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아시아 2003-07-07   3342

나노기술의 사회적 영향

오늘 제게 [하원] 과학위원회에서 증언할 기회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가 요구받은 쟁점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얘기해야 하는 주제는 ‘새로운 기술이 성공적으로 사회에 채택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영향을 미치는가, 세상을 바꿀 정도의 기술발전이 미칠 수도 있는 파괴적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는 연구개발단계에서 어떤 질문을 제기해야 하는가’입니다.

나노기술은 앞으로 수십여 년 동안 우리의 상식을 바꾸어놓을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새로 나타나고 있는(emerging) 기술입니다. 그러나 사회와 환경을 일신할 수 있는 변화를 야기하는 최초의 기술도 아니고, 그렇다고 최후의 기술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기술 변화와 관련된 과거의 일화들을 돌아보면 ‘이러한 변화에 무엇이 포함되어야 할 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개 단기적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누리게 되는 사람이 신기술을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이들이 가장 선구적으로 목청 높여 발언을 하는 게 보통이다. 이들은 새로운 제품 및 서비스의 개발, 효율성 향상, 기타 여러 종류의 성능개선 등 여러 실용적인 이득을 예언한다. 사실 이들이 사회를 보다 낫게 만들고, 우리가 더 부유하고 현명하고 민주적이고 공동체의 유대를 긴밀하게 만들 혁명이 임박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기술 옹호자들은 변화가 사람들이 의미있는 영향을 미치거나 방향을 유도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다(inevitable)’고 공언하는 교묘한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광고, 세계박람회, 여러 홍보활동 등에서 우리는 불가능성이라는 화두가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표준적인 주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면 기술이 어떻게 발전하고 최종적인 결과가 어떻게 될 지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은 뒤늦게, 그것도 급박하게 말하기 쉽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세계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 지에 대해 예측하고, 장점과 단점이 무엇이고, 어떠한 사회·경제·정치·환경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유권자들이 현재 새로 나타나고 있는 기술이 어디에서 어떻게 어느 정도로 적용될 것인지에 대한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기술변화의 사회·경제·환경적 영향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반기술주의자라면서 깍아내리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 살충제로 인해 유발된 환경파괴에 대한 책인 레이철 카슨의 {봄의 침묵 The Silent Spring}은 화학기업들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리고 카슨이 학자로서 자격이 있는 지 ― 카슨은 유명한 과학자였다 ― 에 대한 공격도 있었고 그녀의 평판을 깍아내리려는 악질적인 시도도 있었다 물론 지금 우리는 레이철 카슨을 우리 사회가 환경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카슨이 우리에게 환경에 퍼져나가는 독성물질의 영향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열변했을 당시, 그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는 진보의 적이라며 조롱받기도 했다.

이런 일화들을 통해 새로 출현하는 기술들에 대한 연구와 토론을 낱낱이 공개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가능하면 계획, 개발, 응용 단계 중 가능하면 빨리 해야 하는 필요성 등을 알 수 있다. 어떤 특정한 발전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이런 면에서 무력하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자신들의 생활양식에 심각한 변화를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된 사람들은 협상에서 정당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과학은 발견하고 산업은 응용하며 인간은 적응한다(Science Finds – Industry Applies – Man Conforms)’라는 193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의 모토처럼,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해서야 의견을 제시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기술변화에는 사전에 예정된 운명이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미래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손쓸 수 없게 되어버린 것도 아니다. ‘아쉽지만 너무 늦었네요. 당신이 참여할 필요는 없을 거에요. 감사합니다’라는 상황이 반복되더라도 현실적인 선택지들이 무엇이 있는 지를 확인하고 연구하며 집행해야 한다.

기술들의 선택지에 대한 공개적인 숙의(熟議)과정이 새로 출현하는 기술을 최종적으로 수용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 기술진흥론자들은 기술이 현실 세계에 부드럽게 진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82, 미국의 시인·철학자·평론가 ― 역주]의 ‘더 좋은 쥐덫을 만들면 세계는 당신의 집으로 쭉 뻗은 길을 만든다’라는 격언은 많은 기술주의자들이 아직도 선호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훨씬 어지럽고 복잡하게 얽혀있다. 어떤 기술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이를 수용하고 사용하는 데에 동의하는 사회적 동맹을 광범위하게 형성해야 한다. 이런 지원을 교묘하게 조정하려고 하는 대안적인 장치나 시스템이 있을 수 있다. 어떤 기술의 수용여부에 대한 테스트는 궁극적으로 충분한 사람들이 ‘그래, 새로운 도구가 괜찮네’라고 하는 지에 달려있다.

