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위원회 칼럼(sw) 2012-11-28   852

[기고] 죽음에 익숙해진 사회

죽음에 익숙해진 사회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는 실패한 사회다. 모든 시민의 생존과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주요한 임무여야 한다. 안타까운 죽음을 막아야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해진다.

 

장애로 움직이기 어려운 동생 곁을 끝까지 지키다 아이는 불길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아이는 병원에서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 평소에도 아이는 동생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고 한다. 또 다른 죽음도 있었다. 한 여성 장애인이 집에서 발생한 작은 화재에도 밖으로 나오지 못해 질식으로 사망한 사건이다. 그녀는 장애인 문제와 활동 보조를 비롯한 다양한 장애인 복지 확대를 위해 영상으로 발언하는 운동가였다.

두 개의 죽음은 여러 공통점이 있다. 집에서 난 화재에 본인이나 가족의 장애로 불길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군가는 마땅히 책임져야 할 그들의 안전을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들은 어느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한 채 불길 속에서 죽어가야 했을까? 왜 그들은 목숨을 그리도 일찍 내놓았어야 하는 것일까?

 

사회적 약자 아닌 ‘동료 시민’으로서 돌봄 받아야

우리는 필요한 것을 함께 고루 누리기 위해 공동체를 만들고 그 비용을 세금으로 지불한다. 국방, 산업 발전 등 다양한 용처가 있지만 장애인이건 아동이건 노인이건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 대한 지원은 당연히 국가재정 배분에서 높은 우선순위를 가져야 한다. 이들에게 사회의 지원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약자이기 때문이라는 것과는 다른 얘기이다.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적절한 돌봄을 받아야 하는 것은 바로 동등한 동료 시민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에게 생존과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주요한 임무인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낸 세금의 상당 부분은 시민의 안전하고 괜찮은 삶의 보장이 아니라 대통령 집안의 토지 거래 비용 절감(혹은 절세)에,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는 공사에 돌아갔다. 생각해보라. 한 아이의 죽음은 절대로 부모만의, 한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료 시민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선별하고 계속 우선순위를 낮추는 당국에 먼저 책임이 있다. 그런데도 책임 있는 자 중 어느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단기적인 경제 효율만 앞세운 채, 시민의 삶을 방치하고 죽음을 불러오고 있다.

어쩌면 그런 죽음들을 ‘(내가 개입해서 바꿀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죽음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마땅히 막아야 하는 일이며,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다. 부모가 장애인 자녀를 제대로 돌볼 시간과 소득을 보장받거나 홀로 방치되는 시간 없이 지역사회의 지원을 충분히 받았다면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 함께하며, 그들의 안전을 돌보았다면 죽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충분히 영위했을 수 있다. 복지국가는 곧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는 장기적인 실패를 예정한다. 가장 중요한 자원인 사람을 함부로 취급하면서, 사람이 곧 경쟁력인 지식기반 경제로의 혁신을 하겠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요즘 앞다퉈 이야기하는 ‘혁신’은 지식을 만들어내고 전승해내는 인간을 필요로 한다. 사람 없이 혁신은 불가능하다.

여러 나라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노인을 위한 보편적 연금제도를 만들고, 아동수당을 도입하고, 국민건강 서비스체계를 만든 것은 이러한 제도들이 계층과 장애를 불문하고 사람을 잘 키워내는 데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모두에게 평등을 보장하되, 어느 누구도 홀로 뒤처지지 않도록 특별하고 세심한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사회를 통합하고 사람들의 소중한 힘을 모으는 데 중요하다. 여성 장애운동가, 간호사를 꿈꾸던 아이, 인디 음악가,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수많은 청소년과 노인의 아까운 죽음들을 생각해본다. 이런 안타까운 죽음들을 막는 것이 더욱 근본적인 의미에서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계속되는 죽음들에 대한 성찰과 사회적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언론은 사건 위에 사건을 덮고, 모든 죽음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게 만든다. 우리가 함께 충분히 슬퍼하고, 기억을 간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쁨만큼 슬픔에 관한 집단적인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의 희생을 무심히 흘려보내고, 망각하고, 스스로 무감각해지는 것은 이제 끝냈으면 한다. ‘잊지 않음’은 대가를 치러야 할 자들이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데에, 다른 사회를 꾸준히 지향하도록 만드는 데에 동력이 된다. 충분한 애도와 위로, 책임 있는 자들의 반성 이후에 다른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사회적 에너지가 솟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실종과 함께 수십 년 동안 우리가 잃어온 것이 바로 이게 아닐까.

주은선 교수

주은선ㅣ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 본 기고문은 시사인 271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원문보러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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