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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연대    행복한 참여 따뜻한 연대

  • 간행물<시민과학>
  • 2003.09.23
  • 2573


최소희 시민과_센터 회원

1931년 아프리카 케냐의 올두바이 계곡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30년 동안 건조한 사막 바닥을 기어다니던 루이스 리키는 자신이 진잔트로푸스라 명명한 두개골 화석을 발견한 직후 유인원의 연구를 통해 인류의 과거를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세 명의 여성(일명 삼총사Trimates로 불린다)을 차례로 현장으로 파견한다. 대형 유인원으로 분류되는 침팬지, 마운틴고릴라, 오랑우탄을 연구한 제인 구달Jane Goodall, 다이안 퍼시Dian Fossey, 비루테 갈디카스Birute Galdikas가 바로 그들. 시중에 번역서가 꽤 있으나 제인 구달만 널리 알려진 것 같기에 소개해 본다.

『인간의 그늘에서: 제인 구달의 침팬지 이야기(제인 구달 지음, 이상임·최재천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1)』

『제인 구달: 침팬지와 함께 한 나의 인생(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민음사, 1999)

제인 구달의 이름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그는 루이스 리키가 대형 유인원에 대한 장기적인 연구를 구상하고 선택한 첫 번째 여성이었다. 1960년 나이로비의 곰베 침팬지 보호구역에서 제인 구달의 현장 연구는 시작된다. 리키가 대학에서 관련 과목을 수강한 적도 없고 비서 학교 학력뿐인 제인이 침팬지 연구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관찰력, 감수성 및 직관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앞선다는 점, 그리고 기존의 학계에 오염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동물 세계를 선입견 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제인 구달은 당시 과학계의 전형적인 연구방식인 실험과 조작을 배제한 채 침팬지를 연구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침팬지 개체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여서 관찰을 시작했다. 대상에게 1, 2와 같은 번호를 매기던 과학의 기존 방식과는 다른 접근 방법이었다. 이리하여 침팬지들은 플로,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 골리앗, 플린트, 미스터 맥그리거와 같은 이름을 갖게 된다.

그렇게 연구를 시작한지 다섯 달 째, 놀라운 결과가 학계에 보고된다. 침팬지가 포유동물을 사냥하고 또 사냥물을 나눠 먹을 줄도 알며 또 나뭇가지를 다듬어 흰개미를 낚시하여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동물행동학이 동물의 비인격화·실험적 통제·통계화로 이루어지던 그 시절, 제인은 이야기식의 접근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관찰 결과를 수량화하지 않았고 애초에 어떤 이론을 가정하고서 출발하지도 않았다. 이렇듯 지배보다 관계, 일반성보다 개체성, 통제보다 수용을 강조하는 방식은 여성들이 세계를 바라볼 때 취하는 태도였다. 제인은 여성적인 접근법을 기존 남성 과학자들이 독점해온 현장 연구에 적용했던 것이다.

제인 구달은 이후 현장 연구보다는 출판 및 강연에 힘을 쏟고, 그리하여 슬라이드와 책을 통해 침팬지의 세계를 전달하는 이야기꾼이 된다. 또 야생동물 연구와 교육을 통한 지식의 공유, 그리고 환경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제인구달연구소 The Jane Goodall Institute for Wildlife Research, Education, and Conservation(http://www.janegoodall.org)를 1977년에 설립하였으며, 이후 루츠 앤 슈츠(Roots & Shoots) 프로그램을 통해 국제적인 환경교육 운동을 벌이고 있다.

