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아시아 2003-09-23   1368

핵폐기장 부지 선정, 이대로 좋은가?

김명진_편집위원

산업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추진하고 있는 핵폐기장 부지선정 사업이 지난 7월 14일에 전북 부안군 위도가 단독으로 “자율적” 유치신청을 함으로써 다시한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올 2월에 산자부와 한수원이 핵폐기장 후보지로 영덕, 울진, 영광, 고창 등 4곳을 선정·발표한 것을 계기로 본격화된 이번 논란은 해당 지역에서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4월 이후 부안, 삼척, 군산이 유치신청 의사를 밝히면서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는데, 유치신청 마감을 하루 앞둔 상태에서 부안군수가 독단적인 유치신청을 낸 것이다. 산자부측의 계획에 따르면 일주일간의 지질·해양환경 조사 후 최종부지를 선정, 발표하고, 이후 8개월에 걸쳐 4계절 환경영향평가와 정밀 지질조사를 실시한 후 내년 봄부터 공사에 착수한다고 한다.

변화한 상황에 대한 반응은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 7월 18일에 고건 총리 주재로 열린 관계장관 회의에서는 ‘참여정부 출범 첫해에 지난 4대정권 17년간 표류하던 장기 미해결 국책사업을 지자체의 자발적 유치신청으로 해결’하게 되었다며 ‘부안군민의 용기있는 결단을 치하’하는 한편으로, ‘유치신청에 따라 반대 시위 등이 벌어지고 있는 부안군의 치안유지 대책’에 관해서는 ‘합법적인 의사표시는 최대한 보장하되, 폭력, 업무방해 등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핵폐기장 부지선정을 기정사실화하고 나섰다. 반면 핵폐기장백지화 부안군민대책위와 반핵국민행동 등 환경단체들은 군민의 뜻이 반영되지 않은 핵폐기장 유치신청의 철회를 요구하면서 강력한 반대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을 천명하였으며, 의·약·한의사회와 군청 공무원직장협의회도 신청 철회를 요구하는 등 반대가 확산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환경단체들에 의해 양성자가속기의 재처리시설 연계추진 의혹이나 유치신청 절차와 관련된 각종의 외압 의혹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현재 진행중인 이러한 상황들을 보면서 받는 느낌은, 이번 핵폐기장 부지선정 과정 역시 2조원으로 늘어난 지원·투자액수와 양성자가속기 사업 연계라는 “당근”이 보태어지고 이를 미끼로 한 “자율” 신청이라는 외피가 더해졌을 뿐, 그 본질은 1990년의 안면도나 1995년의 굴업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 부지선정 과정은 산자부와 한수원이 이전의 경험들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외국의 정책기구들이 핵폐기물 처리에서 실패를 겪은 후 최근 발간한 보고서들에서 내놓은 부지선정 과정의 원칙들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여전히 “기본”이 안되어 있다는 얘기다.

