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인간복제 소식을 듣고 떠오른 두가지 질문

우리가 인간복제를 막을 수 있을까?혹은 복제된 아이는 인권을 가지는가?

이 글은 민주노동당 기관지 [이론과실천](창간준비4호, 2001년 10월)에 실린 글, ‘인간복제, 그 거울에 비추어본 진보’의 일부를 필자가 수정보완한 것입니다(편집자주)

‘우리가 인간복제를 막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벌써 작년부터 스스로에게 던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질문은 그 시작부터 절망감을 가지게 했다. 그리고 결국 그 절망감은 오늘 현실화되었다. 맹신적인 과학기술 지상주의자들 집단인 클로나이드사가 올해 마감을 며칠 앞두고, ‘드디어’ 인간복제 아기의 출산을 발표한 것이다. 이미 예견된 것들이다. 클로나이드사가 인간복제를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지켜봐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이미 윤리적 금기의 벽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생명 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생명과학과 의료기술은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을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인 영역에서 세속의 인권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는 중이다. 인간복제도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종으로서의 인류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누구의 인권이 어떻게 침해되는가하는 점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복제의 논의에서 종종 사라지곤 하는 구체적인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한 여성주의자는 사람들이 인간복제에 대한 논쟁에서 추상적인 ‘인간 존엄성’ 담론에 기대면서 구체적인 인간, 즉 여성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인간복제에 대한 논쟁에서 사라져버리곤 하는 대상―체세포 핵을 집어넣을 미수정 난자와 복제된 수정란을 착상시켜야 할 자궁―에 대한 문제를 부각시킨다. 그것은 모두 여성의 몸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복제에 이용될 체세포 복제 기술의 상당 부분은 불임클리닉에서 오래전부터 여성을 대상으로 발전시켜 온 체외수정시술법에 의존하고 있다. 의사들은 체외수정을 위해서는 여성에게 난소낭종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과배란유도제(호르몬제제)를 투여하여 난자의 배란을 유도한 후에, 외과적 시술을 통해서 난자를 추출해낸다.

이어서 시험관 내에서 수정시킨 수정란을 여성의 자궁 안에 착상시키는데, 임신률을 높이기 위해서 다수의 수정란을 착상시켰다가 너무 많은 착상이 이루어지면 선택적 낙태를 시행하기도 한다. 이 모든 야만적인 행위가 ‘불임치료’라는 이름으로 매일같이 불임클리닉에서 시행되고 있고, 특별한 저항없이 사회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체세포 복제 기술을 인간복제를 위한 출산보조기술로 사용한다면, 체외수정시술법은 반복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여성주의자들에게는 인간복제의 문제가 체외수정시술의 반인권적 문제와 구별되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근대 출산기술이 여성에게 가하고 있는 폭력이 연장되고 있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복제가 파괴한다는 ‘인간존엄성’의 문제가 구체적인 인간인 여성들의 몸을 대상으로 진행될 체외수정시술의 인권 침해의 문제를 제외하고 무엇이 남는 것인지 묻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불임시술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강점’때문에 세계적인 불임시술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한국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를 상징하는 수치가 매년 200만건에 달하는 낙태시술 건수일 것이다.

인간복제 논의에서 사라진 인권이 여성의 것만 아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리고 당위적으로 존재하지 말아야 할 복제된(될) ‘인간’에 대한 인권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인간복제를 반대하고 있는 카톨릭 신부에게, 짓궂은 목사가 물었다.

“복제 인간이 태어난다면 세례를 해주시겠습니까?” 이것을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그에게도 인권이 있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일 것이다. 신부는 대답을 피했다. 폭주하는 생명공학에 그나마 실효성있는 견제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카톨릭과 같은 종교일 것이다. 하지만 “절대 안돼!”를 외치는 완강함은 부러지기 십상이다.

필자는 복제인간에게 인권이 존재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인간복제의 시도는 더욱 무모해질 것이라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한다. 복제양 돌리의 277번만의 성공은 인간복제라고 예외는 아니게 될 것이며, 비합법적 시도든 합법적인 시도든 간에 복제과정에서 만나게 될지 모를 그/그녀의 인권을 유예하는 순간에 인간복제를 향한 도덕적 장애물을 치우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권이 없는 존재인 ‘리플리컨드’를 풀빵처럼 찍어낸들 무엇이 문제인가?

한편 존재하지도 않는 복제 인간의 인권에 대한 고민은 새삼스럽 사회적 차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으로 이어진다. 복제 인간은 남들과 구별되는 방식으로 출생하였다는 점에서 차별을 받게 될런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체외수정시술로 태어난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현재 사회적으로 차별받지 않고 있다면, 앞으로 복제 인간이 출생 방식때문에 차별받게 될 것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가 존중받아야 할 다양성의 원천이 아니라, 끈임없이 차별의 근거로 삼아 분할하여 관리하고 또 소비시키려는 이 사회는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우리는 출생을 통해서 우연적으로 부여받게 된 인종적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아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고 있지 않은가.

필자는 복제된 인간이 외국인 노동자와는 달리 차별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외국인 노동자―이 뒤에 사회적 차별을 받는 수많은 이들의 이름이 이어질 것이다―들이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겠지만.

인간복제 논쟁이 막 시작되었을 즈음에 참가하게 된, 어떤 모임에서 얻게 된 결론은 ‘인간복제 반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과연 인간복제를 반대할 수 있을까하는 절망감이었다(그리고 사실상 그 절망감은 오늘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우리 사회에는 인간복제를 수용할 수 있는 너무도 비옥한 사회·문화적 토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식을 가지려는 욕망은 절대화되고 있으며, 자식 또한 핏줄이 이어진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 고집되고 있다. 더나아가 핏줄은 남성의 것으로, 또한 유전자의 동일함으로 이해되고 있다. 반면에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다른 사회적 대안―예컨대, 입양―은 계속 주변화되고 있다.

또한 이런 욕망을 방조하고 부추기는 상업적 의료세력들은 아무런 규제없이 폭력적인 불임시술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불임시술의 뒷면에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만연된 낙태시술의 현실도 있다. 뿐인가.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은 모두 한다”는 과학기술 시대의 새로운 맹신도 사회에 가득차 있다.

아직 물러설 시간은 되지 않았지만, 초조히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되물어 본다.

“우리가 인간복제를 막을 수 있었을까?”

한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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