『유인원과의 산책(S.Y. 몽고메리 지음, 김홍옥 옮김, 다빈치, 2001)』

이 책은 평전의 형식이며, 여성 영장류학자 세 명의 행보와 위업을 일대기식으로 병렬 서술하고 있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침팬지, 마운틴고릴라, 오랑우탄의 생태는 가볍게 다뤄진다. 여기에서는 개인 저서나 평전이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 비해 정보가 취약한 다이안 퍼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루이스 리키의 두 번째 수제자는 미국 출신의 물리치료사 다이안 퍼시였다. 그는 1967년부터 3,000미터 고산 우림 지대에서 사는 마운틴고릴라 장기 연구에 들어간다. 마운틴고릴라는 유순한 채식주의자이며 새끼들에게 더없이 부드럽고 조심스럽다. 이들은 가족생활을 하는데 침입에 대비해 한두 마리의 보초를 세워 삼엄한 경계를 펼친다. 이들 보초는 경쟁집단의 은백색등이나 사냥꾼으로부터 가족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고릴라는 다른 집단과 교류하지 않는다. 고릴라 가족은 영장류 중 가장 응집력이 강한 반면 상하 위계질서가 엄격하다. 성숙한 고릴라는 자기 가족을 방어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기 때문에 밀렵꾼이 새끼 고릴라 한 마리를 얻으려면 성년 가족 모두를 죽여야 한다.

천식 때문에 숨을 헐떡이고, 경사면 등반 도중 수시로 미끄러지고 추락하고, 팔다리가 부러지는 힘든 생활에서 그를 지탱하게 해준 것은 고릴라들이었다. 그는 디지트라 이름 붙인 수컷을 가장 아꼈다. 그러나 디지트는 밀렵꾼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한다. 트로피 재료로 고릴라 머리를, 재떨이로 고릴라 손을 요구하는 서양인들이 늘어나면서, 그리고 사냥꾼들이 새끼 고릴라를 동물원에 팔면 큰돈을 벌 수 있음을 알게 되면서, 고릴라 밀렵이 극성스러워졌던 것이다. 밀렵꾼의 덫과 사냥개의 발자국으로 위협받으면서 다이안의 카리소케 연구센터는 무장한 캠프가 되어버린다. 그의 반밀렵 순찰은 적을 많이 만들어 버렸고, 결국 다이안 퍼시는 손도끼에 머리가 박살난 채로 발견된다. 이 때가 1985년이었다.

이처럼 그는 셋 중 가장 드라마틱한 생을 살았다. 퍼시의 삶은 그가 집필한 대중서적과 동명인 〈안개 속의 고릴라〉로 영화화되었다(이 영화는 DVD도 출시되어 있는데 아래 주소로 접속하면 영화 장면들을 만날 수 있다 : http://mydvdlist.hitel.net/mdlkth/detail.asp?branch=review&rid=1818&code=809038383817&mbcode=986208225#tabmenu).

『에덴의 벌거숭이들(비루테 갈디카스 지음, 홍현숙 옮김, 디자인하우스, 1996)』

1971년, 비루테 갈디카스는 인도네시아 보루네오 섬에서 오랑우탄 연구를 시작한다. 『에덴의 벌거숭이들』은 1991년에 그가 펴낸 책으로, 앞에서 소개한 책들에 비해 훨씬 종합적이고 지적이며 생동감 넘치게 설명되어 있어 장편 서사드라마를 보는 느낌을 준다. 특기할 점은 이 책이 1995년에 번역되었고, 국내에 여성 영장류학자들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이다.

갈디카스는 앞서의 두 선배와는 달리 대학에서 동물행태학, 생태학, 인류학, 고고학, 민속학 등을 공부하였으며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재원이었다. 학문적 기반이 있었기에 현대식 자료수집 기법과 통계분석으로 자료를 분류하고 분석할 줄 알았다. 그는 한 번에 오랑우탄 한 마리에게만 집중하는 초점동물표집이라는 기법을 이용한다. 그의 목적은 오랑우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보는 것이었다. 이렇듯 그 역시, 선배인 제인 구달, 다이안 퍼시의 연구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각 개체에게 이름을 붙이고 생활사를 관찰하려고 노력하면서.