아쉽게도, 신기술 도입을 시도하는 이들은 합의, 동맹, 균형잡힌 선택지들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방법을 무력하게 만드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런 전략은 불행하게도 개발과정 말미에 갑작스럽게 출현해서 실패로 이끌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혁신을 지지하는 국가적·국제적 토대를 형성하는 게 아니라 불신이나 격렬한 저항을 만날 수도 있다.

미국에서 원자력 발전의 전개양상을 보면 이런 사실이 잘 드러난다. 유능하지만 외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정부, 기업, 군부 엘리트들은 지난 여러 해 동안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는 자신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며 계획을 수립해왔다. 그들은 ‘내 친구 원자(the friendly atom)’,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싼 전기’ 등의 달콤한 선전으로 민중을 현혹하면서 실질적인 발전비용, 설계관련 내부자들이 알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감추어왔다.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이런 문제들이 1970, 80년대에 표면으로 분출하자 원자력 발전 옹호자들이 바랬던 원자력 발전을 지지하는 사회적 동맹은 갑작스레 붕괴하고 말았다. 미국에서 원자력 발전소 추가 건설 계획들은 중단되었고 아마 앞으로 영원히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나노기술과 관련해서 보다 가까운 사례를 들자면, 지금 생명공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위기국면을 보면 기술에 대한 반발이 두드러지고 있다. 생명공학이 발전하는 동안 무시하거나 경멸해왔던 사회적 지원 동맹들이, 핵심적인 응용분야에서 붕괴하는 현실이 나타나고 있다. 유럽연합의 여러 국가들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유를 들어 미국으로부터 유전자조작식품(GMO) 수입을 거부하고 있으며, 이와 유사한 이유로 심각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잠비아도 유전자조작 옥수수의 원조를 거부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이 보여주는 바는 새로 출현하는 기술의 수용여부에 영향을 주는 사회·정치·문화적인 맥락에 대해 공개적이고 철저하며 정직하게 관심을 가지지 못하면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이 한참 진행되고 난 다음에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들을 비이성적이라거나 그들의 문화가 심각할 정도로 문제가 있다면서 기피하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건 거의 도움이 안된다. 위대한 미국인 철학자인 요기 베라(Yogi Berra)는 ‘사람들이 당신이 만든 더 좋은 쥐덫을 원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 하원의원 여러분들이 고려하고 있는 법안 ― 나노기술의 사회·윤리적 함의에 대한 연구를 지원하는 ― 이 이런 중요한 질문 모두가 활발하게 탐구되는 새로운 실천과 제도를 창조하는 데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지금 여기에서 나노기술사업에 대한 효과적인 사회적 동맹이 형성될 것인지를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연 나노기술이 무엇이고 함의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데에 발언하고 싶어하는 다양한 집단이나 이해관계들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면 더 위험한 상황이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현명한 정책이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된 폭넓은 토론이나 연구를 촉진해서 넓은 틀에서 기술의 함의에 대한 이해를 촉진해야 한다.

하원위원회가 내게 요구한 것은 ‘지금 또는 앞으로 우리가 나노기술을 활용하는 데, 우려할 만한 점은 무엇인가’이다.

에릭 드렉슬러(Eric Drexsler)1)의 {창조의 엔진 Engines of Creation}이 출판된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노기술에 대한 불안감들이 주목받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분자나노기술이 만들어낸 특수한 물질들이 환경에 파괴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예측하기도 한다. 그리고 분자나노기술이 특정한 조건에서는 인간의 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자기복제시스템과 관련된 발명들이 초기에 설정된 경계를 벗어나서 처참한 결과가 이어질 수도 있다는 악몽도 지속되고 있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최근 이런 말을 했다. ‘아주 작은 컴퓨터들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먼지보다도 작은 컴퓨터들이 이라크 등지를 구름처럼 날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어서 보낸다. 컴퓨터가 진화하고 컴퓨터 구름이 ― 기계의 내습(a mechanical plague) ― 인류를 위협하는 죽음의 무리가 된다.’

