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위원회 칼럼(sw) 2013-04-17   1987

[기고] 영국 현지의 ‘대처논란’과 복지국가의 과제

[기고] 영국 현지의 ‘대처논란’과 복지국가의 과제

‘죽은’ 대처가 영국의 ‘살’ 길을 묻다

 

 

“Margaret Thatcher, 향년 87세로 2013년 4월 8일 잠들다.”

 

2013년 4월 17일 국장으로 치뤄진 대처의 죽음을 훗날 역사가들은 이렇게 짧게 기록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역사가다운 역사가를 자처하는 이라면 이렇게 간단한 사실에 의한 기록만으론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대처의 죽음은 그가 집권한 1979년 3월에서 1990년 11월까지 11년 8개월 만큼이나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현재의 논쟁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대처는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영국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말하는 데에 동의할 듯 싶다.

 

왜 이처럼 그녀는 죽어서도 분열적 논란의 한 가운데 있는가?

대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오열을 터뜨리며 애통함을 금할 수 없는 영국인이 있는가하면, 런던의 트라팔가광장에 수천명이 운집하거나 리버풀의 밤거리를 수백명이 배회하면서 환호(!)를 아끼지 않고 있다.

 

물론 대처가 세운 것이긴 하지만, Conservative Way Forward(CWF)에서는 1500만 파운드(한화 약 260억 원)의 기부금을 걷어 박물관과 도서관, 교육센터를 세우겠다고 밝히면서 대처의 업적을 후대들이 본받도록 할 것이라 선언하였다. 반면에 대처의 죽음을 고대하기나 했다는 듯이 반대론자들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Ding Dong! The Witch is dead!(딩동! 마녀가 죽었다!)’란 노래를 영국 BBC 라디오 4의 차트 2위까지 끌어올리며 대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어 BBC 방송국을 곤혹스럽게 하기도 했고, 장례 당일날도 운구행렬을 맞아 등을 보이며 돌아서는 퍼포먼스를 보임으로써 영국 경찰을 또 다시 곤혹스럽게 하자고 야단이다

 

이렇게 사후에 극명한 국민들의 반응에 처한 대처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인가?

간단히 정리하면, 보수주의의 기치인 시장경제의 자기조절능력을 극대화하고 강한 영국을 재건하고자 노력한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이었으며, 20세기 최장 총리였다.

 

대처의 옹호자들에 의하면 그녀 행적은 대처가 영국 경제와 사회의 구세주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반대입장에 선 이들에겐 그녀는 영국을 철처히 망가뜨린 장본인으로 보였다. 물론 항상 그렇듯이 그 중간에 서있는 견해가 없지는 않다. 샌드브룩(Damini Sandbrook) 같은 역사학자는 BBC의 기고문에서 영국은 이미 구시대를 버리고 신조류에 편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보고, 대처가 수상이 되지 않았다해도 비록 그 속도는 다소 느렸겠지만 전체적인 변화의 방향은 대처가 추구한 방향이었으리라 말하고 있다.

 

어쨌든 대처는 세계사적으로도, 그리고 영국 최현대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1980년대 전 기간동안 영국 수상으로 있으면서 영국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한 것만은 사실이다. 대처의 죽음을 두고 대처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현재의 젊은이들이나 당시 꼬마였으나 이제 중년이 된 이들까지도 자신들에게 끼친 심각한 해악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코먼(Julian Coman)은 아주 객관적으로 대처에 의해 초래된 영국의 변화를 스무가지로 정리하기도 한다. 대도시 런던의 국제거점도시로의 변모, 민영화, 교육개혁, 영국 노동당의 변화, 세계 정치사의 변화 등 매우 굵직한 건도 있지만, 우리가 잘 짐작하지 못하는 보수당과 영국 교회의 불편한 관계의 시작, 전후 가동되어왔던 노-사-정 협의체제의 붕괴, 포클랜드전쟁 이후 군부의 위상 고조 등도 대처에 의한 변화란다. 또한 영국인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변화를 거론하는 것도 빠지지 않았다. 영국인들이 미치도록 열광하는 축구를 보기위해서는 ID카드 발급을 받아 누가 어느 좌석에 앉았는지가 밝혀지도록 해서 훌리건들의 난동을 추적할 수 있게 한 것이나, 가게나 주점들이 24시간동안 열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은 일, 여성정치인들의 옷차림을 통한 대중에 대한 어필이 시작된 것, BBC 방송 수신료를 누구나 세금처럼 내게 만든 일 등이 대처가 만든 일상적인 변화다.