일례로 2001년 4월에 미국 국가연구위원회(NRC) 산하의 방사성폐기물관리위원회(BRWM)가 발간한 정책보고서*는 우리나라의 정책결정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여러 제언들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는 핵폐기장 부지선정 문제에 있어 크게 두 가지 축에 기반해 접근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데, 하나는 일반대중과 모든 것을 완전히 터놓고 논의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의 과학자들에 의한 동료심사를 활용하라는 것이다. 전자에는 일반대중, 특히 부지선정 예상지역의 주민들에게 핵폐기장에 관해 충분하고 균형잡힌 정보를 제공하고, 해당 기관의 의사결정 구조를 독립적이고 투명하게 하며, 정책결정 과정에 일반시민의 자문과 직접참여를 보장하는 것이 포함된다. 특히 핵폐기장에 대한 일반대중의 거부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가능한 선택지들을 반드시 복수로 제공한 상태에서 논의를 진행해야 하며, 이미 결정된 내용이라도 나중에 다시 되돌릴 수 있도록 정책과정을 단계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도 빼놓지 않고 있다. 그리고 후자에는 핵관련 기구의 자체인력이 만들어낸 미발표 연구보고서에만 의존하지 말고 동료심사를 거쳐 학술지에 이를 발표하려 노력하며, 연구에 참여하지 않았던 외부의 독립 과학자들에 의해 검증받는 과정을 거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와 관련해 2002년 5월에 영국 왕립학회가 내놓은 짧은 보고서**의 제언도 주목할 만한데, 이 보고서 역시 독립적이고 보다 투명한 기구가 핵폐기물 관리를 담당해야 함을 지적하면서, 특히 핵폐기물 문제에 대한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신규 핵발전소 건설 결정을 유보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우리나라의 부지선정 과정이 과연 한 가지라도 여기에 부합하는 내용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충분하고 균형잡힌 정보”의 측면만 예로 들더라도 한수원과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유치 홍보활동은 거의 낙제점에 가깝다. 이들이 만든 홍보자료는 현재 부지선정 과정에 있는 핵폐기장이 마치 중·저준위 폐기물만을 저장하기 위한 것인 양 오도할 우려가 매우 높으며, 외국에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선전되는 핵폐기장들이 중·저준위와 고준위 폐기물 중 어느 것을 보관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밝히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는 핵연료 재처리를 고려하고 있지 않으므로 사용후 핵연료(spent nuclear fuel, SNF)는 응당 고준위 폐기물에 포함되어야 하는데도, 우리나라에는 고준위 폐기물이 없다는 식의 말장난도 서슴지 않는다. 2016년부터 해당 핵폐기장에 SNF의 “중간”저장을 예정하고 있고 이를 위해서는 잦은 육로·해로 수송이 불가피함을 감안한다면, SNF를 (발전소 부지가 아닌) 별도의 장소에 모아 관리하는 국가에는 어디어디가 있고 그곳에서는 SNF의 수송을 어떤 방식으로 하며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를 소상하게 알려주어 지역주민들의 판단에 참고하도록 해야 마땅할 텐데, 이런 얘기는 일언반구도 찾아볼 수 없다 (예컨대 독일에서는 1985년 이후 SNF를 프랑스에서 재처리하지 않고 직접 처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네 개의 건식 중간저장 시설을 별도로 운영해 왔는데 운송차량의 표면 오염 문제가 대두되면서 1998년부터 3년 이상 SNF의 수송이 중단되었던 적이 있다). 또한 핵폐기물을 장기적으로 보관할 때 어떤 변화가 생길지에 관한 연구에서 외국의 정책보고서들이 하나같이 과학기술의 불확실성과 현존 지식의 한계, 추가 연구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데 반해, 우리나라의 홍보자료들에는 “전혀 위험하지 않고 100% 안전”하다는 식의 호언장담만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단순한 “정보 제공”의 측면이 이럴진대, 의사결정 구조의 독립성·투명성 확보나 일반시민의 정책참여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는 길게 말할 것도 없을 터이다.

