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재정건전화법 제정안, 폐기해야 한다

재정건전화법 제정안, 폐기해야 한다

복지 지출 억제하고 사회보험을 약화시킬 재정건전화법 제정안
국회 입법권 제약하고, 기획재정부에 과도한 권한을 집중시키는 문제점

 

지난 8월 10일 기획재정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재정건전화법」제정안을 입법예고 하였다.

첫째, 국가채무는 GDP 45% 이내로 관리하며 5년마다 재정여건변화를 고려하여 국가채무 목표를 재검토할 수 있다. 둘째, 관리재정수지적자는 GDP 대비 3% 이내로 관리한다. 셋째, 재정이 소요되는 법안을 제출할 때 그에 상응하는 기존 사업 축소 또는 폐지 등의 구조조정 방안 등을 첨부해야 한다. 넷째, 장기재정전망을 5년마다 수립하며 행정기관의 장은 소관 사회보험의 재정전망추계 및 건전화 계획을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다섯째, 기획재정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재정전략위원회를 구성하여 재정건전화를 주도한다.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소장 정세은 충남대 교수)는 재정건전화법 제정안이 국가채무와 재정수지의 건전한 관리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증세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복지지출 증가를 억제하는 것이 주요 목적인 법이라고 본다. 특히 제정안으로 도입될 페이고(pay-go) 제도는 소수의 국가에서만 시도되고 있는 극단적인 재정준칙으로서 국회의 입법권을 과도하게 제약하고 기획재정부의 재정권한을 과도하게 확대할 우려가 있다. 복지를 현 수준에 동결시키는 것은 한국 사회가 직면한 저성장, 양극화, 구조조정 해결에 부정적일 것이라는 점에서 재정건전화법 제정을 강력히 반대한다. 

 

기획재정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복지지출의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서 재정이 소요되는 제도가 도입되려면 그에 상응하는 기존 사업이 축소 또는 폐지되어야 하는 내용의 페이고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밝혀온 바 있다. 결국 기획재정부는 재정건전화법 제정안에 이러한 내용을 포함시켜 재정건전화를 명분으로 복지확대를 막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정부는 페이고 제도를 재정건전화를 이루기 위한 바람직한 수단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제도는 OECD 국가 중에서 미국과 일본만 도입한 매우 특수한 제도일 뿐이다. 미국, 일본을 제외한 많은 선진국들은 재정준칙을 도입하고 있지만, 이러한 준칙이 페이고 제도와 다른 것은 증세를 고려한다는 점이다. 이와 달리 페이고 제도는 증세를 하지 않고 지출 자체를 통제하겠다는 매우 극단적인 재정준칙이다. 미국의 경우 1990년부터 2002년 사이에, 그리고 2010년 이후에 재도입되어 운영되고 있고 일본에서는 2011년 이후에 운영되고 있는바, 이 제도의 거시경제 효과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상태이다. 또한 주요 선진국들이 재정준칙을 도입한 시기는 1990년대 이후로 이미 복지가 충분히 확충된 상태에서 더 이상 과도하게 증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도입되었으며, 이제 복지를 더욱 확충해 나가야 할 한국과는 다른 상황이라는 점도 유념하여야 한다.  

 

재정건전화법이 제정된다면, 사회보험도 위협받을 것이다. 재정건전화법 제정안은 사회보험을 관할하는 중앙행정기관의 장(보건복지부 장관, 고용노동부 장관 등)에게 사회보험 장기재정추계 및 건전화 계획을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제출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 규정도 결국 사회보험을 더욱 약화시키는 데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기획재정부는 그간 장기재정전망을 수행하면서 전망의 방법, 주요 가정치들을 제시하지 않은 채 복지를 현 수준에서 늘리지 않아도 고령화로 향후 국가채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이란 결과만을 제시한 채 당장 사회보험의 보장성을 낮추는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위협해 왔다. 이러한 행태는 향후에도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고령화의 부정적 측면을 과장한 장기재정전망을 발표하고 그것을 근거로 사회보험의 보장성을 낮출 것을 강제할 것이 예상된다. 재정건전화의 첫걸음은 고령화 위협이 아니라 장기재정전망의 추정 절차, 방법, 주요 가정치, 결과를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다.

 

재정건전화법이 통과되면 재정지출 규모가 현 수준에서 동결될 것인데 이는 국제금융기구들이 경기침체 대응책으로서 권고하는 재정지출 확대,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배치되는 것이다. 2008년 국제금융위기 이후 국제금융기구를 중심으로 확장적 재정정책이 효과가 있으며 경기 침체기에는 그 효과가 더욱 클 수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발표되어 왔고 국제금융기구들은 우리 정부에 대해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재정정책을 펼 것을 주문해 온 바 있다. 우리의 재정지출 규모를 살펴보면 OECD 국가들에 비해 현저하게 작은데 이는 특히 복지지출 규모가 OECD 국가 평균의 절반 정도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지출을 확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양극화 해소에 기여할 뿐 아니라 확장적 재정정책으로서 경제 성장에도 기여할 수 있는 정책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감세를 유지하면서 복지지출 증가를 억제하는 재정정책은 심각한 경기침체 상태에 빠진 우리 경제에 적절한 재정정책이 아니다. 결국 재정건전화법은 이미 실패한 MB정부의 ‘감세와 작은 정부’ 전략의 새로운 버전에 다름 아니다.

 

정부는 재정건전성 악화의 주요인이 복지지출 확대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지만 올해를 제외하고 현 정부 집권 이후 세수부족 사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던 원인은 감세정책과 낙수효과에 대한 낙관적 기대로 인한 잘못된 예산 수립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예산편성의 원칙으로 수입보다 지출 규모를 작게 가져간다는 양입제출의 원칙을 집권 초기부터 운용하여 왔고 그에 따라 총지출증가율을 총수입증가율보다 2~3%p이상 낮게 유지하는 정책을 운용하여 예산안을 수립해 왔다. 그러나 항상 예산안보다 더 큰 규모의 세수부족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는 감세로 인해 세수입이 줄어드는데도 정부가 낙수효과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에 근거하여 과도하게 높은 경제성장률을 전망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재정건전화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적절한 증세라는 점을 정부는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재정건전화법 제정으로 페이고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면 국회는 심각하게 입법권을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재정이 투입되는 새로운 법을 도입하기 위해서 다른 법을 폐기해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이해를 해칠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새로운 법의 도입을 꺼리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제약은 새로운 법의 혜택을 누릴 국민과 기존 법의 혜택을 누리던 국민들 간에 갈등상황을 조장할 가능성도 높다. 이처럼 국회의 입법권이 제약되는 반면, 재정건전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 기획재정부가 재정관련 권한을 과도하게 장악하게 될 것이다. 재정과 관련하여 이 법은 다른 법보다 우선하게 되며 중앙, 지방, 공공기관은 재정과 관련하여 기획재정부가 주도하는 재정전략위원회의 통제를 받게 된다. 심지어 위 기관들의 장은 지출 줄이기로 성과 평가를 받게 되며 지출을 줄인 경우 포상금도 받게 된다. 재정건전화를 명분으로 삼아 복지 확대를 억제하고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하며 기획재정부에게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는 재정건전화법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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