다른 사람들은 나노기술과 (지금부터 수십 년 후에) 포스트-인간 종(種)을 만들 수 있는 기타 ‘수렴적’ 기술을 채택하자는 야심적인 제안을 하기도 한다. 이런 구상이 ‘불가피하다’는 데에 아직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을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게 좋은 생각인지, 그리고 공적자금을 이런 잔혹한 연구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

이런 분야가 부상하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빈부간의 격차가 확대되어가고 소수의 손에 부와 권력이 집중되어가는 추세를 증폭시킬 거라는 우려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훌륭한 최신 기술이 부와 기회의 평등을 이룰 수 있다는 예측은 대체로 거짓으로 판명났다. ‘다음에 올 대단한 무엇’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이번에는” 경제·사회적 발전을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지는 못했다.

새로운 연구분야인 나노기술에 대한 여러 글에서 제시된 다양한 가능성들을 보고 나서 낙관적인 시나리오건 비관적인 시나리오건 간에 어떤 것이 가장 유력할 지에 대해서는 내가 그리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 지금 누가 여기에 대해 알고 있겠는가? 나는 카산드라(또는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2)같은 일을 하기보다는 우리가 나노기술연구에 대해 지원하기 전에 먼저 고려해야 하는 질문을 세 가지 정도 제시해보려고 한다.

(1) 우리는 자연의 구조와 과정과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계속해야만 하는가?

지난 200여년 동안, 자연을 지배하려는 열망은 진보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강을 막아 댐을 건설하고 습지와 숲을 토지로 만들고 모든 동식물들을 우리 인간이 통제하려고 했다 ― 이런 모든 계획은 아주 훌륭하고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이런 거대한 노력의 불행한 결과가 드러나면서 여러 과학자, 공학자, 설계전문가, 기업가들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게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욱 유망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인식은 자연을 원자나 분자 수준까지 정복하려는 전망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나노기술 광신도들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이들은 조물주의 창조보다 한발짝 더 나가려고 하고 있다. 미국의 [MIT, 하버드 등이 있는] 캠브리지, 팔로알토, 노스캐롤라이나의 리서치트라이앵글 등 첨단기술기업들이 모여있는 곳의 새로운 세대의 “조물주”들은 지금과 다른 인식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맥도날드의 해피밀 세트, 레저용 승용차, 200달러짜리 나이키 운동화, 주름을 없애는 보톡스 시술 등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미국 중산계층 특유의 가치는 물질 세계의 아주 미세한 틈새에서도 해석될 수 있다. 아마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난폭한 힘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려는 전략이 계속 실패하고 있다는 게 명백한 지금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물고기를 추적하고 잡는 기법이 개량되어 크고 기술적으로 매우 정교한 고깃배를 만들게 되면서 어획고가 급증하게 되었다. 어려운 싸움이었고 끝날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우리는 결국 대서양의 대구들을 정복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불쌍한 피조물[대구]은 아직 백기를 들지는 않았다. 대구는 그물로부터 사라져서 이제 더이상 우리를 위한 건강한 단백질 공급원이 아니다.

나는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그리고 이것이 반영하는 권력과 부에 대한 열망을 이해한다. 이런 경향은 근대적 삶이 갖고 있는 음울하지만 되풀이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는 ‘미국의 납세자들이 자연의 영역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공격에 대해 재정지원을 해야 하는가’ ‘이런 데에서 제안되는 프로젝트들을 안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제국주의적인 지배를 강요하기보다는 자연과 긴밀하게 협력하기 위한 다양한 과학기술적 전략을 찾을 수 있다. ‘자연적 자본주의’ ‘녹색설계” ‘자연따라하기(biomimicry)’ ‘지속가능한 경제’ 등을 강조하는 프로그램들은 새로운 산업혁명을 강조하고 있지만 나노기술의 옹호자들이 말하는 혁명은 이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나노기술로의 돌진은 사회적으로 조화로우면서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노력과 충돌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전망은 완전히 가설적인 것이기는 하다.

(2) 우리는 기술적 수단이 사회적 목표를 형성하는 추진력인 발전경로를 적극적으로 장려해야만 하는가?