오랑우탄은 지상 30미터 이상의 나무 위에서 생활하므로 거의 눈에 띄지 않고 관찰하기에도 상대적으로 힘이 든다. 또 야생 오랑우탄은 침팬지나 마운틴고릴라와 달라서 인간에게 접근하지도, 신체 접촉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오랑우탄은 고독의 표상이다. 특히 숫오랑우탄은 일단 어미로부터 독립하면 철저히 혼자 생활한다. 오랑우탄은 도토리, 바리탄열매, 빨간딸기 같은 과일과, 어린 잎사귀, 흰개미를 먹는다. 체구가 큰데도 불구하고 채식을 하기 때문에 이들은 활동 에너지 확보를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먹으면서 보낸다. 오랑우탄은 우산으로 비를 가리고 비 피할 곳을 만드는 행동을 한다. 또 얼굴을 마주 대고 교미를 한다.

이런 오랑우탄을 찾기 위해서 갈디카스는 어깨 밑까지 닿는 늪을 헤치고 다녀야 했다. 하루종일 관찰하고 거머리가 퉁퉁 불어서 속옷 안에서 떨어져 나왔고, 관찰하는 동안 옷 다섯 벌을 남편과 같이 번갈아 입기 때문에 밤새 덜 마른 옷을 다음 날 입고 나가야 했다. 더구나 당시에 오랑우탄은, 침팬지가 동물원이나 실험실로 팔려가고 마운틴고릴라가 밀렵되어 장식용품 또는 동물원으로 가는데 반해, 애완용으로 포획되거나 밀림의 개발(벌목, 농지 개간) 때문에 거주지와 식량이 줄면서 그 수도 점점 줄어가는 현실에 있었다.

비루테 갈디카스는 오랑우탄을 보존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정부관리를 설득하는 한편 많은 협상을 벌였다. 그는 현재 오랑우탄프로젝트를 통해 오랑우탄의 불법거래를 막고자 힘쓰고 있다. 제인 구달이 현장연구를 접은 데 비해, 비루테 갈디카스는 지금까지도 인도네시아 탕중푸팅의 리키캠프에서 오랑우탄의 생태를 연구하며 인도네시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산다.

*

이 세 명의 여성 영장류학자들의 삶은 마치 파노라마 같다. 그들의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이들은 기존에 행해져왔던 과학의 접근법을 바꾸면서 동물행동학 연구에 새 장을 열었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과정이나 태도에 완전한 찬사를 보내기에는 망설여지는 점이 있다. 제인 구달은 1986년까지 그가 머물던 곰베 침팬지들의 안전과 보호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전세계 실험실과 동물원에서 고통받고 학대당하는 침팬지의 환경은 모른 척 수수방관하였다.

한편 다이안 퍼시 사후, 마운틴고릴라 프로젝트가 도입되면서 고릴라 밀렵의 봉쇄보다는 고릴라 관광사업이 고릴라 보호와 경제 수익 측면에서 더 효과적임이 입증되었다. 다이안 퍼시는 고릴라 보호의 문제를 너무도 개인적이고 지엽적으로 해석, 적용했던 것이다.