 

그렇다면 대처 수상시절의 공과를 경제지표라는 객관적 수치에 의해 보면 어떠할까?

우선 대처정부가 맞이한 당시 최대의 과제 중 하나는 70년대 중반 25%까지 뛴 물가상승이었다. 대처는 물가를 잡기 위해 이자율을 높이고 정부 재정지출의 팽창 억제를 강하게 밀어붙였으며 80년대 중반 내내 물가상승율은 5% 내외에 머무르게 하여 마침내 그녀의 뚜렷한 성과라고 내세울 수 있다.

 

그렇지만 경제이론의 ABC인 필립스곡선(Phillips’ curve)이 제시하는 것처럼 낮은 물가는 높은 실업율과 샴쌍둥이 관계에 있으니, 대처 기간 동안 실업자 수는 대폭 증가하여 80년대 중반 내내 연간 300만을 넘어섰으며, 영국의 북부지역에는 5명 당 1명이 실업자가 되는 처절한 상황에 영국사회가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결국 이들과 그의 가족들이 겪었던 비참한 인생역정이 오늘날 대처의 죽음을 환호하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 되고 말았다.

 

경제성장율은? 대처 집권 1기에는 마이너스 성장율을 보이며 깊은 불황을 보였고, 집권 2기와 3기 초반까지는 회복세, 1988년 6%에 육박하는 최고조의 성장세를 보이기도 했지만 재임 마지막기간인 89-90년간의 성장율은 하락세를 뚜렷이 보였고 마침내 퇴임 이후인 1991년에는 또 다시 마이너스 성장률에 영국경제가 직면하게 된다.

 

결국 대처수상 재임시절의 각종 경제관련 지표는 옹호론자들이 자부할 만큼 그렇게 좋은 성과로 일관된 것도 아니었고, 반대론자들이 거품을 물 정도로 최악도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대처의 공과를 정확히 평가하자면 대처 이후 지금까지의 영국이 보인 성과에 주목해야 한다는 여러 논자들의 지적은 옳다. 그 중에서도 <가디언>에 휴턴(Will Hutton)은 “영국경제가 진짜 구원되었다면 지금의 논란이 왜 생겼겠나?”라고 썼다. 그에 의하면, 대처는 시장의 신화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공공영역과 사적영역간의 균형이 필요함을 보지 못했고, 창조적인 네트워크의 힘이나 장기적인 투자, 그리고 매우 정밀한 인적 자본 육성 등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본다. 또한 노동자에게 엄격한 준칙을 요구한 것만큼이나 기업과 주주, 은행에게도 요구했어야 했지만 일방적인 노동자계급의 양보만이 강제된 것이었다.

 

결국 대처 시기의 긍정적인 경제성과가 있었다고 해도 단기적인 대증요법에 의한 일시적 성과에 불과하였지 장기적인 지속가능한 성격의 것이 못되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실제로 1979년 이전 20년 동안 영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75%였다. 최근의 30년(1982년-2012년)까지의 경제성장률 2%를 갓 넘기고 있다. 결국 대처 시절과 그 이후에 일부 좋은 성과를 냈다 해도 이는 자산에 대한 거품과 신용, 금융 등으로 버티면서 이루어낸 성과에 불과한 것이며, 나아가 불평등의 심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불사하여 수많은 국민들의 고통을 동반한 것을 생각하면 전혀 훌륭한 성과에 들지 못한다. 더군다나 최근 영국의 상품을 해외에서 선호하는 경향은 악화일로를 보여 2012년 무역적자 폭이 국내총생산의 6.9%에 달하는 것만을 보아도 영국의 대외경쟁력은 영 나아질 기미가 없어 보인다.