NRC 보고서에서 지적한 두 번째 사항, 즉 동료심사의 강화와 외부 독립 전문가의 활용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요원한 얘기다. 이번 부지선정 과정을 보면, 산자부와 한수원은 애초에 선정된 4개 지역이 ‘전국 임해지역 244개 읍면단위의 입지 가능 지역들’을 대상으로 ‘철저한 자료조사와 분석, 현장답사와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의 자문 등 5단계 심사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용역연구의 결과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후 공개된 연구보고서는 환경단체로부터 “과거의 자료들을 재탕한 허점투성이 보고서”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자문에 응했다는 “각계 전문가”의 명단조차 싣지 않아 신뢰성을 크게 상실했다. 그나마도 그 4개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던 전북 부안이 갑작스럽게 최종 후보지로 떠올라 선정될 형편이니, 결국 그 모든 과정이 졸속이었음을 대놓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책결정에서의 “기본”이 지켜지는 핵폐기장 부지선정을 기대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일까? 설사 산자부와 한수원이 지금 예정된 핵폐기장 부지를 계속 밀어붙여 위도에 중·저준위 폐기물 저장과 SNF의 “중간”저장을 맡을 “원전수거물센터”를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필자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보지만), 이것은 결코 끝이 아니다. 서구 여러 나라들의 경우처럼, 우리나라 역시 종국에는 SNF의 영구처분을 위한 부지를 다시한번 선정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SNF 자체를 다른 나라로 수출하지 않는 한 영영 변함이 없을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이며 투명하지 않은 의사결정과정에 의해 핵폐기장이 이미 한번 선정되었다는 점은 산자부와 한수원에 앞으로 더욱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며, 현재와 같은 핵발전 확대 기조를 계속 유지한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 파국을 피하는 방법은, 앞으로 얼마간의 시간이 들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앞서의 제언들을 따라 핵폐기장 부지선정 방법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면서, 핵발전 그 자체의 지속 여부에 대해서도 논의가능성을 열어놓은 채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장기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일 수밖에 없다. 앞서의 NRC 보고서는 ‘현재 핵폐기물 처리 문제에서 가장 큰 도전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라며, ‘과거에는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문제를 너무나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상실되었다’고 뼈아픈 자기반성을 내놓고 있다. 이와 관련해, 1997년 핵폐기장 부지선정 과정에서 대중의 불신으로 인해 지하 연구소의 부지신청조차 거부되는 엄청난 실패를 경험한 후 작년에 새로 공공기구에 이 업무를 맡기고 원점에서부터 다시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영국의 사례는 커다란 시사점을 준다. 왜 지금에라도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가. 핵발전은 미래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고 2008-2016년이면 현재의 저장시설이 포화되니 핵폐기장 건설이 시급하다는 식의 해묵은 “협박”은 원전 찬성론자들에게도 하등의 득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위협과 “당근”을 결합하면 당장 눈앞의 문제는 해결한 듯 보일지 모르겠지만, 불과 얼마 안가 이는 더 큰 반발과 두려움을 불러오게 될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 Disposition of High-Level Waste and Spent Nuclear Fuel: The Continuing Societal and Technical Challenges – http://www.nap.edu/catalog/10119.html에서 볼 수 있다.

** Developing UK policy for the management of radioactive waste – http://www.royalsoc.ac.uk/files/statfiles/document-173.pdf에서 볼 수 있다.

상이한 위험 인식의 첨예한 대립

― 핵폐기장 부지 선정, 이대로 좋은가? (2)

부안 핵폐기장 부지선정 과정에 관해 필자가 지난달에 썼던 칼럼은 필자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탓(?)에 필자는 생각지도 않게 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과 짧은 전화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인터뷰는 칼럼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고 핵폐기장 부지선정 과정의 문제점을 짚어 보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마지막으로 프로그램 진행자가 ‘앞으로 해결점을 찾자면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필자는 활성단층이니 지하수니 하며 논의가 점차 테크니컬한 쪽으로 흐르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서,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단계가 아니며 처음으로 돌아가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를 복원해야 할 시기라는 요지의 답변을 하려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진행자가 필자의 말허리를 자르면서 이렇게 물어왔다. ‘잠깐만요, 그런 논의들을 통해 정부가 핵폐기장이 실제로는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주민들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미처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고 시간도 별로 없었기에 필자는 원론적인 수준에서만 답변했다. 이는 민주적 절차가 생략된 상태에서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의 발상으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전화를 끊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좀더 정곡을 찌르는 답변을 하지 못한 것이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사실 진행자가 던진 그 질문이야말로 정부-산업계와 지역주민-환경단체간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고 있는 현재의 갈등 상황이 빚어진 이유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실마리였다. 그 실마리를 풀어가다 보면 “핵폐기장의 안전성”에 관해 양측이 서로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이것이 갈등의 한 축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얘기를 이렇게 시작해 보자. 대체 “안전”하다는 게 뭘 말하는가? “안전”이란 곧 “위험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핵폐기장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위험”이라는 실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아주 거창한 문제를 포함하는 질문인데, 여기서 이제 답변은 둘로 나뉜다. 먼저 정부(산자부)나 원전 산업계의 입장은 주로 (핵)공학자들의 견해를 반영한 것인데, 그들은 위험이 어떤 정량적인 수치로 환산될 수 있으며 그 수치의 높고 낮음이 곧 위험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나타내 준다고 생각한다. 이 정량적 수치는 많은 경우 확률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러면 이 확률값은 어떻게 구할까? 교통사고처럼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지난 시기의 통계를 통해 앞으로의 사고가 일어날 확률을 대략 예측해볼 수 있지만, 핵발전이나 핵폐기물 처분처럼 사고가 드물게 일어나지만 결과는 치명적인(low probability/high consequence) 경우에는 그런 방법을 쓸 수 없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해당 시스템을 분석해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체계적으로 따져보는 사고결과예상계통도(fault tree)를 그려 확률값을 구한다. 핵공학자들의 관점에서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바로 이 값이 매우 낮다는 의미다(핵폐기물 유출로 인해 죽을 가능성은 번개나 별똥별에 맞아죽을 가능성보다 낮다느니 하는 홍보도 이런 값들의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와 원전 산업계가 생각하는 지역주민들에 대한 “대화”와 “설득”이란 결국 지역주민들이 위험의 수준에 관한 “오해”를 접고 이 값(과 거기 내포된 전문가의 판단)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된다.