비루테 갈디카스는 오랑우탄의 생존 환경 확보를 위해 밀림 개발을 비판한다. 하지만, 밀림의 목재를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곳은 아시아나 아프리카라기보다는 생활수준이 높고 소비의 폭이 그만큼 큰 서구사회가 아니던가. 오랑우탄을 애완용으로 키운 것 역시 인도네시아를 식민통치하였던 네덜란드의 백인들이 시작한 일이 아니던가. 누가 누구를 비난하며 누가 비판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이 세 영장류학자의 연구와 삶의 방식이 나름대로 깊은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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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 준비를 마치면 아침 6시 45분입니다. 학교가 그렇게 멀리
    있지는 않지만 아침 일찍 학교 가는 것을 즐기는 지라 언제나
    저의 등교 시간은 이릅니다.
    아직은 이른 시각이라 저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아직도
    꿈나라에 있습니다.
    하지만 전 왜 이렇게 싱글벙글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 피곤함이
    없진 않지만 왜 이렇게도 마음이 즐겁고 행복한 지. 그건 아
    마도 지금의 저에게 가족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겉으로는 부유했지만 안으로는 한없이 궁핍한 그런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고급스러운 옷과 장난감들로는 부모의 사랑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언제나 언성을 높이시며 크고 작은 부부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럴 때 마다 언제나 방 한구석 침대 모퉁이에 동생과 함께 머릴 손으로 감싸며 움츠려 있어야만 했습니다.
    무섭기만 하였습니다. 두렵기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저는 겁을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린 저에게 부모님의 불화(不和)에 내성이 생겼던 겁니다. 그런 저는 마음이 착하고 여린 여동생과는 달리 반항을 하고, 고집을 부리고, 친구를 때리는 등 못된 아이로 모습이 변해갔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고작 9살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가정은 깨어졌고, 저와 여동생 그리고 엄마 이렇게 세 사람만 가정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엄마는 발버둥치며 저희와 살아가려고 밤낮으로 일하러 다니시며 가정을 꾸려나가셨지만, 그게 엄마에겐 큰 무리가 된 것 같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엄마께서는 시름시름 앓으시는 일이 많아지셨고, 누워계시는 날이 많아지셨습니다.
    그 해 11월 병원에선 엄마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위암말기였습니다. “3개월 남았습니다.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엄마 곁에 함께 있었던 저는 담당 선생님께, “그럼 우리 엄마 죽어요? 왜요? 왜 우리 엄마가 죽는데요! 우리 엄만 나쁜 짓 안했단 말이에요! 우리 엄마가 얼마나 착한데 왜 죽어요! 제발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런 저의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시던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는, “얘야 나도 내가 가진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단다. 미안하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너무나 미안하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제가 살리고 싶다고 해서 살고 죽이고 싶다고 해서 죽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느낌을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엄마에겐 죽음도 쉽게 허락되질 않았습니다. 엄마의 투병 생활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암은 위는 물론이고, 장, 간, 이자, 폐 등 모든 몸속의 장기에 전이되어 손을 쓸 수조차도 없었습니다. 독한 항암치료로 인해 밤낮으로 토하고, 뼛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진통으로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하셨습니다. 어린 자식들에게 자신이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계속 저희를 떼어 내려고만 하셨습니다.
    “엄마라고 제대로 해 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면 내가 무슨 염치가 있어요.”
    이렇게 친척들에게 말씀하시며 우셨던 모습을 전 뒤에서 눈물을 삼키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희에게 정을 떼시려고 일부러 모질게 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 해 3월 4일, 유난히도 날씨가 짓궂던 그 날,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 전에 너무도 많은 눈물을 흘려서인지, 아님 저희 남매끼리 홀로 살아가야 할 두려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는 눈물조차 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저와 동생 둘 만의 생활은 그리 만만치를 못했습니다. 어쩜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12살, 9살 이 어린 두 아이들이 무엇 하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기본적인 생활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유난히 잠이 많은 남매는 일찍 자건 늦게 자건 항상 늦잠을 자서 학교를 지각하기 일쑤였고, 잘못된 식습관으로 탈도 많이 나고, 학업은 늘 밑바닥을 헤맸습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흘러 2003년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한 기회를 얻어 어학연수를 1년 동안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소년소녀 가장 세대에게 주는 특별한 기회였지만 1년의 어학연수가 저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없는 1년 동안 동생 미영이는 한 목사님 가정에 위탁되어 생활을 했었는데, 그것을 인연으로 저도 귀국 후에 목사님 가정에 위탁되어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저는 보통 아이들과는 많이 다른 아이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 댁 자녀 어느 아이도 자기주장을 고집 부려가며 내세우는 아이가 없었는데 유독 전 제 주장이 너무나도 강하고 막무가내라 여러 사람들에게 눈물과 상처를 줬습니다.
    그런 저의 단점들을 목사님 사모님께서는 강점으로 다듬어 주셨습니다. 언제나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고,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저를 위해 좋은 멘토들까지 붙여주시며 저를 위해 정성을 다해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 때는 어린 철부지였나 봅니다. 이런 사랑 속에서도 언제나 문제는 제가 일으켰습니다. 무뚝뚝하고 제멋대로인 말투와 이기적인 행동들로 인해 동생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습니다. 전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 어린 동생들에겐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갔었나 봅니다.