 

더군다나 대처 이후 노동당 집권 시의 수상이었던 블레어(Tony Blair)나 브라운(Gordon Brown)도 이러한 대처시절의 기본 노선에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수정하지 않고 그 연장선상에서 자신들의 성과를 보이려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를 남길 수밖에 없다. 제3의 길로 새로운 신노동당 노선을 재건했지만, 이는 대처의 유산을 유적으로 안은 채 간 길이었기에 영국민들은 새로운 참신한 대안으로 바라 볼 수 없었고 결국 현재의 노동당이 처한 불행한 처지의 기반이 되지 않았을까?

 

이제 영국은 죽은 대처로 인해 다시 한번 영국의 갈 길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단순히 대처의 죽음이 처칠 때도 15분마다의 타종을 멈추지 않았던 빅벤(Big Ben)의 종을 멈출 정도로 경건히 받들어야 하는지 아닌지, 대처의 장례식 비용이 1000만 파운드(원화 170억 원)에 달하고 게다가 동원된 경찰의 행정비용을 일부러 누락시켰는지 아닌지 의회에서의 논쟁으로 국민에게 식상함을 주며 끝날 수는 없다.

 

과연 대처의 시장만능, 민영화 정책은 끝내 옳았는지, 영국 국민의 위대한 가치가 상업적 잇속 앞에서 속물적 가치로 대체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세계 경제에서의 경쟁력 우위가 경쟁과 선택의 자유를 앞세운 현 교육시스템에서 확보되는지 아니면 책임 있는 공교육의 장에서 가능한 지 등에 대해 더 격렬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논의는 당연히 현재 카메론 정부가 거세게 밀어부치고 있는 복지축소정책에 대해서도 강력한 사회적 자성의 날을 세우도록 진일보해야 한다. 지난 4월 1일 월요일을 블랙 먼데이로 부를 만큼 수백만의 영국인에게 감세혜택보다는 복지수당의 피해를 입힌 정책에 대하여, 또한 장애인을 포함하여 가족 수보다 좀 더 여유로운 주거공간을 점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이들이 주택수당의 축소로 인해 길에 나앉도록 내모는 정책에 대하여, 그리고 일부병원이 개인 환자를 통해 수익을 올리도록 함으로써 영국민의 자부심인 국민건강서비스(Natioanal Health Service, NHS)의 약화를 초래하는 정책에 대하여 대처주의의 계승이냐 청산이냐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재고해 보아야 한다.

 

물론 영국민의 50%는 대처 시절의 정책이 좋았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고 35%만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현실은 여전히 영국민이 대처 시절에 대한 향수를 품고 있고 강력한 영국, 변화의 생동감이 있는 영국을 원한다는 현주소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대중의 피곤하고 불안한 삶이 진정한 현실이고, 복지국가 원조국가로서의 경험치가 아직도 대중의 위안처를 제공하고 있다면, ‘죽은’ 대처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살아있는 영국인들에게 던진 물음을 계기로 영국은 영국의 살길에 대해 제대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영국은 1980년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의 물꼬를 연 국가로서 이젠 그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종말을 실제적으로 선언하는 국가로서 결과 맺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대처의 죽음은 어쩌면 2008년 세계금융위기와 각종 불행의 징조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이 연장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있어 상징적이고도 실질적인 종말의 계기가 되었다고 이후의 역사가들이 기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국민의 이러한 선택은, 아직도 신자유주의의 신화에 갇혀있고 복지국가의 가치에 진정 눈뜨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게도 새로운 성찰의 계기가 될 수도 있으며, 혹 ‘한국의 대처’를 실현해보고 싶은 유혹이 어디에선가 움트고 있다면 그 싹이 미연에 제거되는 다행스런 결과를 낳을 지도 모른다. 결국 복지국가 원조인 영국의 선택에 주목해야 할 진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 이태수 교수는 현재 영국의 요크대학 사회정책 및 사회사업학과에 초빙교수로서 1년 예정으로 머물고 있습니다.

이태수 꽃동네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태수ㅣ꽃동네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자문위원

* 본 기고문은 2013. 4. 17 프레시안에 게재된 글입니다 원문보기 클릭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