나노기술의 개발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강력한 기술이 실험실에서 나와서 사용처를 모색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런 패턴은 인간적 목표와 기술적 수단 사이의 적절한 관계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무시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절차에 따르면 ‘우리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어떤 근본적인 목표가 우리의 탐구를 정의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초적인 사회적 목표가 명확해지고 비교되고 논쟁되고 평가된 다음에야 새로 개발된 기술적 장치를 포함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여러 수단들 중에서 선택을 내리는 단계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나노기술이나 여러 분야에서 수렴하는 기술에 관심있는 과학자나 정책결정자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앞서 말한 상식적인 목표와 수단에 대한 사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노기술에 대한 글에서 ‘현재 사회의 기본적인 필요는 무엇인가’ ‘어떤 기본적인 목표가 행복(well-being)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정의하는가’라는 질문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곤 낙관적인 수단-목표의 논리다. 분자나 원자수준의 공학에 관심있는 연구자들이나 연구기관들은 정부자금이나 민간투자를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가능성이 있을 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

지금 나노기술연구의 선두에 있는 이들은 특정 세포에 작용하도록 약을 투여하는 기술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국방예산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나노기술로 군대를 위한 새로운 무기나 장비개발에 응용될 수 있다는 전망을 하는 나노광들도 있다. 사실, 국방부문에는 언제나 풍부한 자금이 있었다. 나노기술이 수지맞는 장사라는 사실을 알아챈 어떤 사람들은 나노기술의 용용범위가 확대되면 장애인들이나 노인들을 위한 연구를 할 수도 있다고 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내부적인 연구우선순위에 즉각적으로 대응해서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대상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항상 무언가를 찾고 있다.

나는 의회가 매우 중요한 새로운 영역의 과학기술연구의 사회적·윤리적 차원에 대한 연구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데에 대해 환영한다. 그러나 지금 일이 진행되는 방식이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의 기술발전을 형성해왔던 후진적인 논리를 재생산하는 게 아닌가라는 점이 두렵다. 겉만 번지르르한 신제품을 잔뜩 만들어내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우리 시대의 인간조건과 관련된 가장 긴급한 현실을 점검하려는 노력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 비가역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술적 응용으로 실험하는 것은 현명한 일인가?

일반적으로 우수한 기술은 활용하더라고 되돌릴 수 있는 가역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나노기술의 결과에 대한 일반적인 예측은 환경이나 나노시스템들과 상호작용하는 종(種)으로부터 도로 회수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제는 관심의 폭을 넓혀 ‘특정한 연구개발 경로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위험을 갖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현재 정책이 이런 위협을 없애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하원위원회가 내게 부탁한 마지막 질문인 ‘나노기술에 대한 사회적·윤리적 우려에 대한 연구를 연구개발과정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는 구체적인 법률의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점점 더 많은 과학자, 학자, 대학행정가, 사회운동가들이 이 주제에 대해 민감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분명히 지금 나노기술의 사회적·윤리적 차원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해야할 필요가 있다. 제안된 해결책을 제약하거나, 제기된 질문을 왜곡할 수 있는 재정적 또는 제도적 이해관계가 없는 개인들에 의해 폭넓고, 상세하며, 지적으로 치밀한 연구가 수행되어야 한다.

그동안 이런 종류의 연구는 대학의 분과학문체계를 넘어서 핵심 쟁점과 정책대안을 살펴보는 방식을 비롯해서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내가 새로운 전문직을 만들어내는 것을 후원하는 일종의 “나노윤리학자완전고용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분야의 새로운 학술연구도 물론 가치있는 작업이지만 새로 출현하는 기술의 윤리적 차원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집중적인 갈등이 될 수도 있는 쟁점을 피해면서 사소한 질문에서조차 부드럽게 처리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전문분야가 되어 있는 생명윤리 ― 나노윤리의 사례가 될 수 있다 ― 는 매우 매력적인 여러 주제를 말하고 있지만 이 분야 전문가들은 좀처럼 ‘아니다’라고 말하는 적은 없다.

실제로 경력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사회과학자나 인문학자들이 과학 및 공학분야의 연구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또는 이들이 듣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하는 얘기)만 하는 등 너무 신중해지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격변이 난해하고, 매우 학구적인 합리화로 이해되는 여러 사례들에서 이런 사실이 드러난다. 지금 얼마나 많은 ‘지적재산권’ 이론가들이 핀머리에서 춤추고 있는가[좁은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사소한 도덕적·정치적인 영역 내부에서만 부유(浮游)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는 사회과학자나 철학자들이 기업, 연구소, 환경단체, 종교계, 기타 집단의 사람들이 함께 토론하는 포럼에서 자신들의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는 것도 좋다. 이제는 여러 가능성들을 평가하고 위험을 관리하고 보다 좋은 방향으로 기술을 유도할 수 있는 소수의 이해당사자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해야하는 시대가 되었다.

