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아시아 2003-07-07   1286

네덜란드 과학상점의 마지막 여정

위트레히트에서 엔쉐데, 다시 암스텔담으로

위트레히트를 떠나는 날 아침에도 비가 내렸다. 짐을 갖고 이동해야 하는 지라 비가 내리면 다니기가 상당히 번거로웠다. 다른 한 손에는 여행용 가방을, 그리고 어깨에는 조그만 가방을 하나 더 갖고 다녀야 하는 터라 우산까지 받쳐들면 상당히 불편했기 때문이다. 기우뚱거리면서 길을 나서서 버스를 타고 위트레히트 역으로 향했다.

우리가 가야하는 트웬테대학(University of Twente)에 가려면 엔쉐데(Enchede)까지 가야하는데, 위트레히트에서 2시간. 이틀 전 그로닝겐에서 위트레히트로 온 만큼을 다시 동쪽으로 가야 한다. 가는 도중 계속 비가 오락가락 했는데, 마침 도착했을 때는 날이 갰다. 우리를 역까지 마중나온 사람은 과학상점의 코디네이터인 슐러터였다. 슐러터는 30대 중반이 조금 넘어보였고 그 동안 만나왔던 자유대학, 그로닝겐, 위트레히트 대학의 코디네이터들과는 다소 공식적인 느낌이 들었다. “재킷”을 입은 “남자”였기 때문일까?

이런 느낌이 계속 되었다. 우리는 슐러터의 차를 타고 15분 정도 걸려서 트웬테 대학 캠퍼스에 도착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트웬테 대학은 네덜란드에서 유일하게 캠퍼스라는 개념을 유지하고 있는 대학교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다녀본 다른 대학들은 도시 안에 대학건물들이 흩어져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잠시 대학본부에 있는 과학상점에 들러 짐을 내려놓은 다음, 국제학생담당인 어떤 여자분[명함을 잃어버렸습니다]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갔다.

아까까지는 맑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더니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러 간 곳은 우리가 있던 곳에서 제법 떨어진 대학 내의 레스토랑이었는데, 제법 고급이었다. 빵도 괜찮았고 스테이크도 제법 맛있었다. 아마 네덜란드에서 먹었던 곳 중에서 가장 낫지 않았나 싶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캠퍼스를 전체적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공대가 유명한 트웬테 대학에는 에릭슨 등의 기업들의 연구소가 캠퍼스 안에 있다는 게 이색적이었다. 캠퍼스 안에 기업이 들어와 있는 경우가 미국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다고 하던데, 실제로 보니 흔한 비판처럼 ‘자본의 대학침투’라는 느낌이 생각보다는 강하게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대학과 기업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설핏 지나쳤다.

다시 과학상점이 있는 대학본부 건물로 돌아왔다. 트웬테 과학상점은 집중형으로 대학본부의 학생과 밑에 소속되어 있다. 연구활동이라기 보다는 학생들의 활동의 하나라는 측면을 과학상점에서 더욱 중요하게 고려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우리가 처음 방문했던 자유대학의 과학상점도 집중형이었지만 기술이전센터(transfer point) 등과 같은 소속(Dept. of Communication)에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우리는 먼저 학생과장 정도 되는 사람과 면담을 하면서 학생과가 어떤 일을 하는 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나라의 여느 대학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학생들의 활동에 대해 지원해주고 기숙사, 학생회관, 각종 복지시설들에 대한 지원·관리 등 학생들의 생활 전반을 다루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식사를 같이 했던 분으로부터 트웬테 대학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과 아울러 일종의 학생 유치를 위한 설명을 들었다. 아마도 학생과 내부에 과학상점이 있기에 아마도 우리나라에 트웬테 대학을 알려달라는 차원에서 “업무상”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제는 과학상점 차례였다. 트웬테 대학의 과학상점도 일반적인 활동에서는 다른 학교의 과학상점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외부로부터 의뢰를 받고 학생들에게 홍보하여 적당한 학생 연구자를 찾고 ― 선착순으로! ―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트웬테 대학은 공업지역의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는 입지조건 때문에 비영리기구 뿐만 아니라 소기업과도 상당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2001년 경우 소기업 및 개인으로부터의 의뢰가 60%였으며 비영리기구와 사회운동단체는 22%와 8%로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다.