    그러나 이런 저를, 못남투성이인 저를 놓지 않으시고, 모난 네모를 둥글둥글한 동그라미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목사님과 사모님은 정말 많은 시간을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게 두세 달 정도의 시간을 거쳐 저의 마음을 안정시키신 다음엔 떨어진 성적을 다시 올리기 위해 선생님을 붙이는 등 또 다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첫 성적은 반에서 40명 중에 17등이었습니다.
    정말 바닥을 헤매던 제가 다시 그만큼 성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다 목사님과 사모님 덕분이었습니다. 언제나 제가 기죽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제 위치를 찾게 되고, 그렇게 서서히 몸과 마음에 평화가 다시 찾길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웃기도 많이 웃고, 울기도 많이 우는 전형적인 또래 남학생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난 지 4년째입니다. 중간 중간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제 뒤에 계시는 두 분으로 인해 잘 헤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위탁이 끝난 상태지만 저희 남매는 여전히 목사님 댁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저를 친아들처럼 귀여워 해 주시고, 지금도 여전히 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십니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그 전보다 시간의 여유는 많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많은 대화를 나눠주십니다.
    전 『방송국 PD』라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을 화제로 두 분께서는 언제나 많은 조언을 해주십니다. 이것저것 인간으로서 지켜나가야 할 도리 같은 것들을 지적해 주시고, 세상을 보는 눈과 따뜻하게 사람을 볼 수 있도록 늘 조언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제가 PD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 또한 두 분의 영향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밝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시기 위해 노력하시고,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시는 두 분의 영향으로 저도 방송이라는 매개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밝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고 싶고, 희망찬 삶을 꿈꿀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PD라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든지 등교 시간은 이르고 하교 시간은 늦을 것입니다. 저 또한 하교 시간이 중학교 때보다 훨씬 늦어졌고, 더군다나 전 학교 독서실이 조용하다는 이유로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있다 보니 자연적으로 집에 늦게 오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걱정해 주시는 두 분의 모습을 볼 때면 한 편으로는 죄송하지만 한 편으로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나도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고,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어, 그래서 행복해.’
    목사님 가정을 만나기 전에는 저는 이런 것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습니다. 이런 행복이 정상적인 가정의 또래 친구들에겐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제겐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걸 극복하려고 내색하지 않고, 강한 척 했지만 기다려 주는 사람 없는 어두컴컴한 집, 암흑 그 자체의 집으로 들어갈라치면 한없이 작아지고 비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전 행복합니다. 아주 행복합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부자라고 해서 꼭 행복하지는 않고, 가난뱅이라고 해서 꼭 불행하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족의 사랑과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작은 것에 만족과 감사가 있다면 아무리 백만장자라고 할지라도 부럽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선 전 무척이나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높은 성적이 아닌 중간 정도이지만 저에 대한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제가 들어가고 싶은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하여 당당하게 제 일을 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제 모습을 두 분께 꼭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아직까지 다듬어 나가야 할 부분들이 많지만 지금까지 잘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한 눈 팔지 않고 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저는 반드시 제가 꿈꿔왔던 일이 실현될 것을 믿습니다. 물론 두 분이 제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기에 반드시 꿈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너무 많은 것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받아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잘나지도 않은 제 자신이 어떻게 이 많은 사랑들을 받았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몸도 마음도 한 해 두 해 다르게 성장하는 제 모습을 볼 때면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함께 자라나는 마음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감사와 보답이라는 마음입니다.
    받은 것이 너무나도 많기에 또 한 번 감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 저이기에 보답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학생이라는 신분으로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것이 보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이 세상에 저로 인해 한 줄기 희망의 빛줄기가 비쳐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제가 받았으니 당연히 저 또한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제 마음 속 깊은 곳의 사랑까지도 그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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