관심분야가 협소한 기술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기술정책의 사례로는 미국의료체제를 보면 된다. 몇십년 동안 연구개발활동을 통해 건강관리비용을 눈튀어나올 정도로 상승시킨 기기묘묘한 첨단 치료방법을 만들어왔다. 세계건강기구(WHO)에 따르면 이를 통해 미국은 국민들에게 세계 24위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정부가 지원한 연구개발사업을 보면 궁극적인 이해당사자라 할 수 있는 일반 대중들의 참여를 배제해왔던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 사업에 대한 계획은 시민들의 세금으로 집행되며 최종적인 결과가 좋건 나쁘건, 그것을 경험하게 되는 건 결국 시민들, 그들의 자녀, 손주들이다. 그렇다면 나노기술의 최종 산물이 시장에 나오고 나서가 아니라 초기 단계에서부터 숙의과정에 시민을 포함시키는 것은 왜 안되는가?

이런 견지에서 나는 하원에서 우리가 배심원을 뽑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심없는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소규모 패널을 구성해서 나노기술과 관련된 주요 사회적 문제에 대해 검토하기 위한 방식을 창의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구성된 패널은 관련 문헌을 검토하고 연구를 수행하는 사람으로부터 전문가 증언도 청취하고 기술적 응용가능성과 영향에 대한 논쟁들을 여러 측면에서 들어보고 결과에 대해 논의해서 정책자문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다.

각종의 뉴스매체들이 시민패널을 흥미있게 다룰 가능성도 있다. 이 영역에서 제기되고 있는 여러 쟁점들이나 논쟁들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가 형성되는 과정에 평범한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쟁점, 문제, 가능한 대안들을 보다 정교하게 만드는 데에 매우 값진 기여를 할 수도 있다.

우선, 우리들은 시민패널이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그러나 서로 관련된 질문에 대해 대답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① 현재 제안된 나노기술의 군사적 응용은 우리를 더 안전하게 해줄 것인가? ② 지금 예상되는 나노기술의 산업적 응용은 고용을 확대할 것인가, 실업을 확대할 것인가?

국립과학재단에는 내가 지금 말한 것 같은 실험적 시민패널 사업에 지원하는 공학 및 과학기술의 사회적 차원이라는 연구프로그램이 지금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나는 의회가 나노기술의 사회적·윤리적 차원에 대한 대중적 논쟁이 보다 충분한 정보에 기반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의 하나로 시민패널의 위치를 설정하고(입법과정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유용한 실험을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최근 우리는 새로 부상하고 있는 여러 기술분야에서의 혁신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 자주 듣고 있다. 내가 제안한 방법은 의회가 이해당사자 시민들이 신기술을 평가하고 연구하는 데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을 만들어가는, 진정으로 혁신적인 사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저의 생각과 제안을 고려해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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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랭던 위너가 올해 4월 9일, 미국 하원에서 나노기술의 사회적 함의에 대해 발표한 원고다.

** 랜슬레어공대(Rensslear Polytechnic Institute)의 과학기술학과 교수. 주요 저서로는 {자율적 기술과 정치철학 Autonomous Technology} (국역 : 아카넷), {고래와 원자로 The Whales and Reactor} 등이 있다.

1) [역주] 드렉슬러는 1980년대 중반 파인만이 언급했던 원자수준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비전을 설명하기 위해 ‘나노기술’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1981년에는 <미국과학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Sciences) 프로시딩에 분자수준의 제조기법에 대한 기본개념을 다루는 학술논문을 발표했고 1986년에는 {창조의 엔진}을 통해 나노기술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환기시켰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강의를 했고, 상하원에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나노기술에 대해 발표하기도 했다. 드렉슬러는 비영리교육기관인 포사이트연구소(Foresight Institute)를 설립하여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2) [역주] 노먼 빈센트 필 (Norman Vincent Peale)은 저명한 저술가이자 “만인의 성직자”로 불리는 동기부여 연설가다. 뉴욕 마블 협동 교회에서 일한 52년을 포함해서 60년간 목사로서 사역하면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방법을 제시해왔다. 또한 종교치료 클리닉 Institutes for Religion and Health를 설립했으며, 잡지 ≪가이드포스트≫를 창간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적극적 사고방식 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이 있으며 국내에도 10여권의 책이 번역되어 있다. ― 인터넷 서점 ‘알라딘’

랭던 위너 , 김병윤 | 시민과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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