다른 과학상점과 마찬가지로 트웬테 과학상점도 독자적인 매체를 발간해서 지역사회에 존재를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주요 성과들을 소개하면서 과학상점의 유용성에 대해 알리는 작업은 의미는 있는 것 같았지만, 비용 면에서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파급력을 생각한다면 지역언론의 지면을 활용하는 게 더욱 바람직한 방법일 것 같았다. 우리가 찾은 다른 과학상점도 비슷했지만 트웬테 대학의 경우에는 재정적으로 풍부하지는 못했다. 코디네이터인 슐러터도 전일제 근무가 아니라 일주일에 4일만 일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재정적인 이유도 있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과학상점으로는 마지막 방문이라서 그런지 이제 특별하게 물어볼 것도 없고 다 비슷비슷한 것 같아 조금 맥빠지기도 했다. 이제 다시 암스텔담으로 돌아가야 한다. 암스텔담으로 돌아가서 다시 하루 밤을 자고 마지막으로 과학학 연구자면서 초기 과학상점 활동을 하고 관련 논문도 썼던 뢰트 레이데스도르프(Loet eydesdorff)와의 인터뷰만 마치면 1주일 동안의 네덜란드 과학상점 출장도 모두 마치게 된다. 엔쉐데에서 암스텔담은 다시 2시간 거리다. 이영희 선생님과 나는 역시 맥주와 함께 기차간에서 흔들거리면서 암스텔담으로 돌아왔다.

금요일 아침, 오늘은 한가한 날이다. 레이데스도르프와의 면담이 오후이기 때문에 오전에는 여유가 있어서 먼저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 들러봤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실제 안네 프랑크가 살던 집을 복원한 것이었는 데, 그리 크지 않아 보기에 적당했으며 적절한 사진자료와 음성자료, 인터뷰 등을 통해 전체를 보고 나오면 안네 프랑크의 삶과 암스텔담에서의 안네 프랑크의 생활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자연스레 나찌에 대한 증오감이 생기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전시가 성공적이었는 지의 지표라 할 수 있는 기념품 매장은 나와 비슷하게 감동을 받은 사람들로 줄을 이었다. 여러 기념품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이버 안네 프랑크 하우스였는데, 시디롬을 실행시키면 사용자의 조작에 따라 내가 방금 본 안네 프랑크 하우스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전시된 사진, 음성, 인터뷰 등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다.

약속시간이 되어 암스텔담 대학으로 갔다. 암스텔담 대학은 구시가 중심부 곳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레이데스도르프가 있는 곳은 그 중 본관 정도 되는 건물 같았다. 저명한 교수임에 비해 연구실은 생각보다 작았고 책도 얼마 없었다. 그는 독특한 목소리와 웃음소리로 나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사전에 그가 1980년대에 쓴 과학상점 관련 논문에서는 노동조합의 역할 등 사회운동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으나 이번에 만나본 바에 따르면 과학상점에 대해서 그리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고 있으며 이제는 다른 영역 ― 정부-대학-기업의 “3중 나선” 관계 ―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구에서도 8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지식인들이 생각이 변화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이렇게 네덜란드 네 대학의 과학상점을 방문하면서 과학상점에 대해 지식의 측면에서는 그리 많이 확장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이미 과학상점에 대한 과학기술학적 연구도 상당히 수행되었으며 여러 컨퍼런스를 통해서 과학상점의 운영원리 등에 대해서도 사전에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인터뷰를 통해 새롭게 확인한 사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안정된 제도적 지위를 확보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그리고 코디네이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 등이었다. 전자가 주로 초기에 제기되는 문제라면 후자는 과학상점의 운영과정 내내 지속될 문제일 것이다. 학내에서 여러 주체들과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의뢰인과의 적절한 조정작업을 하는 일 등은 또다른 능력이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전지역에서 과학상점을 준비하는 그룹(http://www.scienceshop.or.kr)은 전북대학교 과학상점(http://sci-shop.chonbuk.ac.kr)보다 다양한 측면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모임 회원 여러분들도 대전과학상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길 바란다. (연재 끝)

김병윤 | 시민과학 편집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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