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나가고 있다. 91년 걸프전이 임박했을 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정치경제적 모든 판단을 동원해도 절대 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상식에 비추어 그런 전쟁은 도저히 발발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상식은 보기좋게 무너졌다. 그리고 12년 후 우리는 비교적 다양한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반전과 파병반대를 외쳤지만, 다른 한편 역시 많은 사람들은 북핵과 미국과의 동맹관계라는 엄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눈앞에 죽어가는 이라크 어린이들이 밟혔지만, ‘야속은 잠깐이고, 실속은 영원하다’는 우리의 오랜 격언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그동안 우리의 시선을 지배하던 CNN의 독주가 저지되고, 아랍 방송들의 카메라를 통해 전쟁을 보는 새로운 경험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잠깐 새로운 화면에 흥미를 보였을뿐 더 이상 생각하려들지 않았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반전의 기수를 자처하던 프랑스와 러시아, 독일이 꼬리를 내린채 전리품 협상테이블로 기어들고,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 유산이 배고픈 이라크 민중들의 광란적인 약탈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시니컬해지고, 과연 이라크에 군정과 친미정권 수립이 원활하게 이루어질지에 관심이 쏠렸다. 어떤 친구는 50년전 우리가 거쳤던 역사적 과정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듯하다는 자조어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전쟁이 조기종결되고 전후 이라크 복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자 많은 사람들은 그나마 파병을 결정해서 파이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쓴다. 과연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어떤 사회적 학습을 한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상식은?
한가지, 다행스럽게도 전쟁의 와중에 프레시안에서는 과학기술자들의 반전선언을 촉구하는 기사를 둘러싸고 맹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4월 1일에 25인의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전국의 과학기술인 일동” 명의로 ‘과학기술인반전평화선언’이 채택되어 340명에 달하는 과학기술인들이 서명했다.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얻은 소중한 결실일 것이다.
이번호부터 서지학자로 유명한 김명진씨가 ‘과학기술 영화 DVD 파일’을 새로 연재한다. 서론이 거창한 걸로 보아 앞으로 실한 글들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이번호에는 버지니아텍에서 STS를 공부하고 있는 박소연씨가 ‘젠더와 기술’ 컨퍼런스(‘미 남동부 여성학회’ 주최)를 취재한 생생한 글이 관심을 끈다. 앞으로 미국특파원으로서 박씨의 활약을 기대한다. 이 회의에서 하정옥씨가 ‘출산기술: 한국에서의 시험관 수정’을 발표했다는 소식은 더욱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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