 9월 4일 두 차례의 주말을 이용해 열린 예비모임에서 원자력과 전력정책 전반에 관한 예비지식을 전문가의 강의와 자료를 통해 제공받고 미리 학습하는 기회를 가졌다. 아울러 이 자리에서 합의회의 본행사 때 다루고 결론을 내려야 할 주요 쟁점과 질문들을 자체의 토론을 통해서 뽑아내고 다듬는 일을 하였다. 이런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 비로소 3박4일의 본행사가 성공적으로 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본행사 첫날과 둘째 날전문가패널의 강의와 시민패널/전문가패널간 질의 및 토론이 모두 끝난 후, 시민패널들은 이제까지 제공받은 다양한 정보와 각자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서로의 생각과 판단을 함께 나누는 길고 열띤 토론시간을 토요일 밤과 일요일 내내 가졌다. 주요 쟁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토론 후 무기명 비밀투표를 통해 3/4 이상의 찬성이면 ‘합의’로 간주하되 반드시 소수 의견을 보고서에 명시하자는 원칙을 정하였고, 이에 따라 하나씩 합의된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그렇게 얻은 합의된 결론들을 시민패널들 스스로의 공동 작업에 의해 최종보고서에 담아서 마지막 날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던 것이다.

시민합의회의 결과, 정부 전력정책 결정에 반영되어야

시민패널이 내린 결론은 신중하고 균형잡힌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단기적으로 현재의 원자력발전을 대체할 만한 다른 전력원은 없기 때문에 지금 가동중인 원전은 유지해야 하지만, 중장기적인 대안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추가적 원전건설은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중장기적 대안으로서 철저한 수요관리와 시스템 정비, 그리고 전력원의 다양화와 지역적 분산화를 시민패널은 제시하였다. 이는 원자력에 대한 단순한 찬반 입장을 넘어서서 친환경성과 경제발전의 조화를 추구하는 일반시민의 관점이 잘 나타난 결론이라 생각된다. 사실 필자의 관찰에 의하면 시민패널들은 원전 자체에 대한 반대보다는 그동안 정부와 전문가에 의해 폐쇄적으로 결정되고 일방적으로 추진되어 왔던 원전중심 전력정책에 대한 거부감과 불신을 더 강하게 나타냈다.

이번 합의회의는 우리나라의 일반시민들이 균형된 정보가 충분히 주어질 경우 원자력발전의 지속여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민주적인 토론과 숙의를 통해 시민패널들이 합의한 이번 결론은 피상적인 일회성 여론조사와는 그 중요성이 다르며, 따라서 앞으로 정부가 전력정책을 결정하는 데 진지하게 고려되고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지금 ‘참여정부’가 당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 역시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앞으로는 합의회의와 같은 시민참여 제도를 시민과학센터같은 민간단체만이 아니라 외국의 경우처럼 국회나 정부가 설립한 독립적 기구에서 주최하도록 만드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김환석(국민대 교수. 전력정책시민합의회의 프로젝트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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