반면 지역주민들 ― 핵공학 전문가를 제외한 대다수의 일반인들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 이 가진 위험에 대한 인식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위험을 정량적으로 나타낸 수치(혹은 그에 근거한 안전성 “보장”)는 단지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가질 뿐이다. 지역주민들에게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은 위험 관리를 담당한 기관이나 제도(이 경우에는 산자부나 한수원)가 얼마만큼 믿을 만한 존재인가 하는 신뢰성 여부이며, 바로 이러한 신뢰의 정도가 곧 위험의 수준을 판단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이해를 위해 한 가지 쉬운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TV에 나와 건강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의사나 대학교수의 얘기를 비교적 쉽게 믿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건강 전문가들이 “옳은” 얘기를 한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별다른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보고 이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원에서 의료사고를 경험했거나 의사의 말을 믿고 따랐다가 오히려 병을 키운 적이 있는 사람의 경우라면 TV에 나오는 건강 전문가들의 말도 믿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본다면, 원전 산업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 그리고 이번 핵폐기장 부지선정 과정에서도 예외없이 나타난 ― 비밀주의, 정보의 왜곡 및 은폐, 비민주적 절차, 여론조작, 금품을 통한 회유 등이 이번 부지선정 과정에서 해당 기관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신뢰를 급격히 떨어뜨린 계기가 되었고 그 결과 지역주민들이 핵폐기장의 위험을 매우 크게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지선정 자체를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 지역주민들을 “설득”하려 드는 것이나 “대화”와 “설득”이 안 통하면 ‘정해진 절차대로 하겠다’는 식의 고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것이 의도했던 결과를 내기보다는 해당 기관에 대한 신뢰를 더욱 떨어뜨릴 뿐이며, 이는 지역주민들의 위험 인식을 오히려 고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 부처에서 주민들에 대한 “대화”와 “설득”의 노력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사태가 더 악화되는 역설적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지난번의 칼럼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정부가 지금까지 저질러진 절차상의 과실을 인정하고 한 발 물러서서, 부지선정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어려울 경우 당장은 임시저장고를 다소 확충해 저장하는 대안적 방법도 고려해 보겠다는 식으로 정책적 선택지들을 여럿 두고 논의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면 핵공학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핵폐기장이라는 “객관적 과학”이 지역주민들의 “근거없는 공포”에 의해 무시되었다며 볼멘소리를 늘어놓겠지만, 이는 “위험”의 개념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파악한 소치일 것이다. 이번 선정과정에서는 전문가들의 정량적 위험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지지도 않았지만, 설사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고도의 불확실성을 내포한 핵폐기장과 같은 사안에서 전문가들의 위험 판단이 지역주민과 환경단체의 그것을 무시해도 될 정도로 우위를 점한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핵폐기장에 관해 좀더 균형잡히고 많은 정보가 주어진 상태에서 지역주민들의 실질적인 참여를 보장하는 더욱 포괄적인 논의 틀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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